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래
가물치
가지
간재미
갈근
갈치
감자
감태
감초
감홍로주
강활
강황
게장
고구마
고등어
고본
고사리
고슴도치
고추
고추장
곤쟁이
골풀
곰취
곱돌
과루인
곶감
과메기
곽향
광어
구기자
구리
국수
국화차
굴비
금불초
기장
김치
꼬막
꼴뚜기
꽃게
꿀풀
나물
나전칠기
낙죽장도
낙지
냉이
노루
녹두
녹용
녹차
농어
뇌록
누치
느룹나무
느타리버섯
다시마
다람쥐
다래
다슬기
닥나무
단감
단목
달래
담비
담쟁이
당귀
대게
대구
대나무
대발
대추
더덕
더덕주
도라지
도루묵
도마뱀
도미
도자기
돈육
돈차
돌미역
돔배기
동래파전
동백기름
동충하초
돚자리
돼지
된장
두꺼비
두릅
두충
딸기
들기름
마늘
마뿌리
만화석
막걸리
망둥어
매생이
매실
맥문동
맨드라미
머루
머루주
메밀차
멸치
명란젓
명설차
명태
모과
모란
모래무지
모시
모자
목기
목화
무명
무우
문배주
문어
미나리
미역
민속주
민어
밀랍
박하
방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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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잎차
백렴
백미
백반
백부자
백조어
백하수오
백합
밴댕이
뱅어
벼루
병어
법주
보골지
보리
복령
복분자
복숭아
복어
부들
부자
부채
부추
붉나무
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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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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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나물
산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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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살구
삼릉
삼배
삼치
상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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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
새우젓
생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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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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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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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어
송이버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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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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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숙주
순채
숭어
승검초
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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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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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콘
야콘잎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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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
어란
어리굴젓
어육장
엄나무
연밥
연어
연엽주
열목어
염전
엽삭젓
오가피
오미자
오곡
오골계
오정주
오죽
오징어
옥돔
옥로주
옹기
옻칠
왕골
용문석
우무
우황
울금
웅어
위어
유기
유자
유자차
유황
육포
은어
은행
이강주
이스라지
익모초
인삼
인삼주
잉어
자단향
자두
자라
자라돔
자연동
자하젓
작설차
작약
장군풀
장아찌
전모
전복
전어
전어젓
전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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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어리
조개
조기
조홍시
좁쌀
종어
종이
주꾸미
죽렴장
죽로차
죽순
죽순채
죽염멸치
죽엽청주
죽피
죽합
준치
중국차
지라돔
지치
질경이
찐빵
참가사리
참게
참기름
참죽나물
참외
찹쌀
창출
천궁
천남성
천문동
청각
청국장
청란석
청목향
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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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하주
추성주
취나물
치자
칠선주
콩잎
토마토
토끼
토사자
토주
토파즈
토하젓
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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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포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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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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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해[靑蟹], 톱날꽃게는 낙동강 하구 특산품종으로 지역 어업인들이 선호하는 품종이다

    톱날꽃게는 낙동강 ...혀졌다. 톱날꽃게는 낙동강 하구 특산품종으로 지역 어업인들이 선호하는 품종이다. 2006년도 톱날꽃게의 어획량은 약 6개월간 153일의 어획 일수를 통해 5,884마리가 어획 및 판매되었다.국외에서는 톱날꽃게에 관한 연구가 많이 수행되었으나 국내에서는 낙동강에 서식하는 톱날꽃게 S.paramarmosain에 대한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또한 S. paramarmosain의 서식분포, 성숙, 산란시기등 생활사에 관해서도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따라서 본 연구는 S. paramarmosain의 탈피와 교미,암컷의 성숙을 파악하고 유생사육을 통해 유생발생과정과 탈피기간 및 성장을 조사하여 낙동강에 서식하는 톱날꽃게, S. paramarmosain의 생태에 관한 기초자료로 활용하고자 한다. ◎ 실험 재료 및 방법1. 톱날꽃게 성숙갑폭 8~10㎝의 톱날꽃게 암.수 각 20마리를 30 ㎝두께로 모래가 깔려있는 FRP 사각수조(2×3×1m, 수량 5톤)에 수용한 후 탈피과정 관찰과 탈피에 걸리는 소요시간을 육안으로 확인하여 측정하였고 탈피 전, 후의 갑폭을 측정하였다. 교미습성 확인은 톱날꽃게 암.수 각 20마리(암컷 : 갑폭6~10㎝, 수컷 : 갑폭 8~13㎝)를 모래가 깔려있는 FRP 사각수조(2×3×1m, 수량 5톤)에 수용한 후육안으로 교미행동을 관찰하고 교미한 개체의 갑폭을 측정하였다. 사육환경은 수온 23~25℃, 염분 30~32, 환수율 5회전/일이였고, 먹이는 냉동굴을 해동한 후 전중의 10%를 하루 1회 공급하였다. 교미한 암컷 중 부속지의 탈락이 없는 8마리(안병절단 4마리, 미절단 4마리)는 같은 수조에서동일한 방법으로 사육(수온 24~25℃)하여 산란일까지의 소요기간을 측정하고, 산란 후 복지에 포란한 수정란이 성숙하여 부화까지 소요되는 기간을 측정하였다.2. 톱날꽃게 유생발생부화에 임박한 톱날꽃게, S. paramarmosain 어미 1마리를 여과해수가 채워진 사각 콘크리트 수조(6×2×1m, 수량 10톤, 수온 22℃, 염분 29.6)에 수용하여 수정란이 모두 zoea Ⅰ기 유생으로 부화한 것을 확인 후 어미를 수조에서 제거하였다. 수온은 유생 부화 후부터 가온하여 27℃를 유지하였다. 부화한 유생은 수온 26~27℃, 염분 29~30 psu, 조도 500 lux, 자연광주기에서 사육하였다. 환수량은 zoea Ⅱ기까지는 지수식으로 사육하였고, zoea Ⅲ기부터는 매일 30%씩 환수하였다. 유생발생과정은 매일 오전 수조 내에서 유생 50개체를 무작위로 추출하여 zoea에서 crab Ⅰ기까지는 실29 체현미경(SZX16/M2500, OLYMPUS)하에서, crab Ⅱ기에서 Ⅳ기까지는 육안 및 디지털카메라로 관찰 및 촬영하였다. 탈피기간은 탈피와 탈피사이의 간격을 일 단위로 측정하였고, 유생 탈피에 따른 성장은 zoea 기는 갑장, 배극, 액극, 배극에서 액극까지의 길이를(Hartnoll and Mohamedeen,1987) megalopa와 crab Ⅰ~ Ⅳ기는 갑장과 갑폭을 측정하였다. ◎ 결과 및 고찰1. 톱날꽃게 성숙톱날꽃게 탈피는 뒷면 갑각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갈라지면서 시작되어 새로운 몸체가 이전의갑각을 나오게 되면 탈피를 마치게 된다. 탈피에 소요되는 기간은 1~2일, 탈피 후 연갑상태가4~5일간 지속된 후 완전한 갑각으로 변태하였다. 8~9월 채포된 톱날꽃게 중 수컷은 탈피 후 크기의 증가 외에 형태적인 변화가 없었으나 암컷은 탈피 후 배갑의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탈피 전에는 배갑의 폭이 좁고 단단한 갑각상태였으나 탈피 후에는 배갑의 폭이 넓은 연갑상태를유지하였다. 이는 산란한 알을 복지에 부착하기 위해 탈피 후 배갑의 변화가 발생한 것으로 판단되며 이 시기에 탈피한 암컷은 대부분 탈피 후 배갑의 변화가 발생하였다.톱날꽃게는 교미를 시작하게 되면 먼저 수컷이 제 1보각으로 암컷을 감싸 안았다, 암컷이 탈피를시작하면 다리를 이용하여 탈피를 도운 후, 탈피를 마친 암컷에 다시 접촉하였다. 수컷은 다리를 이용하여 암컷의 배면이 위로 오도록 뒤집어 올라탄 후, 암컷의 배갑을 열어 생식기를 암컷의 생식공에 삽입하여 교미를 시작하였다. 교미에 소요되는 시간은 18~24시간이였고 수조에 수용한 20쌍의 톱날꽃게 중 18쌍이 교미를 하였다. 교미한 톱날꽃게의 갑폭은 암컷 9 ㎝, 수컷 11 ㎝였고,최소갑폭은 수컷 7.2 ㎝, 암컷 8.2 ㎝이였다. 톱날꽃게의 교미 후 산란까지의 소요기간은 수온24~25℃에서 87.5일(안병절단), 228일(안병미절단), 수정란은 산란 후 부화까지 성숙하는데 11~13일이 소요되었다(수온 26~27℃). 이는 Chaoshu (2007)가 보고한 S. paramarmosain의 수정란이 산란에서 부화까지 12일이 소요된다는 결과와 유사하였다.2. 톱날꽃게 유생발생S. paramarmosain 유생은 zoea 기에서 5번의 탈피를 한 후 megalopa로 변태하였고 megalopa에서crab Ⅰ기로 탈피하였다. 이는 같은 톱날꽃게 S. serrata의 유생탈피과정과 동일하였다(Yi et al.,2009). 탈피에 걸리는 소요기간은 zoea Ⅰ기에서 Ⅱ기 4일, Ⅱ기에서 Ⅲ기 3일, Ⅲ기에서 Ⅳ기 3일, Ⅳ기에서 Ⅴ기 3일, Ⅴ기에서 megalopa로 탈피하는데 4일이 소요되었다. megalopa 유생은 8일후 crab Ⅰ기로 탈피하였다. crab Ⅰ기는 3~4일 간격으로 탈피하여 crab Ⅱ~Ⅳ기까지 탈피하였다. S. serrata 유생의 탈피 간격은 이보다 짧게 나타났는데(Yi et al., 2009) 이는 사육수온이 본 연구에 비해 높았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톱날꽃게 유생은 zoea Ⅰ기 갑장 523.5㎛, Ⅱ기 642.9㎛, Ⅲ기 813.5㎛, Ⅳ기 1103.9㎛, Ⅴ기1498.8㎛로 성장하였다. megalopa 갑장 : 갑폭은 2.9 : 1.5 ㎜, crab Ⅰ기 3.0 : 3.2 ㎜, Ⅱ기 3.9 :4.9 ㎜, Ⅲ기 5.7 : 7.4 ㎜, Ⅳ기 7.6 : 10.6 ㎜로 성장하였다. 이는 Yi et al. (2009)이 보고한 S.serrata 유생의 성장과 유사하였다. ◎ 참고문헌Chaoshu Zeng. 2007. Induced out-of-season spawning of the mud crab, Scylla paramarmosain(Estampador) and effects of temperature on embryo development. Aqua Res 38, 1478-1485.Hartnoll RG and Mohamedeen H. 1987. Laboratory growth of the larvae of six British crabs. JExp Mar Biol Ecol 107, 155-170.Keenan CP, Davie JF and Mann DL. 1998. A revision of the genus scylla de haan, 1833 (Crustacea:Decapoda: Brachyura: Portunidae). The Raf Bull of Zool 46, 217-245.Yi SK, Lee SK and Lee, JM. 2009. Preliminary study of seed production of the micronesian mudcrab Scylla serrata(crustacea : portunidae) in Korea. Oce and Pol Res 31(3), 257-264. 약재명:  청해(靑蟹) 학명:  Scylla serrata Forskal    라틴명:  Scyllae Caro 일반명:  톱날꽃게 과명:  꽃게과(Portunidae) 약용부위:  전체 효능:  이수소종(利水消腫), 자보강장(滋補强壯), 활혈화어(活血化瘀) 운곡본초학(耘谷本草學)주치병증:  유즙부족(乳汁不足), 수종(水腫), 산후어혈복통(産後瘀血腹痛) 운곡본초학(耘谷本草學)수치법:  4계절 언제나 채취하여 생용하거나 소금에 절여 사용한다. 운곡본초학(耘谷本草學)성미:  미량(微凉), 함(鹹) 작용부위:  간(肝), 신(腎) 약재키워드: 청해(靑蟹), 톱날꽃게 (한국전통지식포탈)

