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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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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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벼루, 벼룻돌, 연왈피로,석연재(石硯材), 남포벼루,연왈피로(硯曰皮盧), 남포석(藍浦石), 벼루의 종류

    간다는 뜻에서 '硏...된 오목한 곳을 연지(硯池), 또는 연홍(硯泓), 연해(硯海)라 한다. 벼루가 구비하여야 할 첫째 조건으로는 먹이 잘 갈리고 고유의 묵색이 잘 나타나야 한다. 연당의 표면에는 숫돌과 같은 꺼끌꺼끌한 미세한 봉망(鋒芒)이 있어 여기에 물을 붓고 먹을 마찰시킴으로써 먹물이 생긴다. 따라서 봉망의 강도가 알맞아야 한다. 봉망이 약하면 먹이 잘 갈리지 않고 반대로 강하기만 하면 잘 갈리기는 하나 먹빛이 좋지 않다. 그래서 벼루는 실용의 기능을 충족시킬 수 있는 좋은 재질의 것을 첫째 요건으로 하지만 구석기시대부터 중국인의 돌에 대한 강한 애착은 벼룻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다만 먹을 가는 도구라는 차원을 넘어 돌의 빛깔이라든가 무늬의 아름다움을 취하고 나아가 연면(硯面)을 고도의 미적 의장으로 조각 장식하여 문방사우의 하나로서 감상의 대상으로 소중히 여겨왔다. 벼룻돌의 종류 및 산지벼루는 먹이 갈리기만 하면 그 대상이 될 수 있으나 곱게 잘 갈리고 먹색이 좋아야 하며 또한 조각이 쉬워야 하는 이유 때문에, 옛부터 벼룻돌로 쓰인 돌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현재 생산되는 벼루는 크게 남포석 계통과 자석 계통의두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여기 열거한 벼룻돌의 산지와 석명은 벼룻돌의 요건을 갖추고 있거나 지금까지 벼루제작에 사용되어 온 사실이 있는 산지명과 석명을 기존의 보고서와 제보자의 구술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강원도 정선 - 수마노석, 회청석, 자석, 靑石(세종실록지리지)平昌 - 紫石(세종실록지리지)경기도 장단 - 단주석坡州 - 화초석, 오석경상도 高靈 - 자석慶州 - 회청석석포 - 자석, 녹석安東 - 고산석(자석 계통, 강도가 강한편에 속함),馬肝石(임원경제지)언양 - 화초석, 자석영양 - 백돌전라도 강진 - 녹석해남 - 옥석(다양한 색상과 문양을 가지고 있으며 조각이 쉽다.)충청도 계룡산 - 녹석남포 - 오석(또는 청석, 남포석)丹陽 - 자석(강도가 강함)진천 - 오석(자석)평안도 곽산 - 자연석선천 - 반백반자석渭原 - 위원석(일명 위원화초석)함경도 갑산 - 두만강석高原 - 오석茂山 - 두만강석鐘城 - 두만강석, 아란석(임원경제지)황해도 옹진 - 옹진석長淵 - 오창석장산곶 - 연강석(수중해벽석)풍천 - 청석海州 - 녹석 벼룻돌의 구비조건벼루는 숫돌에 연장을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먹을 갈아 쓰는 일차적인 용도 외에 조각품으로서의 조형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벼룻돌과 유사한 성질을 띠고있는 숫돌은 입자가 거칠고 강도가 약한데 비해 벼룻돌은 고운 입자에 강도는 숫돌보다 강한 것이 좋다. 강도나 입자는 장인의 오랜 경험에 의해 육안이나 촉감으로 판단한다.벼룻돌은 첫째, 먹이 곱고 잘 갈려야 한다. 미세한 입자로 형성되며 곱게 갈리기는 하지만 먹을 가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며, 이와는 반대로 무르게 형성되면 쉽게 갈리는 이점은 있으나 먹색이 곱지 못하다.둘째, 조각이 용이해야 한다. 강도는 강할수록 조각에 어려움이 있으므로 생산비가 높아진다. 따라서 고운입자로 형성되어 있으되 조각이 쉬워야 한다. 아울러먹과 혼합될 수 있을 정도로 돌이 미세하게 갈리면 좋다.셋째, 연지의 물이 쉽게 마르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벼루 자체가 일정한수분을 유지해야 한다.넷째, 박리와 결이 없어야 한다. 겹겹이 떨어지거나 균열 또는 결이 있게 되면조각부위를 손상하게 되며, 결은 먹갈림을 어렵게 하여 고운 먹색을 내지 못한다.다섯째, 중량이 무겁고 부드러운 촉감을 유지해야 한다. 