가래
가물치
가지
간재미
갈근
갈치
감자
감태
감초
감홍로주
강활
강황
게장
고구마
고등어
고본
고사리
고슴도치
고추
고추장
곤쟁이
골풀
곰취
곱돌
과루인
곶감
과메기
곽향
광어
구기자
구리
국수
국화차
굴비
금불초
기장
김치
꼬막
꼴뚜기
꽃게
꿀풀
나물
나전칠기
낙죽장도
낙지
냉이
노루
녹두
녹용
녹차
농어
뇌록
누치
느룹나무
느타리버섯
다시마
다람쥐
다래
다슬기
닥나무
단감
단목
달래
담비
담쟁이
당귀
대게
대구
대나무
대발
대추
더덕
더덕주
도라지
도루묵
도마뱀
도미
도자기
돈육
돈차
돌미역
돔배기
동래파전
동백기름
동충하초
돚자리
돼지
된장
두꺼비
두릅
두충
딸기
들기름
마늘
마뿌리
만화석
막걸리
망둥어
매생이
매실
맥문동
맨드라미
머루
머루주
메밀차
멸치
명란젓
명설차
명태
모과
모란
모래무지
모시
모자
목기
목화
무명
무우
문배주
문어
미나리
미역
민속주
민어
밀랍
박하
방풍
백랍
백련잎차
백렴
백미
백반
백부자
백조어
백하수오
백합
밴댕이
뱅어
벼루
병어
법주
보골지
보리
복령
복분자
복숭아
복어
부들
부자
부채
부추
붉나무
붕어
비빔밥
비자
뽕나무
사과
사슴
산나물
산삼
삼림욕
산수유
살구
삼릉
삼배
삼치
상합
상황버섯
새우
새우젓
생강
석결명
석곡
석류
석영
석이버섯
석청
석창포
소금
소라
소주
속새
송어
송이버섯
송화가루
수달
수박
수정
숙주
순채
숭어
승검초
식해
안동포
안식향
앵두
야콘
야콘잎차
약쑥
양귀비
어란
어리굴젓
어육장
엄나무
연밥
연어
연엽주
열목어
염전
엽삭젓
오가피
오미자
오곡
오골계
오정주
오죽
오징어
옥돔
옥로주
옹기
옻칠
왕골
용문석
우무
우황
울금
웅어
위어
유기
유자
유자차
유황
육포
은어
은행
이강주
이스라지
익모초
인삼
인삼주
잉어
자단향
자두
자라
자라돔
자연동
자하젓
작설차
작약
장군풀
장아찌
전모
전복
전어
전어젓
전통주
젓갈
젓새우
정어리
조개
조기
조홍시
좁쌀
종어
종이
주꾸미
죽렴장
죽로차
죽순
죽순채
죽염멸치
죽엽청주
죽피
죽합
준치
중국차
지라돔
지치
질경이
찐빵
참가사리
참게
참기름
참죽나물
참외
찹쌀
창출
천궁
천남성
천문동
청각
청국장
청란석
청목향
청자
초콜릿
초피나무
초하주
추성주
취나물
치자
칠선주
콩잎
토마토
토끼
토사자
토주
토파즈
토하젓
파전
패랭이
편두
포도
포도주
표고버섯
표범
하늘타리
학슬
한과
한라봉
한우
한지
해구신
해달
해삼
해파리
해홍나물
향나무
호도
호로파
호두
홍삼
홍삼절편
홍시
홍어
홍주
홍합
화개차
화문석
황기
황률
황벽나무
황어
황옥
황진이주
황태
회양목
후박
후추
흑돼지
흑염소
흑한우
로그인 l 회원가입

신청하기

  • 통영나전칠기, 나전칠기(螺鈿漆器)란 목기(木器)의 바탕을 소재로 나전을 가공하여 부착하여 칠을 한 공예품을 말한다.