  • 닥종이(한지),닥나무, 꾸지나무, 산닥나무(안피, 雁皮), 삼지닥나무

     한지(韓紙, 문화어:조선종이) 또는 닥종이는 한국 고대의 종이로 중국의 제지술을 도입하여 이를 더욱 발전시켰고, 그 품질 또한 매우 우수하였다. 삼지닥나무•안피나무•닥나무•뽕나무등의 수피(樹皮)의 섬유를 뜬 것이다. 용도에 따라 창호지, 복사지, 화선지, 태지로도 분류할 수 있다. 한지는 부채와 연, 바구니, 종이 상자 등을 만들기도 한다. 또한 한지는 외국의 양지보다 훨씬 오래 간다. 외국의 양지는 200년이지만 우리나라의 한지는 그의 1000년이나 더 긴 1200년이나 지속된다. 또한 우리가 쓰는 A4용지보다 질기며,글쓰기와 그림그리기가 매우 잘된다고 한다. 특히, 한지는 옻칠을 할 경우 2100년 까지 간다. 오늘날에도 한지를 많이 만들고 있다. 한지의 멋스러움과 좋은 점을 알고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에도 한지에 물을 들여 여러 색깔의 한지를 만들기도 한다.   진상품관련근거 닥나무. 닥종이[楮]는 경상도(남해현, 밀양도호부, 醴泉郡, 의령현, 진주목, 청도군, 초계군, 풍기군, 합천군) 전라도(곡성현, 광양현, 구례현, 낙안군, 남원도호부, 담양도호부, 동복현, 무주현, 보성군, 순창군, 옥과현, 용담현, 임실현, 진안현, 함평현, 해남현) 평안도(강동현, 박천군, 삼등현, 상원군, 성천도호부, 안주목, 증산현)에서 대전, 왕대비전, 혜경궁, 중궁전, 세자궁에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여지도서, 춘관통고, 공선정례에 기록되어있다.   한지의 원리 한지의 주원료로는 닥나무(楮 Broussnetia Kazinok Sieb)의 인피섬유가 사용되어왔다. 닥나무는 뽕나무과에 속하며 일반적으로 부르는 명칭은 닥나무와 꾸지나무이다. 이중 닥나무는 우리나라 고유의 품종이지만 꾸지나무(構 Broussnetia Papyrifera Vent)는 일본으로 부터 들여온 것이다. 그러나 닥나무와 꾸지나무는 오래전부터 구분없이 식재해왔기 때문에 잡다한 유전자를 가진 잡종으로 변해 식별이 어렵다. 꾸지나무는 머구쟁이, 부닥, 개닥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지의 주원료 : 닥나무, 꾸지나무, 산닥나무(안피, 雁皮), 삼지닥나무 등 -한지의 부원료 : 닥풀(황촉규, 黃蜀葵) 이것은 초지시 초지를 용이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요즘은 PAM 또는 PEO같은 화학점제를 사용한다.   한지의 변천사 1) 한지의 기원 고대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종이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였는가는 아직 정확히 확인된 바 없지만 우리나라 고대 사회에서 종이가 만들어져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제지술을 도입하여 제지를 더욱 발전 시켰고, 그 품질 또한 매우 우수하였다. 현존하는 최고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니경의 종이가 그 증거라 하겠다. 우리나라 종이의 기원 및 전래는 몇가지 설이( 2세기- 7세기 ) 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2세기 설은 현재까지 한지의 주원료인 닥은“저(楮)"가 중국에서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 사이에 “tag", 혹은 “tiag"라는 음으로 읽혔다고 한다. 그러므로 닥은“저(楮)"의 음이“닥"으로 읽혀지고 있던 시기에 종이원료로서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것이다. 이후“닥"이라는 음은 화석화되어 훈(訓)이 되었고, 음(音)“저"는 6세기 이후 중국의 음이 새롭게 들어온 결과일 것이다. 이같은 사실로 미루어 본다면 2세기 경에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종이나“저(楮)"를 사용한 제지법이 그 명칭과 함께 전래되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3세기 경 후한말 낙랑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종이종이 만드는 법이 들어 왔다는 설이 있다.   첫째: 평남 대동군 남정리 채협총에 근거한다. 서기 1931년 조선 고적연구회 사업으로서 발굴된 후한 말엽의 것으로 추정되는 낙랑시대 고분 채협총에서 권자본(卷子本)의 질통(帙筒)으로 보이는 채문칠권통(彩文漆卷筒)과 묵분(墨粉)이 붙어 있는 벼룻집, 오수전, 화천, 채문칠권통, 동경, 채화칠협 등이 발견됨으로서 당시에 종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고분의 밀폐된 칠관 속에서 발견된 종이로 보이는 섬유의 꼴이 닥종이가 물에 젖어 덩어리진 것과 같았다고 하여 한대의 종이와 이것이 비슷했을 것이라는 증거로 삼는다. 그러나 이것이 종이인지는 확실치 않다.   둘째: 백제는 서기 285년 일본에 천자문을 전해주었는데, 이것은 채륜이 종이를 만든지 180년 뒤로 이미 종이를 만들었으리라 추측된다.   셋째: 3세기말부터 4세기말까지 중국 대륙에서 난리를 피해 우리나라로 온 이주민들이 많아 이들 가운데 종이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넷째: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대로 중국에서는 종이가 이미 다른 서사재료를 대치했던 284년에 백제의 아직기(阿直岐)가 일본에 전했다고 하는 [천자문(千字文)]과 [논어(論語)] 등이 종이 서적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왕인이 천자문을 전한 것이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채륜의 제지술 발명보다180년이 경과한 후라고 본다면 서기 200년대 후반에는 제지술이 우리나라에 보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사실을 종합해 보면 2세기에서 늦어도 4세기까지는 우리나라에 종이와 그 제조술이 전래되었을 것이다. 4세기 말이라는 견해는 동진의 마라난타가 384년 백제에 불교를 전파하였는데 이때 많은 책과 제지술도 함께 전해졌을 것이란 생각에서 비롯된다. 한반도의 제지술은 불교의 전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불교 전래시기를 보면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 진(秦)의 순도와 아도가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왔다. 백제는 고구려보다 13년 후인 서기 침류왕 원년(384)에 인도 승 마라난타가 진(晋)나라에서 들어와 불교를 펴기 시작하여 계율종, 삼륜종, 성실종의 3종파가 이루어졌다고 하니 이때는 이미 종이가 불경으로서는 일반화되었다고 보인다. 신라는 눌지왕(서기 417~591)연대에 전래된 것으로 보며 법흥왕 14년 (서기 527)에 공인되었는데 북방 고구려계와 양•진의 남방계가 그 유입 경로라고 한다. 따라서 최소한 이 무렵에는 제각기 종이에 대한 수요 자극과 자체 생산의 열망이 고조되고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6세기말~7세기 설은 다음의 세 가지에 근거한다. 첫째: 6세기에 신라에서 많은 유학생과 승려가 당으로 유학을 가는 등 교류가 많아 먹, 붓, 종이 만드는 법이 전해졌을 것이다.   둘째: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다른 유물과 함께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두루마리는 석가탑을 창건할 751년에 넣은 것으로 사려되므로 이때 종이 만드는 기술이 있었을 것이다.   셋째: 610년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에 채색, 종이, 먹, 연자방아 등 만드는 방법을 전해주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이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맷돌 등을 이용하여 섬유를 잘게 갈아 종이를 만들었고, 담징이 함께 전했다고 하는 맷돌은 종이와 관련 용구로 추측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제지에도 맷돌을 사용하였을 것이고, 이로 우리나라의 제지법이 중국의 종이 기술과 동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 기록은 610년 전후가 우리나라 한지(韓紙)와 중국의 화지(華紙)가 구별되는 시기라는 점도 시사한다.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8세기 이후의 종이는 중국처럼 섬유를 잘게 갈아서 만든 종이가 아니고 두드려서 종이를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평양에 소장되어 있는 우리나라 종이로서 가장 오래된 고구려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 섬유를 자르지 않고 두드려서 고해(叩解)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보다 후대의 종이 [법화경]의 품질이 매우 우수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7세기 이전에 이미 상당한 기술의 축적이 이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세기 초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제지가 이루어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기술은 상당한 경지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제지술은 그 훨씬 이전 중국의 것을 모방하던 시기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2) 삼국시대 삼국시대는 한지의 태동기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이 시기 이전에 종이와 그 제조술이 전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둘어온 종이와 그 제조법은 상당기간 동안 중국의 그것을 모방하였으나 이때부터는 우리의 한지를 이룬다. 삼국시대의 고분 구조상의 결격으로 인해 식물질의 보존이 나빴기 때문에 제지기술에 대해 알 수 있는 문헌자료나 고지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우리나라에 제지술과 종이가 2세기경부터 7세기 사이에 전해진 것으로 생각할 때 북방과 남방은 서로 다른 경로에 의하여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함경도 지방 이북은 추워서 닥을 재배하기 마땅치 않지만 마포(麻布)는 비교적 용이하게 얻을 수 있고, 남쪽의 경우에는 대부분이 닥 재배 적지로서 원료 조달에 문제가 없으며 품질 또한 좋기 때문에 고구려는 낙랑으로부터 주로 마(麻)를 사용하는 방법을, 백제는 닥(楮)을 사용하는 제법을 중국의 남부지방으로부터 전해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에서도 교주(交州) 등 남부 지방에서는 닥나무를 이용하여 종이를 만들고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나 백제 신라 모두 제지의 중심지는 수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의 수요 계층도 수도와 인근의 귀족층 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나 백제의 종이와 그 제지법에 관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으나 중국의 문헌에서 신라 수도 경주를 의미하는 계림의 종이의 우수성에 대하여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 제지법을 전한 사람은 고구려의 승 담징으로 때는 서기 610년 신라 진평왕 32년, 고구려 영양왕 21년, 일본 추고천황 18년 이다. 이것으로 7세기 경을 우리나라에서 제지술이 일반화된 시대라고 해석할 수 있다.   3) 통일신라시대 제지 중심지는 경주 지방으로서 여기서 생산하는 종이가 관용지의 수요를 충당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추지가 국내외에 유명지종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인 국보 196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陀羅尼經)의 용지는 서기751년 이전의 닥종이임이 고증되어 있으며 지질과 인쇄술로 일본을 압도하고 있다. 755년 사성(寫成)된 백지묵서화엄경(白紙墨書華嚴經)은 8세기 중반의 것으로 고해나 정선이 상당히 잘 되어 있고 표백 상태도 매우 좋아 대단히 발전된 기술을 지닌 기술자가 정성들여 만든 종이임을 알 수 있다. 이들 종이는 긴 섬유를 두들이는 고해를 하여 만든 한지이며 중국의 것처럼 섬유를 잘게 갈아서 만든 종이는 아니다. 경주의 고분에서 출토된 관의 옷칠 내장용 종이의 정교함으로도 당시의 종이를 짐작할 수 있다.     4) 고려시대 고려시대는 우리종이의 발전기였다. 삼국시대 각 국의 우수한 문화적 역량은 한반도 최초의 통일왕조인 고려가 세워짐으로써 보다 발전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본격적으로 원료, 생산자, 생산지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였다. 불교가 성행한 당시 사회, 문화적 배경으로 인하여 사경이 많았고 여러 겹을 붙인 종이가 많았다. 따라서 두껍고 질기며 광택있는 종이를 선호하였고 이에 적합한 닥나무를 수급하기 위하여 국가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지리적 조건이 좋은 지방에 지소를 설치했고 이곳을 중심으로 갖가지 원료를 사용한 특색있는 종이가 만들어졌다. 종이에 다듬이질을 했고 노란색이나 감색으로 염색을 한 가공지가 많았다. 고려지는 견인하고 광택이 나고 희었다. 11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확대된 불경 조판사업으로 종이 생산기술은 크게 발달하였으며, 국가에서도 이들 종이 생산 기술자들을 지장(紙匠)이라는 명칭을 주었고, 이들을 모아 집단으로 구성케하여 이들의 기술을 한층 더 높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5) 조선시대 조선조 전기는 우리나라 제지술의 완성기이다. 통제기관의 설치, 원료와 기술의 다양화, 용도의 대중화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이다. 문물제도 개혁과 문화적 관심으로 태종 때 국영 조지소를 설치하여 관영화하였고, 닥으로 만든 돈인 저화제도의 정착에 고심하는 등 제지공업의 중흥에 진력하기 시작했다. 세종때 조지소를 조지서로 개칭하여 역대 왕은 이 조지서를 통하여 당시 급격한 수요증대에 따른 원료의 조달, 종이의 규격화, 그리고 품질 개량을 연구•도모하였다. 수공업 중 제지생산은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경•외장 중 지장수의 비율이 높았던 것으로 제지업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부터 제지된 것으로 보이는 태지가 본격적으로 초조되었고, 미려한 종이를 만드는 노력이 관•민 모두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종이는 그 용도가 많아 우리나라의 전국에 걸쳐 생산되었다. 후기는 우리나라 제지술의 쇠퇴기라 할 수 있다. 초기의 종이 품질은 고려조의 성가를 이어받아 세종시대까지는 손색이 없었고 부분적으로는 그 이후까지도 품질에 대한 신뢰도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세종조 이후의 종이 생산의 관영화와 적극적인 증산책은 초기에는 발전하는 듯 하였으나 폭발하는 수요, 원•명•청대로 이어지는 혹독한 조공지에 대한 압력, 여러차례 전란으로 점차 자발적인 창조성이 위축되고 획일화된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닥원료의 부족으로 짚•보리•갈대 등의 부원료 혼합으로 품질은 저하되었다. 제지술의 전통은 임진란을 기점으로 서서히 하향의 길을 걷게 되었다. 대소의 연이은 환난은 국가 재정의 파탄을 가져오고, 바닥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하여 지장에 대한 보호 육성없이 혹사시켜 훌륭한 제지술의 전통은 기술적 퇴보를 자초했다. 말기에 이르면 태지 정도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가공지는 거의 없이 중국과 일본의 종이가 수입되어 많이 유통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 및 참고문헌 국가기록유산, 여지도서, 춘관통고, 공선정례    