한국의 벼루낙랑출토의 연이 가장 오래 된 것이나 이것은 한인(漢人)의 작품이요 삼국시대 내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연 몇 점이 출토되어 그 중 가장 우수한 제품인 원형다족연(圓形多足硯)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한국 석연산지의 분포를 보면 압록강변의 위원석(渭原石), 장산곶돌의 해주연(海州硯), 보령(保寧)의 남포석(藍浦石)이 대종을 이루고 장단(長湍)·울산(蔚山)·단양(丹陽)·안동(安東)·정선(旌善)·언양(彦陽) 등지에서 연재가 산출되고 있다.이 중에서 양적으로는 남포석이, 질적으로는 위원의 화초석(花草石)을 높이 쳐 위원단계(渭原端溪)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이다.  벼루[硯] 고농서국역총서6-증보산림경제Ⅲ - 2004/04□ 내용○ 질이 곱고 매끄러우며 촉촉한 것이 좋다. 우리나라 남포현(藍浦縣)에 침수석[水沈石] 상등품인 ‘오(烏)’라는 돌이 있는데 색이 검다. 금줄을 감고 있는 것을 금사석(金絲石)’이라 하는데 이것은 더 좋다. 돌 표면에 매죽(梅竹)․물고기․새의 무늬가 있는 것을 ‘화초석(花草石)’이라 하는데 질이 좋다. 색깔이 적은 것은 또 ‘마간석(馬肝石)’이라 하는데 질이 낮다. 대개 좋은 벼루는 표면에 손으로 참먹[眞墨]을 문질러 보면 먹과 벼룻돌이 너무 잘 갈리지도않고 먹이 하릴없이 헛 돌지않는것이 좋다. 좋은벼루일반적으로 좋은 벼루벼루를 만드는 돌의 차이에서나옵니다 일반인이 좋은벼루를 구분하기는 매우어렵다.1.전문가 가 사용하지 않을 벼루라면 그냥 국산 남포벼루를 쓰십시요 밤색 포장에 남포 대천벼루라고 있는데 인사동 웬만한 필방에는 다있습니다 품질도 좋고쓰시기에는 가장무난합니다.먹이 잘갈리고 먹을갈을때에 벼루와의 흡착력도 괞찮습니다 벼루뚜껑이 있는 부각벼루를 쓰셔도 되고요 그건 취향에따라 쓰십시요 조금 좋은 벼루를 쓴다면 성주산의 백운상석 김모씨라는 분이만드신벼루를 쓰셔도 되고요2.전문가가 쓰시거나 아니면 수집용으로원하신다면 가장 많이찾는것이 단계연입니다 중국의 광동성의 단계라는 지방에서 나오는 돌로 만든벼루인데 이벼루는 당나라 때부터 내려오는 천하명품이라 부리울만큼 옛부터 먹이 마르지 않고 아침에 내리는 이슬로도 먹을 갈았다고 할만큼 부드럽고 붓을 손상시키지 않을만큼 좋다고 알려진벼루인데 이벼루에는 석안 이라고하여 초록색깔의 동그란 점같은것이 많이 있는것이 좋다고도 합니다만 가격도 수십만원부터 수백만원에 이르느 고가이고 인사동 어느집에가보아도 다 자기것이 좋다고 하나 가짜가 하도많아서 전문가에게 의뢰하지않고는 구입을 권하기가 별로입니다.3.벼루의 좋고 나쁨은 눈으로 침을 발라서 입김을 불어서 확인하기란어렵습니다어떤 벼루에는 초를 칠하여 보기에는 배우좋게 보이는벼루도있고 어떤벼루는 상태가 않좋아도 먹이좋으면 잘갈리는 경우도있기에 구분하가가 힙듭니다만 벼루에 먹을 갈았을때 먹과 벼루가 서로 달라붙는 듯한느낌을 받으면서 부드럽게 갈리는 벼루가 좋습니다아울러 일반적으로 좋은 먹은 만드는 과정에서 정하여집니다 먹의 재료 먹의반죽 등 등.그러나 아쉽게도 국산먹은 그과정이나 품질이 우수한것이 거의없습니다몇몇 괞찮은 먹도있지만 그먹의 질감이라던가 농도 면에서 일본먹에 비해 현저히떨어집니다 시중에 나와있는 먹물중에 묵의정이라는 먹물도 국산같지만 제조과정에서 중요한부분은 일본사람이 직접와서 만들어 준다고합나다 그정은 비밀이고요 먹을 고르실때 국산은 먹에표시되어있는 오성이니 사성이니 이런거 보지마시고 먹의 상태를 보시고 한번 갈아볼수있으면 갈아보십시요 느낌이 옵니다 벼루에 갈리는소리도틀리고요. 자석(紫石)벼루란자석연(紫石硯)이라고도 칭하며 자주색의 벼루를 말합니다. 자석벼루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일본에 널리 분포된 가장 대표적인 색깔의 벼루라고 할 수 있읍니다. 한국에는 검은 색의 벼루로 남포연 혹은 보령연이라고도 칭하는 충남지방의 벼루가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지만 자석벼루만큼 산지가 널리 분포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한국의 자석연은 알려진 유명한 산지만으로도 단양을 비롯하여 안동, 정선, 고령 등 사실 매우 많습니다. 그 가운데 강원도 정선과 경북 안동의 자석벼루가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합니다. 