    통영 나전칠기 나전칠기는 옛부터 통영에서 유명한 수공업제품으로 나전이란 야광패나 전복껍데기 같은 조개 껍데기를 사용하여 무늬대로 잘라 목심이나 칠면에 박아 붙이는 칠공예기법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원래 자개라고 하였다. 나전칠기란 자개 조각을 여러 문양으로 박아넣어 조각한 칠기를 말한다. 나전칠기(螺鈿漆器)란 목기(木器)의 바탕을 소재로 나전을 가공하여 부착하여 칠을 한 공예품을 말한다. 고유어로는 자개박이라고도 하며, 널리 대모(玳瑁), 호박, 상아, 보석등의 소재로 이용하는 것도 포함한다. 나전칠기는 대한민국 고유의 기(器)이다.나전칠기나전칠기장란 조개·소라·전복 등의 껍질로 기물(器物)의 면과 가구의 면을 칠과 함께 장식하여 완성한 나전칠기 기능이 뛰어난 사람을 말한다. 곧 나전칠기는 옻칠한 농짝이나 나무 그릇 등에 진주빛이 나는 자개조각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박아 붙여서 장식한 공예품이다. 역사나전기법은 중국 당나라 때에 성행하였으며 그것이 우리 나라와 일본에 전하여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 전래의 초기에는 주로 백색의 야광패(夜光貝)를 사용하였으나 후대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청록빛깔을 띤 복잡한 색상의 전복껍데기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고려시대 나전에 관한 문헌상의 첫 기록은 11세기에 문종이 요나라 왕실에 나전칠기를 선물로 보냈다는 동국문헌비고의 기록이며, 12세기 초부터는 교빙지 交聘志에 고려의 나전제품이 빈번하게 기재된다. 당시의 고려 나전에 대한 평가는 1123년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쓴고려도경에 잘 나타나 있다. 즉 “그릇에 옻칠하는 일은 그리 잘하지 못하였지만 나전 일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고 언급하고 있다.여기에서 그릇의 옻칠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은 주칠·채칠(彩漆)·조칠(彫漆)등 화려한 칠기법을 별로 구사하지 않았다는 지적일 것이다. 또한 “기병이 탄 안장은 매우 정교하고 안장을 나전으로 꾸몄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고려 나전칠기의 정교함을 다시 한번 알 수 있다나전이라는 말은 한국·중국·일본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한자어이며,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자개’라는 고유어를 써 왔다. 따라서 그 만드는 일을 ‘자개박이’ 또는 ‘자개박는다’라고 일컫는다. 우리 나라의 나전칠기는 일반적으로 목제품의 표면에 옻칠을 하고 그것에다 한층 치레 삼아 첨가하는 자개무늬를 가리키며, 그런 점에서 목칠공예에 부수되는 장식적 성격을 띠고 있다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자개(紫蓋)’라고 기록하기도 하였지만, 이는 음차(音借)한 표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11세기 고려 때의 언어를 기록한 계림유사 鷄林類事에서 ‘나왈개개(螺曰蓋慨)’라 했는데, 그것이 자개[差慨]의 오기임이 사실이라면 일찍부터 자개라고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상품정보나전이란 나(螺)는 나선형의 껍질을 가진 패류를 가리키는 동시에 장식에 쓰이는 각종 패류를 칭 한다. 전(鈿)은 금화식(金華飾)이라 할 만큼 황금으로 장식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전이란 패류를 가지고 장식하는 것 또는 장식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나전칠기(螺鈿漆器)란 나무와 와태(瓦胎), 가죽, 대나무 등속의 기물에 옻칠을 하여 밑바탕을 처리한 위에, 영롱한 자개를 톱으로 자르고 줄을 쓸어 상사칼로 끊어가면서 정교하게 문양을 붙인후, 다시 옻칠을 하여 완성시킨 기물을 말한다.