  • 전주한지, 창호지, 장판지, 종이, 파피루스, 종려나무 잎, 운룡지, 장지, 화선지, 피지, 순지

    전주한지 전라북도...요뿐만 아니라 일본·대만 등으로 수출되기도 한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종이’하면 전주한지를 이를 만큼, 전주한지의 전통과 가치는 매우 크다. 종이는 화약, 나침반과 함께 중국의 3대 발명품이라고 불린다. 우리나라는 중국 다음으로 일찍부터 종이를 사용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우리 조상들은 종이를 어떻게 사용했을까?     종이의 발명 종이는 글과 그림을 기록하기 위한 기록매체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 사람들은 다양한 기록매체를 사용했다. 수메르인들은 점토판 위에 문자를 새겼고, 이집트인들은 이집트 5왕조(BC 2494∼2345)시대부터 파피루스를 사용했으며, 인도인들은 종려나무 잎에 글씨를 썼고, 유럽인들은 양가죽에 문자를 기록하다가 기원전 190년 페르가몬의 왕 에우메네스 2세에 의해 양피지가 발명되었다.   종이를 만들기 이전, 중국인들은 갑골, 청동기, 목간, 죽간, 실크 등에 글자를 기록했다. [사기]의 ‘골계열전’에 의하면, 동방삭(東方朔)이 한나라 무제(武帝)에게 상서를 올렸는데, 그 양이 무려 3,000편의 죽간이어서 두 사람이 들고서야 겨우 궁전으로 옮길 수 있었다고 한다. 죽간이나 목간은 이처럼 무겁고 부피가 커서 사용에 불편함이 많았다.   처음에는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낡은 마(麻) 섬유를 이용해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현재 가장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종이 유물은 중국 감숙성 천수시 방마탄 한나라 고분에서 발견된 방마탄지(放馬灘紙)로, 기원전 180〜124년대의 것이다. 이 밖에도 파교지, 마권만지, 옥문지 등 여러 종이들이 발견된 바 있다. 이를 바탕으로 서기 105년 후한(後漢)의 채륜(蔡倫)이 기존의 종이를 개량해 나무껍질, 마, 해진 천, 그물 등을 활용해 물에 불리고, 돌절구에 넣어 찧고, 불을 피워 삶고 다시 물을 빼서 말린 ‘채후지’라는 종이를 만들어냈다. 이로써 종이를 만드는 제지술(製紙(術)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고구려, 종이를 사용하다  고구려 집안(통구)시의 통구사신총 벽화의 일부분으로, 종이에 글을 쓰는 신선의 모습이다.    중국에서 발명된 제지술은 대략 3세기 중엽에 우리나라와 베트남에 가장 먼저 전해졌다. 고구려와 백제가 먼저 사용하고, 신라는 다소 늦었다. 고구려에서 사용된 종이 가운데 유물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것은 4〜5세기경 유물로 추정되는 것으로, 평양 모란봉 동쪽 청암동토성에서 불꽃뚫음무늬 금동관과 함께 출토된 마지(麻紙)와, 평양 대성산성 돌함 안에서 발견된 불경(佛經)이 적혀진 종이다. 이 종이들은 고르고 치밀하게 엉키어져 있는 삼섬유로 만들어졌다. 고분벽화를 통해 보면, 357년에 만들어진 안악3호분 서쪽 측실 벽화에서도 종이를 볼 수 있다. 무덤 주인공에게 보고하는 신하가 들고 있는 문서가 목간보다는 종이로 보인다. 6세기에 만들어진 통구사신총에는 책상에 종이를 놓고 먹을 묻혀 붓으로 글을 쓰려고 하는 신선이 그려져있다.   고구려에서 종이가 사용된 까닭은 문서행정의 필요성과 서적, 특히 불교 경전의 수요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7대 소수림왕은 372년 태학을 설치하여 학문을 가르쳤고, 다음해에는 법률인 율령을 반포했다. 아울러 불교를 승인하여 사찰을 건립했다. 이를 계기로 학생을 가르치기 위한 서적의 수요가 늘고, 통일된 법령인 율령을 시행하면서 행정 문서가 늘어났으며, 불교 경전을 제작하기 위한 종이 수요가 늘었다. 삼국시대의 승려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으며, 기술자인 경우가 많았다. 610년 담징 스님이 일본에 종이, 먹 등을 만드는 법을 전한 것처럼, 사찰은 종이를 직접 제작한 곳이기도 했다. 고구려는 불교를 신라보다 일찍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이른 시기부터 한(漢)나라를 비롯한 중국세력과 잦은 교류를 하다 보니, [사기], [문선] 등 다양한 서적들을 수입해 갖고 있었다. 따라서 종이로 책을 만드는 방법을 일찍 터득할 수 있었다.   고구려는 종이를 만들어 외국에 수출하기도 했다. [서화사(書畫史)]에는 수, 당나라에서 좋은 글과 그림은 고려지(髙麗紙)로 맨 앞 표지를 장정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고려지’는 고려시대에 송나라로 수출한 질 좋은 종이를 말한다. 그런데 [담원찰기(湛園札記)]에는 “건중(建中) 원년(780년)에 왜국의 사신이 와서 방물을 바쳤는데,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종이는 견지(繭紙-누에고치로 만든 종이)와 윤이 나는 것이 비슷하여, 사람들이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것이 지금의 고려지다.”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고려지는 고려(918〜1392)가 아닌 고구려에서 만들기 시작한 종이임을 알 수가 있다.    너무나 비싼 종이 고구려가 종이를 수출할 정도였다고 해도, 당장 종이가 일반화된 것은 아니었다. 408년에 만들어진 덕흥리 고분벽화에는 사람들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마사희(馬射戱) 장면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화살이 목표에 몇 개 맞추었나를 기록하는 주기인(注記人)은 나무에 글을 적고 있다. 귀족들이 즐긴 놀이 장면이었지만, 종이가 아닌 나무, 즉 목간(木簡)에 그들이 과녁을 맞힌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목간이 쓰인 것은 종이가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값비싼 귀중한 물건인 만큼 종이는 관청을 통해 철저히 관리되었다. 경주 월성해자에서 출토된 2호 목간에는 종이구입과 관련한 내용이 적혀있다. 어떤 관청에서 종이를 구입하라는 명령을 했고, 담당자가 경(經)에 쓸 희지 않은 종이 2근(斤)을 아직 보고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구입했다는 내용이다. 이를 두고 연구자마다 약간의 해석 차이는 있어도, 경전에 쓰이는 종이의 구입과 관련하여 관청에서 사용된 문서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성종 2년(983년)에는 토지제도인 전시과를 제정하면서 지방 관청의 운영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공해전시(公廨田柴)를 지역의 인구 수에 따라 차등 지급한 바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500정(丁) 이상인 주와 현에는 지전(紙田) 15결, 100정 이상의 주, 현에는 10결, 20정 이하에는 지전 7결, 향부곡(鄕部曲) 등에도 인구에 따라 5결, 3결, 2결을 지급하였다. 지방 관청에서 사용될 종이를 구입하기 위해 특별히 땅을 준 이유는 문서 행정에 필요한 종이의 값이 당시에는 매우 비쌌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덕흥리 고분벽화에 그려진 활쏘기 결과를 기록하는 사람. 종이가 아닌 목간에 결과를 적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종이의 재활용 비싼 만큼, 종이는 철저하게 사용되었다. 한번 사용한 종이는 뒷면을 다시 활용했고, 다 사용한 종이일지라도 버리지 않았다. 752년에 만들어진 [좌파리가반(佐波理加盤)] 문서를 보자. 이것은 앞면에는 관청에서 돼지고기, 말고기, 쌀, 콩을 받는 내용을, 뒷면에는 벼를 도정(搗精)시킨 내용을 기록한 문서인데, 폐기된 후 일본에 수출할 사발의 포장재로 재활용되어 일본 정창원(正倉院- 왕실 유물창고)에 보관되었다가 사발과 함께 발견되었다. 신라 [촌락문서(村落文書 ; 695년?, 755년?)]의 경우는 [화엄경론질(華嚴經論帙)]의 책 표지를 단단하게 하기 위해 삼베와 함께 속지로 넣어져 활용되었다가 발견되었다. 폐기된 문서 가운데는 옻칠그릇의 종이덮개로 사용된 것도 있는데, 옻의 건조를 막고 먼지가 들어가는 것을 막는 데에는 통풍이 잘 되는 종이가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서를 칠지문서라고 하는데, 옻이 스며든 문서는 건조나 부식이 되지 않아 오래 남는다.    