그러나 안동과 정선의 자석벼루는 일제시대 이후 그 맥이 끊어져 더 이상 생산이 되지 않고 있지만 유독 단양의 자석벼루는 아직까지 생산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그 모양과 형태는 일제시대 일본벼루의 영향으로 화려한 조각의 뚜껑을 하고 있어 조선시대 우리 고유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는 실정이라 다소 안타깝습니다일반적으로 벼루라고 하면 우선 검은돌을 떠올리고 시중에서 흔히 대할 수 있는 남포석벼루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아가서 참으로 좋은 벼루를 선정하고 벼루의 깊은 맛을 알기 위해서는 서슴없이 단양의 자석벼루를 손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하리, 남한강 기슭야산 중턱에 자리한 영춘특산 단지에서 유일하게 생산되는 이 벼루는 자체의 석광에서 채석하는 원석 그 자체로 만드는 벼루로서, 붉은색의 색채를 띠는 돌로,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고 입자(돌결)가 고와 먹과 벼루의 일체감을 느낄 수 있는 (벼루에 먹이 달라 붙는듯한 느낌) 최상의 벼루입니다. 또한 세계 최고의 벼루라고 하는 중국의 단계석벼루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것으로 일본에서는 [한국산 단계석]이라고 하여 널리 알려져 있는바, 조상대대로 극히 소중하게 다루어 왔던것은 여러 고증과 높으신 선비님들의 옛 사랑에 두루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도 입증이 된다 하겠습니다. 그동안 이곳에서 만들어 내는 단양자석벼루는 이미 대통령 선물용(기념품)으로 선정하여 서예 애호가들에게 호평을 받은바 있으며, 멀리 일본에서도 값싸고 질좋은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많은 양의 제품이 수출 되고 있습니다. 처음 조부때, 보다 나은 원석을 찾아 전국을 누비다가 단양에서 자석을 발견하여 지금까지 3대를 정착하여 내려오며 가업으로 이어온 벼루작업에, 철저한 장인정신과 자부심으로 일관하여 왔으며 그간 여러 수많은 작품전에서 수상을 거듭하여 왔습니다.  우리 나라의 석연재(石硯材)전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데, 무산·위원·평양·장산곶·정선·평창·장단·단양·계룡산·남포·안동·경주·언양·장수·강진 등이 대표적인 산지로 꼽힌다. 벼룻돌의 형성과 특징벼루는 먹을 갈 수만 있으면 모두가 그 대상이 된다. 따라서 우리 생활주변 어디서나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돌은 모두 벼룻돌로 쓸 수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벼루란 먹이 잘 갈리고 곱게 갈려야 한다는 전제조건 때문에 벼룻돌로 사용되는 돌은 그리 흔하지 않은 편이다. 여기서는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벼룻돌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벼룻돌은 흔히 청석이라고 말하는데, 이를 남포석 또는 남포오석이라고도 한다. 남포석은 미세한 진흙이 오랜 시간을 두고 퇴적된 점판암 계통의 인니암석으로, 입자가 매우 곱고 강도가 강한 편에 속하여 벼룻돌의 일차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다. 남포석은 다른 돌에 비하여 수분의 휘발성이 강하여 태양광선에 자연노출시킬 경우 균열이나 박리현상이 일어난다. 또 자연노출 상태로 약 5년을 방치하면 일반 흙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습기가 완전히 제거되면 강도가 강해진다.오랜 퇴적이 거듭되는 동안 나뭇잎이나 풀잎 등이 화석화되어 문양으로 나타나는 수가 있다. 남포석은 연장을 가는 숫돌과 매우 흡사하나 숫돌보다 강도가강하다. 남포연의 유래남포연은 행정구역상 충청남도 보령군에 속해 있으며, 면의 북쪽으로 대천시,東으로 성주면, 南으로 웅천면, 그리고 西로는 서해바다와 연해 있다. 남포라는지명이 역사상의 기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삼국사기로 본래 백제의 寺浦縣으로景德王이 남포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있다고 되어 있다.1) 조선시대에는公州牧의 西林郡의 領縣으로 되었다가 고려 현종 9년(1018) 嘉林縣에 이속되었다.2) 이와 같이 藍浦는 오랜 지명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곳에서생산되고 있는 벼루를 흔히 남포연이라 부르고 있으며, 남포연이 오늘날 우리나라 벼루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남포연이 구체적인 기록으로 나타난 것은 조선조 말엽 서유구(1764~1845)의『임원경제지』가 아닌가 싶다. 조선 전기의 지리서인『세종실록지리지』나『동국여지승람』등에서 남포연이나 이와 유사한 석제의 생산 등에 관한 기사를 확인할 수 없으며, 남포연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라고 생각된다. 