통영의 나전칠기는 1604년 이경준 제6대 통제사가 통제영을 이 고장으로 옮기면서 육방을 설치하여 공방에서 진상품을 비롯하여 다양한 공예품을 생산, 조달하는 일을 전담케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일제시대에 청패세공의 기술로 발전을 가져오다가 1926년 파리의 만국박람회에서 전성규와 김봉룡의 작품이 입선함으로써 우리 전통공예의 우수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이를 계기로「통영자개」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나전칠기 기법에는「끊음질」과「줄음질」로 구분되고 있는데, 통영에서는 끊음질을 주로 하고 있다. 1962년<문화재보호법>이 시행됨에 따라 1966년 통영나전칠기(줄음질)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로, 1975년에는 끊음질이 제54호로 지정․ 관리되어 오다가 1995년 3월 끊음질과 줄음질을 통합하여 나전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근래에 들어 나전은 칠기공예품에 국한되지 않고 장식용품(단추,악기, 액세서리 등),건축자재 (인테리어)등에 새로운 소재로 이용되어 그 활용범위가 다양화 되어 가고 있다. 통영이 나전칠기의 본 고장이 된 것은 400여년을 거슬러 올라가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 시절 설치한 12공방 중 상하칠방에서 유래한다. 통일신라시대; 칠공예품은 현재 분명한 예는 없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칠전이라고 하는 관청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관영의 칠공품제작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려시대; 나전이 융성한 시대이며, 고려사, 고려도경, 동국문헌비고에기록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부 유물도 전승되고 있다. 동국문헌비고에 의하면 고려 문종(재위;1046∼1083) 때 고려가 요(遼)에 나전칠기를 예물로 보냈다는기록이 있다. 고려도경에 저자 서긍(徐兢)은 나전칠기의 양상을 매우 자세하게 전해주고 있다. 이러한 목칠나전의 정품들은 당시 관영 공예품 제작소였던 중상서에서관장하여 양산된 사실이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 기록되어 있다. 이 중상서는 목종 때 설치되어 고려 말기까지 존속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고려대장경이 간행되면서 그 경책(經冊)을 넣을 나전경상을 만들기 위하여 1272년(원종 13년)에 전함조성도감이 설치되었고, 이때 만들어진 경상류가 지금 한국을 비롯하여 일본, 미국, 영국, 독일, 네덜란드 등의 미술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나전의 명품들이다고려나전은 문양에 있어 국당초의 나전문양과 청자상감문양이 주류였다. 또한 주색과 황색의 복채를 한 대창을 박아서 장식하는 대창복채법과 뿔을 사용한 화각장기법은 한국공예의 독자적인 칠공예이다11세기에는 외국에 나전칠기를 예물로 보낼 만큼 뛰어난 작품을 생산하였으며, 그 유물들이 실증하듯이 11~12세기 무렵의 고려 나전기술은 그 절정기였다. 그 바탕은 통일신라시대의 나전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며, 고려가 이어받아 오늘날 고려나전에서 볼 수 있는 분명한 민족양식으로 정착시킨 것이다13세기 후반부터 고려 나전공예는 고려왕조의 쇠퇴와 더불어 고려청자가 그러하였듯이 낮은 조화를 거듭하여, 나전 또한 그 의장과 기법이 성글고 거친 조선 전기 나전의장으로 전환되었다15~16세기의 나전의장은 연당초, 쌍봉, 쌍룡, 보상화 무늬 등 고려시대의 도안이 아주간략 해지고, 아울러 표현이 대형화되었다17~18세기에는 전술한 주된 조류가 쇠퇴하면서 점차로 매죽, 화조 등 약화된 그림의 의장이 우세해지며, 이 시대의 청화백자의 도문과 더불어 순정적인 표현이 많아졌다19세기에는 기법에 끊음질이 성행하고, 문양보다는 자연묘사가 흔해지면서 십장생과 산수 풍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많아졌다. 그리고 주제를 익살과 동심적으로 표현하는 기풍이 늘어 색다른 치기의 미(美)로써 조선 후기의 나전의장이 지니는 하나의 매력을 형성하기도하였다.그 후 일제강점기에 나전공예는 근근히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8 ·15광복과 더불어 다시 개화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경제가 성장기에 접어든 1960년대부터는 나전공예 부문에서의 부흥기를 맞게 되었다관련근거 및 출처[螺鈿漆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동국문헌비고, 교빙지,계림유사, 고려사식화지