값싼 목간을 사용하다 신라 경덕왕 때인 755년에 만들어진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국보 196호)]에는 이것을 만들게 된 사연을 끝부분에 적어 놓고 있다. 여기에는 화엄경을 베껴 쓰게 된 과정에서 관련된 인물들의 출신지, 성명, 관 등이 적혀있다. 이들은 지작인(종이를 만든 자) 1인, 경필사(불경을 베껴 쓰는 자) 11인, 경심장(두루마리 맨 끝에 붙이는 축(軸)을 만드는 전문가) 2인, 불보살상필사(경문 앞에 붙이는 불보살상 그림 그리는 자) 4인, 경제필사(사경의 마지막에 제목을 써넣는 전문가) 1인을 포함해 총 5종 19인이다. 이 가운데 지작인과 경필사는 모두 광주 5인, 남원경 2인, 정읍 4인 등 옛 백제 지역 출신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이 상당히 높은 관직을 갖고 있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종이를 만든 황진지라는 사람의 관등은 ‘내마(柰麻)’로, 이는 신라 관등 가운데 11위를 차지하며 5두품이 할 수 있는 관직이다. 글을 쓰는 사람의 관직도 내마, 또는 대사(大舍-12위)다. 이들은 숙련된 기술자였던 것이다.  값비싼 종이에 함부로 글을 써서 종이를 버릴 수는 없으므로, 종이에 글을 쓰기 위해서는 충분한 연습이 필요하다. 이 경우 연습은 종이가 아닌 목간을 사용했다. 현재까지 대략 500여점 이상의 목간이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목간은 나뭇가지를 베어 쉽게 만들 수 있으므로, 가격 부담이 없다. 또한 글을 쓰고 고치려고 하면, 칼로 나무껍질을 베어내면 된다. 따라서 현재 발견된 목간에는 글자를 연습한 것, 낙서한 것, 잘못 쓴 글 등을 볼 수 있다. 목간은 종이에 정식 문서를 쓰기 전에 관리들이 모은 정보를 기록하기도 하고, 물건에 붙인 꼬리표로도 사용되었다. 함안 성산산성에서는 7세기 초 여러 지역에서 보내온 물건에 붙은 꼬리표 목간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꼬리표 목간은 고려시대 침몰선 발굴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목판 인쇄와 종이 우리 역사에서 종이 사용이 크게 늘어난 계기로는 7세기 후반 삼국통일 전쟁을 치르면서 몸과 마음이 지친 사람들에게 불교가 널리 퍼진 것을 들 수 있다. 이에 따라 불경을 읽고자 하는 수요도 늘어났다. 내용이 많은 불경을 언제까지 베껴서 보급할 수는 없는 터. 결국 신라는 목판 인쇄술을 발전시켜 세계 최초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126호. 8세기 초)을 탄생시켰다. 목판 인쇄술의 발달로 책의 공급이 원활해지자, 종이 수요도 늘고, 따라서 종이 만드는 기술도 발전했다.    고려지 - 고려의 주요 수출품 신라에서 만든 종이는 ‘계림지(鷄林紙)’라 불리며 당나라에도 수출되기 시작했다. 신라 종이는 닥나무 껍질을 두드려서 만든 하얗고 반질반질한 종이라는 뜻으로 ‘백추지(白硾紙)’라고도 불렸다. 신라시대에 만든 종이는 천년이 넘는 세월을 견딜 만큼 질이 좋기로 유명했다. 이런 기술은 고려시대로 이어졌다.   서천 추동리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문서 (1119년, 또는 1179년의 것으로 추정됨)    송나라 때 손목(孫穆)이 지은 [계림유사(鷄林類事)]를 보면 '고려의 닥종이는 밝은 빛을 내므로 모두들 좋아하며 이를 일러 백추지(白錘紙)라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의 종이는 송나라에서 비단 종이(繭紙)라 여겨져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종이는 고려의 주요 수출품이었다. [고려사]에는 종이 생산을 위해 인종 23년(1145년)에서 명종 16년(1186년)에 걸쳐 전국에 닥나무를 재배할 것을 명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국가적으로 종이 만드는 것을 장려했던 것이다. 종이 만드는 장인은 공조서(供造署)라는 국가기관에 예속되어 있었고, 종이를 만들어 국가에 바치는 특수 지방 행정 단위인 지소(紙所)도 운영되었다. 고려는 958년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학문에 능통한 자들을 관리로 임명하였다. 이로 인해 유교 경전이나 문장을 공부하는 자들이 늘어나 책에 대한 수요가 많아졌다. 또한 불교가 국교였던 만큼, 불경에 대한 수요도 더욱 커졌다. 때문에 종이의 공급과 수요 모두 크게 늘었으므로, 종이 가격 또한 크게 떨어졌다.   조선의 종이 1.운룡지   2. 장지   3. 화선지  4. 표백하지 않은 순지   5. 표백한 순지   6. 피지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 시대에는 전국적으로 종이가 생산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전주와 남원이 대표적인 생산지였다. 명나라 화가 동기창(董其昌)이 조선의 종이는 두껍고 질기며 희고 매끈하여 서예와 회화에 아주 적격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로 조선 종이의 품질은 우수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종이는 문서, 그림을 그리기 위한 매체뿐 아니라, 공예품, 생활 소품 등으로 활용범위를 확장하였다. 돈, 지갑, 창호지, 모자, 부채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면서 종이의 종류도 용도에 맞게 매우 다양해졌다.   조선은 1415(태종 15)년 종이를 만드는 관아인 조지소(造紙所)를 설치하여, 1882년까지 존속하면서 종이의 수요를 감당했다. 1420년에는 서울 세검정 에 조지서를 두어 여러 색지를 만들기도 했다.1866년 조선을 침략한 프랑스의 군인 앙리 쥐베르(Henri Zuber)는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조선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집에라도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프랑스인들은 외규장각 의궤 를 보고 양피지로 만든 것 같은 질 좋은 종이에 감탄하기도 했다. 조선은 학자들의 나라답게, 책을 많이 가진 나라였고, 그 만큼 많은 종이가 소비된 나라였다.    우리 종이의 쇠퇴 하지만 19세기 말 이후 서양의 종이가 도입되면서 우리의 종이는 차츰 사양화되었다. 기계로 만든 서양 종이에 비해 우리 종이가 원료 공급 및 제작 과정에서 생산성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제 식민지 시기가 우리 전통 기술과 문화 발전에 큰 장애가 된 탓도 있다. 현재 서양 종이는 다량의 출판 인쇄물, 복사용지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때문에 우리 종이(한지)가 서양 종이처럼 널리 사용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종이 공예품과 고급 인쇄물 등의 용도로 다시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 종이가 다시 널리 사용되는 시기가 오기를 기대해 본다.   ‘지천년(紙千年) 견오백(絹五百)’이라는 말이 있다. 즉, 비단의 수명은 오백 년을 가지만 한지의 수명은 천 년을 간다는 말이다. 천 년이 지나도 종이로서의 수명을 잃지 않는 한지의 내구성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천년을 가는 종이, 한지1966년 발견 당시, 오랜 산화작용으로 인하여 부식되고 일부가 훼손되기는 했으나 본문의 내용을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보존상태가 우수했던 다라니경. 수명이 최대 100년인 오늘날의 종이에 비해 1,200여 년이 넘는 시간을 견뎌낸 우리 전통 한지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한지의 어원은 원래 닥나무 껍질을 가공하여 손으로 만든 종이를 일컫는 말로, 구한 말 일본을 통하여 기계로 만든 서양식 종이가 나오면서 그 이전의 종이를 한지(韓紙), 기계로 만든 서양의 종이를 양지(洋紙)라고 구분하여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외형이나 특징이 비슷한 개량 한지나 중국에서 수입된 종이들을 모두 한지라고 부르고 있어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우리 전통 한지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정리하자면 ‘우리나라에서 재배한 닥나무 껍질을 주원료로 하여 손으로 직접 떠서 만든 종이(수초지, 手抄紙)’라고 할 수 있다.    전통 한지는 무엇으로 만들까? 