서유구의『임원경제지』와 비슷한시기에 제작되었던 김정호의『대동지지』토산조에도 남포연을 이해할 수 있는 짧막한 언급이 있다. 즉『대동지지』에서 “연석은 성주산의 서쪽에서 나며, 색은 검고 품질은 좋다.”라고 하여 연석생산에 관한 이 설명은 지금도 벼룻돌을 생산하고 있는 성주산의 상황과도 일치되는 바라 하겠다. 남포석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명성을 얻고 대중화 단계로 들어갔음은“藍浦石은 金絲紋이 가장 으뜸이고 銀絲紋이 그 다음이며 花草紋이 그 다음이다. 단단하고 매끄러워 墨에 거스리지 않으며 껄끄러워도 먹에 엉기지 않으면 좋은 것이다, 대개 돌의 다듬음이 단단하면 먹의 색이 맑다. 오직 맑고 윤기가 있고 곱고 반질반질한 것이 먹과 더불어 서로 득이 된다. 지금 거리의 가게,촌의 서당에서 쓰는 것이 모두 남포산 벼루이나 사람들이 심히 귀한 줄을 모른다.-중략- 남포연은 안동부 馬肝石을 제일로 삼는다. 구룡산 水沈(물 속에서 케낸 돌을 의미함)에서 산출되는 것이 극히 아름다우며 역시 줄지 않는다. 남포연은 豊川府에서 나오는 것은 강하고 매끄러우며 紫色은 희귀하다. - 중략 -남포현 聖住山 아래 石坑이 있는데, 그 중 화초석이 金色으로서 스스로 화초의문양을 이루며 온윤하고 먹이 잘 갈린다.”3)라는『임원경제지』의 설명이 그같은 사정을 잘 말해 주고 있다.위의 기사내용은 남포석에 대한 가장 상세하고도 시기적으로 앞선 기록이어서 남포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그 중 특히 거리의 가게, 촌, 서당에서 쓰는 것이 모두 남포산 벼루이나 사람들이 귀한줄을 모른다는 설명을 통해 보면 남포연의 대중화 정도를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다음에 설명되는 석명들은 현재 성주산을 비롯한 인근 주변지역에서 생산되고있는 석재인데, 각기 특징이 있어 달리 불리고 있을 뿐 모두가 남포석의 범주에속하는 것들이다.수침상석 : 지하 깊숙한 곳에서 캐내는 돌로 무겁고 단단하다.무고 : 결(또는 ‘케’라고 함)이 없는 단단한 돌로 보통의 벼룻돌보다 강도가 강하며 벼룻돌로 쓰이기보다는 다듬이돌로 많이 쓰인다. 비석돌로도 사용된다. 그러나 옛날에는 벼룻돌로 사용했으나 너무 단단하여 조각이 쉽지않고 먹갈림이 더뎌 지금은 잘 사용되지 않고 생산량 또한 많지 않다.오석 : 색깔이 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는 주로 비석돌로 지칭되지만 벼룻돌을 오석이라 부르기도 한다.청석 : 검은색을 띠고 있으나 실제로는 회청색에 가까우므로 청석이라 하며, 벼룻돌로 쓰이는 남포석을 지칭한다. 벼루의 종류재질에 따른 종류벼루의 주된 재료는 역시 돌이다. 돌 이외에는 벼루로 만들어 썼던 것은 많지만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을 만큼 흔치는 많다. 예를 들면 휴대용 벼루로 가볍게 만들어진 청동연, 목연, 도자기로 만든 磁器硯 등이 있고, 고대 삼국시대의 벼루 중에는 陶硯, 瓦硯. 塼硯, 그리고 조선시대 기록에는 징니연 등이 있다. 징니연이란 베로 만든 부대에 진흙을 넣고 물 속에서 흔들어 고운 흙만을 추출하여 이를 빚어 만든 벼루를 말한다. 징니연에 관해서는 이덕무의『청장관전서』에 기록으로 남아 있어 조선시대에는 실제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석연을 제외하고여타 재질의 벼루는 먹을 갈아 쓴다는 일차적인 목적은 달성될 수 있을지 몰라도 고운 먹색을 내고 붓의 사용을 원활히 하는 데는 적합치 못하다. 따라서 이들 벼루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자기연은 미관상 화려하지만 먹을 가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며 쉽게 연지가 건조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철을 비롯한 동제연 역시 고운 먹색을 내지는 못한다.이 밖에도 骨硯, 牙硯, 鐵硯, 竹硯, 漆硯, 玉硯, 水晶硯 등이 있다고 하나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다. 문양에 따른 종류문방사우는 전문장인이 아니면 일반인들이 손쉽게 제작해 쓸 수 있는 것은 드물다. 특히 벼루와 같이 돌을 다루는 기술은 더욱 그러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남포연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일반대중화 단계에 들어갔음은 전항에서 간략히살펴본 바 있다. 그러나 법전들을 통해 살필 경우 각기 경공장과 외공장에 소속인원을 나열하면서도 硯匠에 관한 기사는 찾아볼 수가 없다. 