진상품 이야기 더보기
신청하기

  • 나전칠기를 만든 장인들

    우리의 기억에... 대표하는 공예품으로서 가장 오랫동안 전형적인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전칠기가 아닐까 한다. 이미 통일신라 때에 평탈 기법으로 제작하여 나전칠기가 제작될 기반을 만든 이후 고려시대에 예술적 경지에 올랐고, 조선시대 내내 누구나 애호하는 공예품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인기가 식지 않고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주지하다시피 나전칠기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1966년의 일이다. 갓일이 전통 공예기술 중 가장 이른 시기인 1964년에 종목으로 지정되었는데, 바로 그 다음에 지정된 공예종목이 바로 나전칠기인 것이다. 그만큼 나전칠기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공예로 인식되었고, 일찍부터 그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이러한 나전칠기를 만드는 장인에는 누가 있는가? 해방 이후 중요무형문화재 나전칠기 보유자로 인정되었던, 그들 장인의 이름을 다시 불러 본다. 김봉룡, 심부길, 송주안, 김태희가 그들이다. 이들의 스승은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근무한 전성규였다. 철종 때 상궁이었던 사람의 양아들로 어려서부터 궁중을 출입하였기에 궁중의 공예품을 잘 알았고, 일제강점기에 골동품장사까지 하다가 나전칠기에 관심을 갖고 공장을 설립하여 이들 나전장인을길러냈다.해방 이후 나전장인으로 첫 번째 꼽는 장인은 김봉룡(金鳳龍, 1903-1994)이다. 그는 통영 출신이고 근대기에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던 대표적인 나전장인이다. 그는 1924년 일본 교토시 주최 세계산업박람회에 출품하여 수상한 것을 비롯하여 1925년 파리박물관에 꽃병을 출품하여 은상을, 1927년 도쿄 우량공예품 전시회에서 금상을, 1934년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는 등 일제시대 내내 나전칠기로 이름이 높았다. 해방 후에도 그의 영향력은 대단하였고, 1950년 6.25 전쟁 때 고향으로 내려가 경남 기술원 양성소 소장으로 많은 후계자를 양성하였다. 1966년 6월 29일 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을 지정할 당시 지명도 면에서 그를 뛰어넘을 장인이 없을 정도여서, 그를 나전칠기 보유자로 인정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1968년 이후 옻칠이 많이 생산되는 원주로 이주하였고,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이 모여 만든 인간문화재모임(현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존협회)의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할 정도였다. 그의 사후 2년 뒤 1996년 12월 10일 제자로서 주름질을 잘 하였던 이형만(1946년 생)이 보유자로 인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필자가 미술대학을 다니면서 근대 공예사를 공부할 때 빛바랜 일제 때의 신문에서 그의 이름을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어, 가장 기억나는 인물도 바로 그였다. 이후 내 기억에 남겨진 그는 희고 긴 아름다운 수염을 흩날리며 고고한 자태를 뽐내곤 하는 모습이었다. 근대기 나전칠기를 대표하는 그에게 배운 여러 제자가 현재 활동하고 있어 스승의 이름이 잊히지 않고 계속 불리고 있다.나전칠기의 기술 중 끊음질 장인으로는 심부길(沈富吉, 1906-1980)과 송주안(宋周安, 1901-1981)이 보유자로 인정되어 활동하였다. 그중 전자는 김봉룡과 비슷한 연배여서 그 또한 전성규 스승을 만나 나전칠기를 배웠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남의 집에 출장을 다니며 끊음질 작업을 해주었다. 때문에 일찍부터 이름을 떨쳤던 김봉룡 보유자와 달리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고, 발굴 또한 늦어 1975년 1월 29일에야 비로소 중요무형문화재 제54호 끊음질 보유자로 지정 받았다. 사후에 그의 이름은 잊혀졌다. 그러던 그의 이름을 다시 부르기 시작한 것은 감이 빨갛게 익어가는 2012년 가을날부터였다.당시 중요무형문화재 제113호 칠장 정수화 보유자가 국립무형문화유산원에 스승의 유품인 칠주걱과 귀얄 및 드로잉 165점을 기증하면서였다. 장인과 오랜 세월을 함께 했을 법한 닳고 닳은 도구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먹먹하였다. 그렇게 잊었던 그의 이름을 1년 뒤 2014년 1월 말에 다시 들었다. 심부길의 외손자로부터 외할아버지를 추억하게 되어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후자의 송주안은 통영에서 나고 자랐으며, 그 또한 위 두 장인의 스승인 전성규를 만나 나전칠기를 본격적으로 작업하였다. 해방 후 우여곡절 끝에 아들인 송방웅이 군대에서 제대하자 태평동 자택에 태평공예사라는 공방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그 또한 끊음질 솜씨로 1979년 5월 24일 79세의 고령에 보유자로 인정받았고, 2년 뒤에 별세하였다. 하지만 그의 끊음질 솜씨는 아들인 송방웅(1940년 생)에게 이어졌고, 그 또한 부친과 마찬가지로 1990년 10월 10일 끊음질 보유자로 인정받아 대를 잇고 있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보유자가 이어지면서 송주안의 이름은 계속 불리게 되었다.한편, 우리에게 생소한 장인이 바로 김태희(金泰熙, 1916-1994)이다. 그는 나전칠기계의 거장인 김진갑(金鎭甲)에게 배웠고 1934년 제17회부터 1942년 9년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연속 특선하였으며, 해방 후 1974년부터 1981년까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연속 입상하였고 그 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84년 일본 마이니치신문사 초청으로 도쿄 등 일본 지역을 순회하며 전시회를 개최하였으며, 1985년에는 서울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런 성과로 1992년 11월 10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의 작업은 기존 장인들과 달리 현대적인 도안의 창작품이었다. 때문에 그의 사후 보수적인 전통공예계에서 그의 이름이 사라졌는데, 2013년 무형문화유산자원으로 나전장을 조사하면서 다시 듣게 되었다. 그에게 나전일을 배워 성북구 정릉에서 작업하는 김선갑(1952년 생) 장인을 조사하면서였다. 그는 스승의 작품뿐 아니라 도안 수천 점을 차곡차곡 소장하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언젠가 그것들이 무형문화유산원 아카이브에 이관되어 김태희 장인의 이름이 앞으로도 영원히 불리길 기대한다.나전칠기는 고려시대부터 지금까지 1,000년 이상 우리나라 공예를 대표하는 스테디셀러이다. 더욱이 2015년 올해는 나전칠기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된 1966년부터 50년째 되는 해이다. 이렇게 나전칠기가 오늘까지 계속 이어지게 된 데에는 전통 장인들이 보유자로 인정되었기에 가능하다. 그들 중 누군가의 이름은 온 국민의 인구에 회자된 반면, 누군가는 거의 잊혀졌다. 이들 장인 중 누군들 소중하지 않으랴. 특히 잊었던 이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 그의 체취가 담긴 작품이나 도구 및 드로잉 등이 계속 우리 곁에 남아 그들의 이름이 앞으로도 계속 불리길 바란다.   - 글 장경희(한서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교수)-    