전통 한지를 만드는데 있어서 원료는 크게 주원료인 닥나무와 부원료인 황촉규액(닥풀)으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한지의 주원료인 닥나무는 뽕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관목으로서 일명 참닥나무라고 한다. 우리나라 전 지역, 특히 전라도와 경상도에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편마암이나 화강편마암이 풍화되어 이루어진 토양에서 주로 자란다. 한지 재료로서 쓰이는 재료로서 참닥나무 이외에 삼지닥나무, 꾸지닥나무, 뽕나무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가운데 참닥나무가 섬유질이 매우 길고 질기기 때문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부원료인 황촉규(액)는 일명 ‘닥풀’이라고 하는데 닥나무로 한지를 만들 때 분산제로 사용한 데서 유래하였다. 황촉규 뿌리를 빻게 되면 누런색의 점액질이 나오는데 섬유가 지통에서 빨리 가라앉지 않고 물 속에 고루 퍼지게 하여 종이를 뜰 때 섬유들의 결합을 도와준다. 또한, 첨가하는 닥풀의 양을 조절하면 발의 물 빠짐 속도를 변화시켜 종이의 두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닥풀은 종이에 뻣뻣한 강도를 높이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전통 한지 만들기전통 한지의 제조과정은 일반적으로 1) 닥 채취하기 → 2) 닥 찌기 → 3) 껍질 벗기기 → 4) 물에 담그기 → 5) 삶기 → 6) 씻기와 표백 → 7) 두드리기 → 8) 해리 → 9) 종이 뜨기 → 10) 물빼기 → 11) 말리기 → 12) 다듬기 → 13) 다리기의 13단계로 이루어진다.   참고문헌 및 관련자료 한치윤 저, 민족문화추진회 옮김, [(신편 국역) 해동역사(海東歷史)], 한국학술정보, 2008; 한국고대사회연구소, [강좌 한국고대사5- 문자생활과 역사서의 편찬],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2002; 베이징대학교 중국전통문화연구중심 저, 장연ㆍ김호림 옮김, [중국문명대시야] 1, 김영사, 2007;이용현, [한국목간 기초연구], 신서원, 2006; 국립중앙박물관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 전시도록], 국립중앙박물관, 2011;황수영, [新羅 白紙墨書華嚴經], [미술자료] 24집, 국립중앙박물관, 1979;조선기술발전사편찬위원회, [조선기술발전사] 2, 3, 4, 5권,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6;H.쥐베르, CH.마르탱 저, 유소연 옮김, [프랑스군인 쥐베르가 기록한 병인양요], 살림, 20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글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 황쏘가리, 금린어(錦鱗魚), 궐어(鱖魚),황쏘가리는 희귀종이므로 현재 천연기념물 제190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학명은 Sinipe...적만 남는다. 몸길이는 60㎝ 이상이다. 현재까지 한강에서만 발견된 희귀종이다. 쏘가리는 과거 금린어(錦鱗魚) 또는 궐어(鱖魚)라고 하였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토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금린어가 토산에 들어 있는 지방은 강원도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경기도이다. 경상도에서는 삼가현(三嘉縣)의 토산에 궐어가 실려 있다. 경기도에는 광주목을 비롯하여 모두 7개 지방의 토산에 금린어가 들어 있다. 이 금린어에 황쏘가리도 포함되어 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며, 황쏘가리로 인정될만한 어명(魚名)도 조선시대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 과거부터 흔하지 않았던 어종 같으며, 과거에는 쏘가리류가 아닌 어종으로 취급하였는지도 모른다.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는 궐(鱖)을 한글로 ‘소갈이’라 하고, 그 모양을 몸이 평평하고, 배가 넓고, 입이 크고, 비늘이 잘고, 황색 바탕에 검은 무늬가 있다고 하였다. 황쏘가리도 개체변이가 심하여 흑갈색무늬를 일부 식별할 수 있는 것도 있기는 하나, 『난호어목지』의 궐은 쏘가리를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황쏘가리는 희귀종이므로 현재 천연기념물 제190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황쏘가리는 잉어에 대한 금잉어의 경우와 같이 쏘가리의 변종으로 보이며, 쏘가리의 계통 발생 과정에서 돌연변이종으로 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생물학적으로 조사하면 황쏘가리와 쏘가리 등은 다 같이 2n=48이며 핵형도 같다. 그렇다면 돌연변이종으로 출현한 최초의 황쏘가리와 다른 쏘가리의 사이에 자유롭게 교잡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도 양자의 교잡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양자의 중간형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좋은 증거가 될 것이다.   황쏘가리는 세계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한국 특산종으로 우리나라 거의 모든 하천에 분포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팔당호, 광나루, 청평원, 소양강 및 남한강 상류 등 한강 일대와 임진강 수역 등이 지금까지 주요 서식지로 알려져 있다. 분포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한강 전체에서 발견되나, 북한강 파로호에 가까울수록 개체 수가 많고 멀어질수록 적다. 이 점으로 보아 황쏘가리는 북한강 수계의 어느 한 곳에서 출현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여기서 점차 다른 곳으로 퍼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제천을 비롯한 충청북도에서는 여러 하천들의 중·상류 지역에 분포한다.   현재 대표적인 황쏘가리의 서식지로 알려진 곳은 광나루 부근에서부터 북한강의 의암호·춘천호·파로호까지이고, 남한강 수계는 하류에는 양평·여주·충주 목계리 등과 상류에는 제천시 한수면·청풍면, 단양군 단양읍·대강면·영춘면, 영월군 동강 및 서강 등지이다. 남한강에서 서식하는 각종 물고기 중에서 희귀종으로 인정되고 있다.   산란기는 5월 하순부터 7월 상순으로 유속이 빠르지 않고 깊이가 30~70㎝ 되며 바닥에 자갈이 깔린 곳에서 밤에 산란한다. 수정란은 6~7일이면 부화하며, 2개월이 지나면 7㎝ 내외로 성장하여 어미 물고기와 같은 형질을 갖춘다. 수명은 20년 정도이며, 쏘가리보다 생명력이 강하여 망치로 머리를 때렸을 때 쏘가리는 1회로 바로 죽지만 황쏘가리는 2~3회 해도 소생하는 때가 있을 정도이다.   1967년 7월 11일 천연기념물 제190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고가로 매매되고 있는 까닭에 남한강 황쏘가리는 오히려 자원이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충주댐을 건설하기 이전에 남한강 상류 청풍강 유역에 수심이 깊은 청풍면 황석리 두멍소 등지에 무리지어 서식했으나 청풍호의 수심이 깊어지고 생태계 교란으로 먹이사슬이 단절되면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하루 속히 보존에 힘을 쏟아야 하며, 아울러 황금색을 특징으로 하는 관상어로 육성하는 것도 필요하다.   황쏘가리는 민물고기로 몸길이는 60㎝가 넘는다. 모양은 쏘가리와 비슷하나 더 납작하고 황금색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한강의 황쏘가리는 한강일대(팔당, 광나루, 청평원, 소양강 및 남한강 상류)와 임진강 지역이 주요 서식지이다. 남·북한강에서 드물게 발견되며, 파로호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데 그곳에서 멀어질수록 수가 감소된다고 한다.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난호어목지(蘭湖漁牧地)』『한국(韓國)의 희귀(稀貴) 및 위기동식물(危機動植物)』(한국자연보존협회, 1981), 『한국어도보(韓國魚圖譜)』(정문기, 일지사, 1977), 문화재청, 한국민속문화대백과, 두산백과 