문방사우는 제작자의 측면에서 보면 각기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을 뿐 서로간의 연계성은 전혀없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벼루의 사용빈도가 낮은 것은 아닌데도 유독 硯匠만이존재하지 않다는 것은 재고해 볼 여지가 남는다. 비록 조선조 각 아문에는 소속되지 않았지만 벼루를 만드는 장인은 있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벼루는 단순한 필기도구의 범주를 넘어서 장식을 가미한 조형미술이자 일면생활미술로서의 가치도 결코 지나칠 수가 없다. 벼루에 문양을 가미하게 된 것은바로 실용성만이 아닌 조각가나 사용자의 미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문방사우 가운데 가장 오랜 수명을 유지하는 벼루는 그 자체가 실용적인 장식품이었다.벼루가 장식적인 조형미술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양질의 석재라 하더라도 조각이 서투르면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었다.벼루에 나타난 문양은 기법상으로 크게 동물, 식물, 상징적 길상문 등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다음에 설명하고자 하는 문양들은 전통적인 벼루에서 자주 접할수 있는 문양으로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다.日月硯: 연도와 연지가 해와 달을 상징하는 구조로서, 벼루에서 가장 흔히 볼수 있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일월은 문양이라기보다는 형태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연지와 연면을 제외한 외곽은 특정한 소재를 택하지 않고 다양한 문양이 첨가된다. 따라서 일월연은 주변에 새겨지는 소재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려지는수가 많다. 龍硯: 조선 후기에 특히 많이 나타나는 문양으로, 이는 벼루의 뚜껑에 조각되고 있다.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형식으로 여의주 부분이 뚜껑의 손잡이로 쓸 수 있게 홈을 깊이 파고 차차 꼬리 쪽으로 가면서 깊이를얇게 한다. 용문의 조각기법은 대체로 돋을새김이 많으며, 다른 문양에 비해 조각이 쉬운 편에 속한다고 한다. 이는 투각에 비교하여 그렇다는 것이다. 용문양이벼루 몸돌에서는 테두리 부분에 주로 새겨지며 문양은 뚜껑에 비해 약식화된다.龜硯: 거북은 장수길상을 의미하는 상징적 동물로, 벼루에는 몸돌에 거북의 형태를 본따서 만들거나 뚜껑에 구갑문을 얕은 선각으로 표현하는 형식이 대종을이루고 있으며, 때로 연지에 헤엄치는 거북을 새기기도 한다.鳳鶴硯: 봉과 학은 서조로 상징되며, 그 자태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장식문으로 등장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봉과 학이 벼루에 표현되는 것은 여타 문양과 그 위치에서 차이는 없다. 봉과 학은 외모의 순수함과 고결함, 단아한 인상때문에 벼루의 격조를 높여 주고 있다.蓮葉硯: 연의 넓은 잎이 주소재로 등장한다. 벼룻돌 전체를 연엽형으로 하는예는 많지 않고 외곽을 곡선으로 처리하여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대체적으로 부정형을 이루고 있으며, 조각은 음양을 깊이 하지 않고 약간의 볼륨으로 줄기와잎을 구분짓는다.桃硯: 대개 연면이 복숭아 형태를 이루고 있다. 단조로운 조각에 속하지만 신선감을 주고 있다.梅花紋: 매화는 사군자의 하나로 회화에서도 자주 등장되는 소재이다. 벼루에서 매화는 용문양과 함께 요즈음에도 그 맥을 잃지 않고 조각되고 있다. 직접 조각하는 사람의 말에 따르면 용을 새기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는데, 이는 꽃잎의굴곡을 변화 있게 나타내야 하는 표면처리수법과 입체적인 조각 때문이라고 하였다.葡萄硯: 조각수법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포도는 신선감을 주는 소재임에 틀림없다. 포도알과 덩굴, 잎사귀가 조화를 이루어 윗면 여백에 조각된다. 다른 문양과는 달리 전면에 시문되어 화려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포도문 벼루는 약속이나 하듯이 연지와 연도는 일월문, 그리고 주위를 포도문으로 장식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잉어연: 벼루에서 연지는 물이 담기는 곳으로, 여기에 물고기는 자연스런 조화를 이룬다. 