  • 빛의 예술 나전칠기의 전통 형성과 제작기술의 발달

    나전칠기는 빛의 예술이다 나전칠기는 대낮의 밝은 빛이나 눈이 부신 전등불빛 속에서는 번들거리는 반사광이 나타나게 마련이고 어두운 바탕과 밝은 자개의 강한 명암대비는 고상한 느낌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어둑어둑한 방안에 나전칠기가 자리 잡고 있을 때에 그 멋을 나타낸다. 창호지를 바른 문을 통해 들어오는 낮의 걸러진 빛이 드는 방안이나 촛불·등잔불로 밤을 밝힌 방안에서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다. 자개의 오색영롱한 빛깔은 전복(또는 소라)껍데기의 안쪽 면에 세월을 따라 켜켜이 쌓인 투명한 층(진주층) 속에서 빛이 반사되며 간섭干涉현상이 생겨서 나타나는 것이다.  고대 중국과 일본 나전기에서는 야광패(夜光貝, 중국 남해와 일본, 미얀마, 필리핀 등의 해안에 서식하는 소라종류)가 사용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시종일관 남해안과 제주도의 특산물인 복패(鰒貝, 전복껍데기)를 가공하여 사용했는데 야광패보다도 더 강한 빛깔의 변화를 나타내며 보는 각도에 따라 빛깔이 달라 보여 신비롭다. 복패는 야광패보다 푸른빛과 보랏빛을 더 많이 띠므로 청패靑貝라고도 부른다. 나전칠기의 전통 형성과 제작기술의 발달 우리 조상은 자개 빛깔을 매우 좋아했다. 그렇기에 과거 중국·한국·일본에서 모두 나전칠기가 발달했었으나 오늘날 중국과 일본의 나전칠기의 특징은 이미 쇠퇴한 지 오래 되었고, 중국은 척홍剔紅칠기라고 하는 조칠기彫漆器가, 일본은 옻칠 그림에서 비롯된 시회蒔繪칠기가 칠공예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고금을 통해서 줄곧 나전칠기가 발전해 왔던 것이다.  이미 11세기에 고려 조정이 외국 왕실에 보내는 선물 품목에 나전칠기가 있었음을 기록한 문헌(『고려사』, 『동국문헌비고』)이 있기도 하거니와 12세기 전반기(1123년)에 고려에 다녀간 송나라 사신의 견문록인 『고려도경』에 고려 나전칠기의 세밀하고 정교함을 ‘귀하다’고 칭찬한 기록이 있는 점, 많지는 않으나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고려나전합, 경함, 상자, 불자 등의 모습을 보면 세계적 수준의 고려 나전칠기의 진면목을 알 수가 있다.  13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고려 나전칠기는 세계 제일의 수준에 도달했던 것이다. 『고려사(식화지3)』의 기록에 의하면 나라에서 운영하는 공방에 자개일을 전문으로 하는 장인인 나전장螺鈿匠과 옻칠일을 전문으로 하는 칠장漆匠 및 나무로 된 기형을 짜는 소목장小木匠이 구분되어 있었는데 각 장인이 분업으로 전문성과 생산성을 높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13세기 후반기에는 불경 보관을 위한 나전칠기 함을 생산하는 국영 기관인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을 둔 때도 있었다. 조선 시대에도 국영 공방(경공장)에 나전장·칠장·목장木匠으로 구분된 전문적 장인이 소속되어 분업으로 작업하였다.(『경국대전』, 『대전회통』 등의 기록)   18세기 후반 경상남도 두룡포의 삼도수군 통제영(현: 통영시)에 12공방 체제가 갖추어진 가운데 칠장방(장인수 27명), 패부장방(5명), 소목장방(10명) 등 나전칠기 제작을 위한 분업적 공방이 설치되어 있었고 인근 지리산 지역(함안, 함양 등)에서 채취된 옻칠과 남해안과 제주도산 복패를 이용해 본격적인 관官수요의 나전칠기 생산이 이루어졌다. 