  • 통영 안정사 종이

    통영 광도면 안정사 제작의 종이가 조선 중기 최고의 진상품임을 확인하는 260여 년 전 공문서가 2건 발견, 안정사와 사원수공업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특히 이 문서들은 건륭 17년(1752년) 근간에 작성된 것으로 벽발산 안정사 의상암 주지 승헌 스님이 발견, 보관하고 있던 것으로 18일 한산신문을 통해 공개했다. 승헌 스님이 공개한 문서는 2건. 하나는 안정사 종이 제작과 직인에 관한 상소문으로 수신처가 예조로 돼 있다. 또 다른 문서는 예조가 앞의 문서에 답신을 한 것으로 보이는 공문서로 모든 권한을 안정사 주지 여찬에게 위임하는 위임장이다. 이는 당시 안정사의 종이 제작이 차지하는 권한이 막대함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조선중기 안정사 주지 여찬 스님을 비롯 7명의 스님이 연대 상소한 가로 41 × 세로 75.5㎝ 크기의 공문서는 안정사의 중요한 책무 가운데 하나가 "종이를 진상하는 곳(進上紙地)"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또 안정사 종이임을 증명하는 철도장이 너무 오래되고 낡아 사용할 수 없어 새로 안정사 직인을 제작해 줄 것을 예조에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예조는 건륭17년(1752) 정월에 답을 내려 준다. 그 문서가 가로 69 × 세로 37㎝ 크기의 공문서로 안정사가 청한 대로 새 직인을 만드는 것을 허락하고, 전례대로 그 권한을 마땅히 안정사 주지 여찬에게 위임한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18세기 이미 안정사 주축의 통영 종이 제작이 활성화 됐고, 경상전라충청 삼도수군통제영(약칭 통영) 본영 뿐 아니라 국가 진상까지 하는 질 좋은 종이 생산지였던 것을 증명하고 있다. 또 이 때 안정사의 사원 수공업이 가장 활성화 됐던 시기이자 안정사의 세력이 아주 융성함을 입증하는 사료이기도 하다. 이는 지난 2009년 경남도유형문화재 제489호로 지정된 통영안정사 석조석가 삼존 16나한상에서 발견된 복장발원문(조성한 연유와 시기를 기록한 종이문서) 제작과 거의 같은 시기로 이같은 사실을 더욱 뒷받침 해 준다. 1681년 제작된 16나한상 중 3번째 가락가발리타사 나한 몸 속에서 발견된 복장발원문과 후령통(복장발원문을 담은 통)의 경전 인쇄물을 보면 건륭 24년(1759년)에 나한전과 명부전을 중수하고 이 발원문을 제작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2002년 소실된 안정사 만세루 탐진당(스님수행도량)에서도 안정사에서 제작된 질좋은 종이를 겹겹이 이어 붙여 3∼4㎝ 두께의 예전 종이 장판이 불타기 직전까지 존재 했었다. 경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지우 박사는 "이 2장의 문건은 안정사와 국가기관인 예조간에 오고간 공문서로 안정사의 종이 제작에 관한 아주 중요한 사료이다. 조선 중기 안정사의 위상 뿐 아니라 그간 역사서에서 안정사가 종이를 진상했다는 기록을 아주 자세히 뒷받침하는 증거다. 문서 내용을 역사적으로 더욱 정밀히 검토, 연구해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평했다. 경상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상환 박사는 "안정사의 종이 제작은 조선 중기 이미 유명했다. 18세기 삼도수군통제영이 융성해지고 12공방 등 정치 군사 뿐 아니라 통영이 상업의 중심지로 부상, 당시 강구안을 통해 상선이 5일에 1번 필요 물품을 실어 날랐다. 이 때 종이 제작에 필요한 질좋은 나무들은 경상전라충청 삼남에서 직접 공수해 왔고, 안정사는 최고의 종이를 정부에 진상했다. 또 안정사 주변 지석골, 지도 등도 모두 종이와 관련된 용어들로 더욱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고 분석했다. 마산박물관 학예사 송성안 박사는 "사업 수공원 측면에서 볼 때 안정사 역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18세기면 안정사가 가장 융성할 시기이고, 종이 질 또한 가장 우수할 때 이다. 이 공문서의 내용도 역사적 가치가 높고 그 공문서 내용을 담은 종이 역시 또 하나의 사료"라고 평가했다.      ※한산신문 기사 작성을 위해 원문 해독과 번역에 도움 주신 분 ■안정사 의상암 주지 승헌스님(안정사 영산재보존회장) ■경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지우 박사 ■경상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상환 박사 ■마산박물관 학예사 송성안 박사 ■통영충렬사 집례관 이부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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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뇌개발에 좋은 종이비행기 접기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종이접기! 특히 남자아이들의 경우 종이비행기를 접어 하늘 높이 날리며 노는 모습 익숙하시지요? 단순한 놀이라고만 여기실지 모르나 사실 종이접기는 아이들에게 굉장히 이로운 효과를 많이 준다고 합니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높은 효과를 주는 종이접기! 오늘은 두뇌개발에 좋은 종이비행기 접기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종이비행기 접기의 효과   1. 집중력 향상 - 아이들은 종이접기를 참 좋아합니다. 간단한 방법부터 시작해서 과정이 복잡한 방법까지 종이접기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지요. 아이들은 이 과정을 통해서 집중력이 향상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쉬운 종이비행기 접기부터 시작해주세요. 그리고 점점 어려운 과정의 종이비행기 접기를 가르쳐준다면 아이의 집중력은 조금씩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할 겁니다.   2. 두뇌발달 - 어린 아이들의 경우, 손에 힘이 없는 경우도 많지요. 또 손에 힘이 생긴 나이라면 뇌가 발달하고 있는 과정일 테고요. 종이접기를 하게 되면 손에 힘이 없는 친구들은 손가락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힘이 생기게 되고요. 눈과 좌뇌, 우뇌를 함께 사용해주기 때문에 모두 골고루 발달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두뇌발달에 좋다는 것이지요.    3. 색감발달 - 요즘은 아이들에게 색채놀이 참 많이 시켜주시잖아요. 종이비행기접기를 하면 색채놀이가 절로 됩니다. 아직 색감에 대한 개념이 잘 잡혀져 있지 않은 친구들은 당id한 색상의 종이비행기를 접음으로써 색깔에 대한 인지가 시작됩니다.   4. 상상력 자극 - 미래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풍부한 사람들의 시대라고 하는데요. 종이비행기접기는 우리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하네요. 눈으로 보면서 이 모양을 접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쳐야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상상하고 실행하게 되지요.   5. 정서발달 - 성공도 습관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어린 아이들은 성취감, 성공에 대한 느낌을 자주 심어줘야 자신감이 생긴다고 합니다. 자신감이 있는 어린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자아에 대한 안정감을 갖게 되지요. 종이비행기를 접고 완성하는 과정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고 그 영향은 고스란히 정서발달로 이어집니다.      종이비행기 접기 놀이 tip   종이비행기 외 다양한 종이접기를 했다면 단순히 진열해 놓거나 날려보는 것에 그치지 마세요. 만들어놓은 완성품들을 모아 큰 도화지에 펼쳐놓은 후 한 장의 작품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습니다. 배경을 그리고 비행기는 하늘에 꽃은 땅에 놓아 풀로 붙여주는 것이지요. 아이들이 상상력과 성취감을 또 한번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열심히 만든 작품에 그림을 그려주시는 것도 좋습니다. 종이비행기에 무늬를 그려주거나 고양이 모양에 얼굴을 그려주는 것이지요. 완성된 모양을 평면도형과 연결지어 설명해줄 수도 있습니다.       두뇌개발에 좋은 종이비행기 접기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날씨가 추워져서 우리 아이들 마땅히 밖에 나가 놀기 힘든 계절이 되었지요. 집에서 가족과 함께하는 종이비행기 접기로 두뇌개발도 시켜주고 즐거운 마음도 함께 나누세요^^