연지의 바로 위쪽 여백에 잉어는 하반부는 반쯤 물 속에 감추고 상반신만 드러낸 조각이 많다. 입체감은 부족하지만 장식적인 효과를 내는 데 좋은소재이다. 그러나 다른 문양에 비하여 많은 편은 아니다.완자문연: 완자문은 벼루의 옆면이나 중심문양의 외곽을 감싸는 부수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완자문에도 변형이 많다. 형태상의 종류벼루의 십중팔구는 방형이며 다음으로 원형, 부정형의 순이다. 방형은 첫째,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이점 때문이며, 둘째, 제작이 용이하다는 데에 있다. 넓은연면과 연지를 확보하여 실용성을 높일 수 있는 반면에 주변의 장식문양은 약식화, 형식화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에 반해 원형은 연면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있어 방형과 마찬가지로 실용성이 중시되지만 연지가 상대적으로 축소되기도 한다. 따라서 실제 사용자는 방형을 선호하는 편이다. 부정형은 전체적인 형태가 특정한 사물의 형태를 띠고 있어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원석의외곽부위를 약간의 손질을 가하여 거기에 알맞은 문양을 새김으로써 형식적인틀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움을 맛보게 한다. 부정형은 원형이나 방형에 비해 실용성보다는 장식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부정형으로는 구형, 종형, 엽형 등이대종을 이룬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연왈피로(硯曰皮盧)”라 하여 이미 고려 때부터 벼루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보통 돌로 만들지만 와연(瓦硯)·도연(陶硯)·자연(磁硯)·이연(泥硯)·토제연(土製硯)도 있으며, 보석류나 금석류로도 만든다.이 가운데서도 충청남도 보령의 남포지방에서 나는 남포석(藍浦石)을 가장 으뜸으로 치는데, 먹을 갈 때 매끄러워 조금도 끈적거리지 말아야 하며, 묵지(墨池 : 묵즙을 모으도록 된 오목한 곳으로 硯池라고도 한다.)에 물을 넣어 두어 10일 이상 되어도 마르지 않는 것을 좋은 벼루로 친다.크기는 서당연(書堂硯)처럼 큰 것에서부터 손가락만한 행연(行硯 : 여행용 벼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형태 또한 원형·4각형·6각형·8각형·12각형·타원형에서부터 여러 가지 물건의 모양을 본뜬 구연(龜硯)·연화연·풍자연(風字硯)·태사연(太史硯)·금연(琴硯)·석고연(石鼓硯)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조각문양은 용·학·거북·봉황·포도·매화·난초·국화·대나무·불로초·감·물고기·팔괘(八卦)·십장생(十長生)·소상팔경(瀟湘八景) 등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문자를 돋을새김하거나 오목새김한 것도 있다.현재까지 전해 오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은 중국 한대의 것으로서, 중국 본토와 낙랑무덤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이 중 채협총(彩篋塚)에서 출토된 벼루는 장방형의 판연(板硯)으로 칠이 된 연대(硯臺)에 고정시킨 것이고, 평안남도 평원의 석암리9호분(石巖里九號墳)에서 출토된 벼루의 경우 둥근 목대(木臺)에 붙여 세 발로 받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묵지가 없는 평평한 것인데, 먹을 개기 위한 연구(硏具, 磨石)가 딸려 출토된다. 묵지가 있는 벼루가 출현한 것은 남북조시대부터인데, 이때는 원형·방형의 벼루가 가장 많다. 당나라 이후에는 풍자연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문방구 애완의 풍조가 유행하면서 기형도 다양해졌다.도연은 남북조시대부터 사용되었는데, 원형으로 주변이 낮아지거나 홈이 둘러진 것으로, 원대 아래는 많은 제각(蹄脚)이 받치는 형태로 된다. 당대에는 동작대(銅雀臺)의 옛 기와를 가지고 만든 와연이 유행하며, 도제의 풍자연도 생산되었다.한편, 우리 나라에서는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도제의 원형벼루가 만들어졌으며, 삼국에서 모두 간소한 제각이 달리고 뚜껑이 있는 백족연(百足硯)이 사용되었고, 이와 함께 석제원형벼루도 전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연지(硯池) 외벽과 발에 조각이 된 벼루도 나타났다.