통제영 12공방은 1895년 폐영될 때까지 번성했으며, 이러한 관영 공방에서 양성된 장인들이 사장私匠으로서 민간 수요의 나전칠기를 수없이 생산했던 것이다.19세기 초반기에 간행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기록에 “통제영을 이곳에 둔 것은 군사를 길러 유사시를 대비하자는 것인데, 오로지 수많은 장인을 길러 한양의 권문세가가 구하는 것만을 만들고 있어 통제영 설치의 처음 뜻과 크게 위배되니 마땅히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통제영 공방제품은 관수용품만 생산한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이와 같이 나전칠기를 생산하는 관영공방이 고려시대 이래 조선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있었다는 것은 한국 나전칠기의 전통 형성과 제작 기술 발달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우리민족의 독창적인 전통공예 나전칠기 발생처는 중국이지만 기술이 발달하고 국풍화國風化되며 성행했던 고려시대의 나전칠기는 오히려 중국(원대)에 영향을 끼친다. 즉 중국나전은 야광패로 만든 후패(두꺼운 자개)만을 사용했었으나 복패로 만든 박패(얇은 자개)를 쓰는 고려의 영향을 받아 원대에 복패로 된 박패도 사용하면서 고려가 개발한 자개무늬 표현기법의 한가지인 끊음질기법까지도 원대 나전칠기에 도입되었다.   끊음질은 자개선으로 구성되는 기하학적 연속무늬와 유연한 곡선을 표현하기에 매우 유리하며 경제성 높은 기법이다. 기하학적 직선 끊음질 연속무늬가 13~14세기 고려후기의 유물(일본 기타무라미술관 소장 나전모란당초문경함 및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동양미술관 소장 나전국당초문경함)에 최초로 나타났다. 곡선 끊음질은 조선 전기의 나전칠기에서 유연한 곡선을 지닌 당초무늬의 줄기표현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무늬의 구획을 두른 곡선의 구획 윤곽선에도 사용되었는데 고려시대에 이러한 곡선들은 모두 금속선(외줄선 또는 두 줄을 꼬은선)을 사용했던 것이다. 조선전기 말 경(16세기 말~17세기 초)에는 조선 특유의 새로운 자개무늬 표현기법인 할패법(타찰법)이 등장한다. 이 기법은 주름질로 만든 면형무늬에 불규칙적인 균열을 넣는 것인데 굽은 곡면의 기형 표면에 면형자개무늬를 붙이기에 유리한 수법이기도 하지만 자개크기의 한계 때문에 생기는 큰 무늬면의 이음선이 잘 느껴지지 않게 만드는 효과와 함께 균열선들에서 보이는 조형적 감각 효과를 지니는 표현 기술인 것이다.  이는 의도적으로 도자기의 유약면에 빙렬선氷裂線이 생기게 하거나 납방염蠟防染에서 의도적으로 넣는 파라핀 크랙선염의 효과를 조형적 관점에서 사용하는 바와도 같은 것이다. 자개무늬 표현에 끊음질과 할패법이 창안된 것은 한국인의 기질에 대범성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는 세계 도자사에서 유일하게 자유분방한 무늬표현의 분청사기가 조선 초기에 창안되었던 경우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나전칠기 무늬의 표현 재료 사용에서도 우리 선조들은 자개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복채伏彩한 대모전玳瑁鈿과 금속선을 고려시대 나전칠기와 조선시대 후기 나전칠기에 즐겨 사용했을 뿐 아니라, 사어피沙魚皮를 무늬표현 재료로 자개와 함께 사용한 것도 독창적인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은 나전칠기가 우리의 민족공예民族工藝로서의 특성을 충분히 지녔음을 알게 하는 점이며, 무엇보다도 다른 나라에서 성행한 옻칠공예기법인 조칠彫漆·창금金·시회蒔繪칠기 등의 기법이 우리나라에는 발붙이지 못하고 오직 나전칠기로 일관하여 오늘날까지 성행하여 온 점은 ‘나전칠기는 우리의 민족공예’라는 말이 타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글·사진·곽대웅 홍익대 명예교수 사진·문화재청  