  • 아이와 함께 즐기기 쉬운 색종이 접기

    안녕하세요, 가꿈사... 중 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나게 되었는데요, 바로 종이 접기의 대가인 김영만 선생님이세요~! 저희 아이들 또래는 김영만 선생님이 누구인지 잘 모를 테지만, 현재 나이 20대 후반 이상의 분 중에서 김영만 선생님을 모르는 분들은 아마 없으실 거예요. 저도 간만에 텔레비전을 보면서 어린 시절 색종이 접기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는데요, 수많은 분들이 방송을 보고 직접 작품을 응용해서 멋지게 만드셨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이번에는 아이들과 함께 추억의 색종이 접기에 도전해보았어요!  색종이 접기 하나. 원형 부채 만들기 첫 번째로 만들어볼 작품은 원형 부채랍니다. 9월에 접어들면서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한결 선선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한낮에는 따가운 햇볕이 가득한데요, 이런 날씨에는 부채가 꼭 필요하겠죠? 고사리 같은 아이들 손에 쥐어줄 수 있는 나만의 부채를 만들어보도록 해요! 먼저 첫 번째로 네 장의 색종이를 병풍 접기 해주세요. 이렇게 병풍 접기를 한 네 장의 색종이를 겹쳐 붙이고 가운데에 막대를 끼워주면 부채 완성! 막대도 양면 색종이로 띠를 감아내듯 둘러가며 접어주시면 이렇게 색색의 예쁜 막대가 완성된답니다. 정말 쉽죠?! 색종이 접기 둘. 바람개비 만들기 다음은 독특한 모양의 바람개비랍니다. 만드는 방법을 소개해드리자면, 이렇게 한 장의 색종이를 4등분해서 자른 후 둥글게 말아 이어 붙이면 된답니다. 참 쉽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람개비와는 달리 종이가 빙글빙글 돌면서 돌아가는 바람개비를 만들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이 바람개비는 위에서 떨어뜨리면 뱅글뱅글 돌면서 신나게 공중을 나는 멋진 바람개비가 된답니다. 다음으로는 새 목걸이 동전 지갑을 만들어 볼게요.  색종이 접기 셋. 새 목걸이 동전지갑 만들기 먼저 삼각 접기를 해주세요. 그리고 양쪽 끝을 접고 풀을 발라 고정 시켜주세요.  이제 위의 삼각부분 한 장을 아래로 접어서 풀로 붙여주세요. 그 뒤 뒤집어서 새 모양을 꾸며주시면 된답니다. 먼저 다른 색종이를 대고 같은 크기로 부리를 만들어주세요. 다음은 날개를 붙여줘야겠죠? 새 날개를 만들어 붙여주시고, 안에 작은 날개도 붙여주세요. 이때 날개 끝 부분에 풀칠을 해서 붙여주시면 날개가 나풀거리는 느낌이 한층 살아난답니다. 이어서 눈도 그려주고, 다리도 오려서 붙여주세요. 여기에 끈을 매주면 멋진 새 모양 동전지갑이 완성된답니다! 짠~ 꽤나 그럴 듯 하죠? 아이들 목에 걸어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색종이 접기 넷. 종이꽃 만들기 다음으로는 형형색색 화려한 종이꽃을 만들어볼 거예요. 먼저 색종이 네 장을 하나로 겹쳐서 둥그렇게 잘라주세요. 그리고 색종이를 반으로 접은 후 펴서, 다시 반으로 접어주세요. 이렇게 다시 펴서 접힌 부분을 잡으면서 안쪽을 눌러가며, 위와 같은 모양으로 접어주세요. 이제 접힌 부분을 잡고 종이 끝을 뾰족뾰족하게 잘라주세요. 이후 각 면을 한 장씩 접어서 붙여주세요. 네 장의 색종이를 연결하면 위와 같은 모양이 된답니다. 이제 종이꽃의 대를 접어서 준비해줘야 하는데요, 색종이를 둘러가며 접은 뒤, 뾰족하게 튀어나온 양쪽 끝은 잘라주세요. 완성 된 꽃대는 꽃의 양쪽 끝에 붙여주세요. 이제 꽃대를 잡고 펼쳐주면 이렇게 멋진 종이꽃이 완성된답니다! 아이들과 종이꽃을 만들면 손끝의 감각 발달에 좋은 것은 물론 재미도 있어 아이들의 정서 발달에도 좋을 것 같아요. 색종이 접기 다섯. 배트맨 가면 만들기 마지막으로 소개해드릴 방법은 배트맨 가면을 만드는 방법이랍니다. 흔하디 흔한 종이 봉투가 약간의 가위질과 그리을 더하면 아이들의 멋진 장난감으로 변신한다는 사실! 그럼 지금부터 종이봉투로 멋진 가면을 만들어 볼까요? 만드는 방법은 아주 간단해요. 종이봉투에 배트맨 본을 뜨고, 선을 따라 잘라주면 끝! 눈을 뚫을 때는 아래에 고무 패드 등을 깔고 칼로 조심조심 잘라주시길 바라요. 종이가 약해서 한 순간의 실수로 가면이 찢어져버릴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겠죠? 보다 실감난 가면을 위해 양 귀퉁이를 접어 귀를 만들어주시면 더욱 좋아요. 정 중앙에 마크까지 그려주면 배트맨 가면 완성! 이제 가면을 쓴 아이들이 멋지게 배트맨으로 변신해 신나게 놀 일만 남았네요!  이렇게 색종이를 이용해 간단하게 만들어볼 수 있는 작품들을 소개해드렸는데 어떠셨나요? 저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은 물론, 아이들과 함께 만드는 새로운 추억을 쌓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답니다. 어린 친구들도 쉽게 만들 수 있는 작품이라 아이 스스로가 직접 만들게 하면 성취감도 남다를 것 같아요. 단, 가위를 사용할 때는 엄마가 곁에서 지켜봐 주시기 바라요! 그럼 다음 번에도 재미있는 이야기로 찾아 뵐 것을 약속 드리며 이번 이야기를 마무리 할게요. 감사합니다. ^^ http://kyobolifeblog.co.kr/1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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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실 바닥에 종이 한 장… 사소한 부주의가 '실내 낙상' 부른다