그런데 대체로 석연이 일반화된 것은 고려시대 이후라고 생각되는데, 현재 발굴되는 고려시대 무덤에서는 부장품으로 석제벼루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형태는 장방형을 주축으로 하여 풍자연·금연 등 다양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크기·형태와 장식의 종류가 더욱 다양해져 석연뿐 아니라 자연(磁硯 : 자기로 만든 벼루)도 생산되었다. 참고문헌두산백과, 世宗莊憲大王實錄 公州牧 藍浦縣條, 新增東國輿地勝覽 藍浦縣條, 이화여자대학교특별전도록 3-벼루와 연적-(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1982), 한국수공예미술(김종태, 도서출판 예경, 1991), 백제도연에 대하여(강인구, 『백제문화』 5, 197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농서국역총서6-증보산림경제,임원경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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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최고의 벼루 장인 정철조

        오늘날도 그렇지만 벼루 깎는 장인은 좀체 그 이름을 남기는 법이 없다. 그런데 이 벼루로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긴 인물이 있다. 그것도 벼루를 전문으로 만드는 기술자도 아닌, 문과에 급제해서 정언 벼슬까지 지낸 양반 사대부가 말이다. 그의 이름은 정철조다. 당시 안목 있다는 사람으로 그가 깎은 벼루 하나쯤 소장하지 못하면 부끄럽게 여겼을 정도라는 그의 벼루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정철조와 그의 벼루를 소개한다. [b]벼루에 미친 사람[/b] 정철조(鄭喆祚, 1730~1781)는 본관이 해주로 자는 성백誠伯, 호가 석치石癡다. 45세 나던 1774년에 문과에 급제했고 벼슬은 정언正言을 지냈다. 아버지 정운유(鄭運維, 1704~1772) 역시 문과에 급제하고 공조판서까지 지냈던 인물이었다. 정철조는 그의 장남이었다. 정철조는 연암 박지원, 담원 홍대용 등과도 지속적인 교류를 나누었고, 이러한 교유의 과정에서 이용후생학에 눈을 떴다. 그는 기계 제작에 뛰어난 솜씨를 지녀, 인중引重, 승고升高, 마전磨轉, 취수取水 같은 기계들을 직접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는 지도 제작에도 조예가 있었고, 천문지리에도 관심을 가져 해시계를 직접 만들어 시간을 측정하기도 했다. 그림 솜씨도 빼어났다. 한마디로 그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그의 여러 재주 가운데 단연 흥미로운 것은 벼루 제작자로서의 명성이다. 그는 좋은 돌을 보기만 하면 즉석에서 차고 있던 칼을 꺼내 순식간에 벼루를 깎았다. 이규상李奎象, 1727~1799의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서는 그의 벼루 만드는 솜씨를 이렇게 묘사했다. 죽석竹石 산수를 잘 그렸고,벼루를 새기는 데 벽이 있었다. 벼루를 새기는 사람은 으레 칼과 송곳을 갖추고, 새김질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는 단지 차고 다니는 칼만 가지고 벼루를 새기는데, 마치 밀랍을 깎아내는 듯하였다. 돌의 품질을 따지지 않고, 돌만 보면 문득 팠는데, 잠깐 만에 완성하였다. 책상 가득히 쌓아두었다가 달라고 하면 두말없이 주었다. 돌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돌만 보면 팠고, 달라는 대로 주었다고 했다. 그의 호는 석치石癡인데, 돌에 미친 바보라는 뜻이다. 그가 돌, 즉 벼루에 미친 벽이 있었으므로, 호까지 이렇게 붙였다. [b]자연스런 결을 살려 [/b] 전통시대에 벼루는 문인의 필수품이었다. 좋은 벼루에 대한 문인들의 애호는 유난했다. 오죽하면 허균 같은 이는 깨어진 것이라도 좋으니 중국의 단계 벼루 하나만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한 적도 있다. 벼루는 각 지역마다 산지가 있고, 산지에서 직업적 장인들에 의해 제작되는 것이 일반이었다. 그런데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벼슬까지 오른 관리가 틈만 나면 벼루를 깎는 취미를 가졌다. 