블로그광장 더보기
신청하기

  • 한국 전통 공예품 나전칠기 경대

      &n...때도 참 좋습니다         나전칠기 공법으로 만들어져서 굉장히 간결하고 디테일한 부분이 눈에 띄게 되는데요   특히 자개를 이용해 붙힌 문양이 참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정사각형의 학과 꽃 문양을 새겨 넣어 더욱 고급스럽게 만들어져서 진짜 선물용으로 좋을것 같군요         거울만 보는 용도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서랍장 하나가 추가 되어있네요   왠지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것 같습니다         나무를 깍아서 문양 하나하나를 직접 자개를 세공해서 붙히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굉장히 시간이 오래걸리는 작업입니다   시간만 오래걸린다면 큰 오산입니다 경대에 정성과 혼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쉽게만 만들 수 있다면 이런 전통공예품은 진작에 많이 생산 되었을겁니다   그러나 전문가 또는 장인들만이 만들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귀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거울 아래 부분이 마치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자개는 세공을 할 경우 자연 오색빛이 나는데, 이러처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답니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이름새를 더욱 간결히 하기 위해서 원래 나무로 된 경첩을 사용해야 되는데,   나무 경첩은 습한 곳에 오래둘 경우 섞기 때문에 스테인레스로 대처했습니다   이 부분이 조금 아쉽다고 할 수 있는데요   나무 경첩을 이용했다면, 더욱 작품성있는 경대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경대가 만들어지면서 서양에서 유행되는 보석함까지 만들어 졌는데요   보석함도 경대와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어져서 국내외 모든 사람에게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외국인 여성분들께서 보석함에 관심을 많이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디자인, 퀄리티에 매료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전통 공예품이 점점 사라져 가는 요즘 명맥을 이어가는 '공예명가'는   지금처럼 뚝심있게 다양한 공예품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입니다   우리나라 전통과 문화 그리고 유산을 우리나라 사람이 지키지 않는다면 누가 지킬 수 있을까요   많은 분들께서 관심을 가지고 바라봐 주셨으면 합니다   특별함을 선물하고 싶으세요? 그렇다면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공예명가를 방문해 보세요   수천종의 공예품을 직접 혹은 사진으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출처 : http://nse109.tistory.com  

전통자료실 더보기

웹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