그것도 품격과 안목에서 장인들의 기예를 훨씬 능가하는 작품이었으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당연했다. [b]안동의 마간석은 검붉은 흙빛이요 남포의 화초석은 벌레가 좀먹은 듯. 삼한의 둔한 장인 멍청하기 짝이 없어 온 나라가 온통 모두 풍자식(風字式)을 쓴다네. 근래 들어 명사에 석치란 이가 있어 가을꽃과 귀뚜라미 즐겨 새기었다네. 홍주 땅의 아전이 그 방법을 배워서 원래 생긴 돌 모양에 대략 꾸밈 더한다네.[/b] 유득공이 〈기하실장단연가幾何室藏端硯歌〉란 작품에서 석치의 벼루에 대해 쓴 대목이다. 모두들 바람 풍자 모양의 풍자식風字式 벼루만을 쓸 때 그는 안동 마간석과 남포의 화초석에 가을 국화와 귀뚜라미 같은 벌레를 아로 새겨 높은 품격을 뽐냈다는 내용이다. 홍주의 소리小吏가 그의 방법을 배워, 원래의 돌 모양을 살려 조각을 새기는 방식으로 역시 이름이 났다. 이렇게 보면, 정석치의 벼루는 특징이 원래 돌의 생김새와 성질을 최대한 그대로 살려서 자연스럽게 조각을 얹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코 인위적인 조작이나 인공의 가공을 선호하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심노숭沈魯崇은 또 〈정석치연소지鄭石癡硯小識〉란 글에서 “석치 정씨의 벼루는 근세에 무거운 이름이 있었다. 예단에서 노니는 사람은 이를 지니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나도 젊어서는 이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사하다가 잃어버렸으므로 몹시 안타까워했다.”고 적었다. 당대 예원을 주름잡았던 강세황의 손자 강이문姜彛文의 집에도 예전 정철조가 글씨 부탁을 하고 답례로 가져온 벼루가 있었다. 강세황은 그의 벼루를 두고, 지금까지 본 천 여개의 벼루 가운데 단연 으뜸이라고 높이 평가했을 정도였다. 심노숭은 이 말을 듣고 직접 안산까지 찾아가서 정철조의 벼루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데, 풍자형의 벼루로되, 본래 생김새에 따라 약간의 요철을 그대로 살려 두었지만, 갈고 깎은 정밀함만큼은 보통 사람이 절대로 미칠 수 없는 대단한 작품이었다고 적었다. [b]그림으로 남은 벼루[/b] 정철조가 깎은 수많은 벼루 중 실물로 남은 것이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테지만, 아직 확인된 것은 없다. 다만 박영철(朴榮喆,1879~1939)이 소장했던 것을 이한복(李漢福, 1897~1940)이 그린 정철조의 벼루 그림은 남아있다. 이 벼루는 원래 정철조가 그의 사돈이었던 이용휴(李用休, 1708~1782)에게 선물한 것이다. 벼루 앞면에는 이용휴가 직접 새긴 “손은 글씨를 잊고, 눈은 그림을 잊는다. 돌에서 무얼 취할까? 치癡와 벽癖이 으뜸이다.[手忘書, 眼忘畵. 奚取石, 癡癖最.]”라는 내용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정철조가 만든 벼루이니, 자자손손 영원히 보물로 사용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질박하고 꾸밈없는 전형적인 조선 벼루의 모양새를 지녔다. 정철조! 그는 다방면에 걸쳐 다재다능했던 재주꾼이었다. 그가 52세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뜨자 연암 박지원은 해학이 넘치면서도 깊은 정을 담은 제문을 지어, 그를 잃은 슬픔을 달랬다. 근세 위당 정인보 선생도 〈정석치가鄭石癡歌〉란 제목의 한시를 지어서 뛰어난 예술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작품으로 형상화한 바 있다. 하지만 그의 넓고 깊은 학문 세계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이 밝혀진 것이 없다. 뛰어난 벼루 예술가로서의 정철조의 면모를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용후생학자로서의 그의 참된 면모를 밝혀내는 일도 시급하다. 그는 18세기에 유행했던 새로운 방식의 지식 경영에 선두에 섰던 인물이다. 호기심과 열정과 탐구욕이 그를 나타내는 어휘들이다.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글_ 정민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  사진제공_ 안대회 <조선의 프로페셔널> 저자, 권도홍 <문방청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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