    노쇠로 가는 길목인... '가정 낙상 체크리스트'〈표 참조〉를 알아두면 도움이 된다. '바닥에 종이가 놓여 있나' 등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소홀하기 쉬운 내용들로 구성돼 있다. 국내에서는 화장실, 거실·주방 바닥 등에서 미끄럼 사고가 자주 일어나므로 이를 특히 주의해야 한다. 침대 높이는 걸터 앉을 때 발바닥이 바닥에 닿게 하고 바퀴 달린 의자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 종이성냥 크기 치즈, 뇌졸중 위험↓

    치즈는 건강한 음식...장 낮은 집단은 하루 평균 40g의 치즈를 먹은 사람들이었다. 이는 종이성냥 하나 크기의 치즈 덩어리를 의미한다. 즉 치즈를 잔뜩 올린 피자를 여러 조각 먹을 때 건강상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이란 해석으로 넘어가선 안 된다는 의미다. 특정한 음식이 좋다는 연구결과가 나오면 해당 음식의 효과를 과대평가해 그 음식만 집중적으로 먹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바람직한 식습관으로 보기 어렵다. 이번 연구는 치즈 섭취와 심장질환 위험률 사이의 인과관계를 증명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도 확대해석에 주의가 필요하다. 치즈에 든 프로바이오틱스가 체내 염증을 줄여주는 등 건강상 혜택을 일으킬 것이란 추정은 가능하다. 치즈에는 포화지방뿐 아니라 불포화지방산인 공액리놀레산(CLA)이 들어있다는 점도 좋은 효과를 일으키는 요인으로 분석된다.

  • 몸이 부을 때, 부종이란

      몸이 부을 때 부종이란 세포외 체액이 혈관 이외의 부분에 과도하게 축적되는 현상을 말하 며 부종의 분포범위에 따라 분포하는 국소부종과 온몸에 걸쳐 발생하는 전신부 종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부종은 병적 원인에 의해 초래되는 경우 외에도 생리적인 현상에 의해 발생할 수 있다. 즉 오랫동안 서 있거나 앉은 자세 후에 다리가 붓는다든지, 타이핑과 같이 똑같은 동작을 계속 반복할 경우에 운동부위가 붓는 경우, 짠 음식을 과다 한 후 포만감과 함께 붓는 느낌, 월경 전에 수반하는 부종등이 모두 그 예이다.   부종은 왜 생기나? 부종은 체액이 혈관 안으로부터 밖으로 이동하여 초래된 결과로, 모세혈관 혈 류역학의 일차적인 변화에 기인한다. 즉 외상이나 감염의 경우처럼 조직이 직법 물리적으로 혹은 화학적으로 손상을 받으면 모세혈관이 파괴되어 혈관안의 체액 이 밖으로 이동하여 국소부종이 발생한다. 이는 염증이나 과민반응시 흔히 관찰 되고 발작, 열감, 압통 등 다름 염증반응을 동반할 수 있다. 또한 혈액순환의 장 애가 있으면 모세혈관의 정수압이 증가하여 혈관 안의 체액이 밖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정맥이나 임파관이 막힌 경우는 손상 받은 맥관의 분포에 따라 국소부 종이 발생하고 울혈성 심전부전의 경우처럼 전신혈액순환의 장애가 있으면 전신 부종이 발생한다. 한편, 간경변이나 신증후군의 경우처럼 혈중 알부민농도가 매 우 낮으면 혈관내 교질삼투압이 감소하여 역시 전신부종이 발생할 수 있다. 전 신부종의 경우는 신장에서 일차 혹은 이차적으로 염분과 수분을 과도하게 축적 하는 역할을 한다. 전신부종은 조직압이 낮은곳부터 발생하게 되므로 처음에는 는 주위가 푸석푸 석해지거나 발등, 발목, 혹은 종아리 앞쪽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렀을 때 손가락 자국이 남게 된다. 심하면 복수가 차거나 늑막에 물이 고일 수도 있다. 가정에서는 이렇게 다음은 심하지 않은 부종이 발생하였을 때 가정에서 일차적으로 부종을 경감 시키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조치들이다.  

  • 턱밑에 몽우리 원인 1분확인 임파선 부종이

    턱을 괴고 있는 경...   턱밑에 몽우리가 생기는 첫번째 원인으로는 임파선 부종이 있어요.임파선은 우리의 몸 전신에 걸쳐 분포하고 있는데겨드랑이와 턱 그리고 사타구니에 가장 많이분포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구요.  임파선은 우리의 몸에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침투를 하게 되면임파선 내의 백혈구가 면역반응을 일으키게 되는데요.이렇게 면역반응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부어오를수가있다고 하더라구요.    두번째 원인으로는 피지 낭종을 들수가 있어요.주머니와 같은 형태로 생성되는데, 낭종안에 피지와 각질이 쌓이게 되는 것이라고 해요. 이런 경우에는 자연치유가 잘 되지 않기 때문에 낭종을 제거해야 없어지게 된다고 하네요.관리를 하지 않으면 점점 커지게 되고후에는 심한 악취를 유발하기도 한다고 하니참고하셔서  치료를 하시는 것이 좋을것 같네요,    세번째 원인으로는 침샘 종양을 들수가 있어요.침샘은 침을 생성하고 분비하는 기관으로턱 부분에도 침샘이 위치해 있다고 하더라구요.바로 이 턱 부위의 침샘에 종양이 발생하면턱 아래에 몽우리가 질 수가 있다고 하네요.   양성인 경우가 많지만혹시나 모를 악성일 확률도있기 때문에 이를 간과해서는안될듯 하네요. 이외에도 인두암이나 지방종과 같은 원인들이 턱 아래에 생기는 몽우리의원인으로 있을수가 있으니정확한 것은 전문의와 상의를하는 것이 좋다고 하네요.  출처: 에비츄우 http://youngeun01.tistory.com

  • 나는 몸신이다 코골이 방지 종이 테이프 테이핑 방법 김호선 한의사 코골이 협병증 수면의학박사 신홍범 코 세척 방법 코골이 뇌졸중 고혈압

    오늘 나는 몸...원하게 뚫어주는 쉽고 간단한 코 세척 방법을 알아보자. 또한 코골이를 종이테이프 하나만으로도 잡을 수 있다는 몸신이 있다. 한의사 김호선은 콧잔등과 입술에 테이프를 붙이고 밤을 자면 코골이가 줄어드는 방법을 소개한다. 과연 이 방법은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 종이 테이프로 코골이 방지 하는 방법 준비물- 종이테이프, 가위 1, 준비된 종이테이프를 코와 입의 길이에 맞춰서 잘라준다. 2, 입술을 다물고 그 위에 세로로 테이프를 붙여준다. 3,콧등을 가로질러테이프를 붙인다. 4, 테이프를 단단하게 고정을 한 후 잠을 자면 된다. 잠을 자면서 코로 호흡을 해야 하는 이유는 코골이 수면무호흡증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아침에  일어나면 입속이 건조하고 피로했던 게 개운해진다. 아이들은 충치와 감기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비염환자의 경우 코막힘과 콧속의 온도와 습도를 유지 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뇌졸중 예방과 돌연사를 방지하는 효과도 있다. http://wisdom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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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름종이와 피지에 관한 거짓과 진실

    ☆  기름종이를 많이 쓰면 피지분비가 더욱 왕성해진다?기름종이를 사용하면 피부가 건조함을 막기 위해, 없어진 만큼의 피지를 더욱 분비하기 때문에 더욱 왕성히 생성된다는 속설이 있죠. 그러나 기름종이를 사용해서 피부가 건조해질 정도로 피지를 제거하기란 힘듭니다. 즉 피지를 기름종이로 자주 닦아낸다고 해서 피지 분비량이 더욱 왕성해진다는 것은 거짓이죠. 다만, 너무 지나치다 싶을만큼 자주  닦아냈을 시에는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피부가 필요로 하는 만큼은 더 분비가 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양이 조금 늘어났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피부 타입을 바꿀 정도는 아니라고 하네요.   ☆ 피지가 나올 때마다 기름종이로 닦는 것이 좋다? 기름종이는 번들거림이 심할 경우에 한해 하루 2∼4회 가볍게 찍어 누르듯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과도하게 자주 닦는 경우 피부에 좋지 않으므로, 피지가 많은 분들도 지나친 사용은 자제하세요. 또한 피지나 더러움이 묻은 기름종이를 반복해서 사용하면 피부에 자극을 주어 피부트러블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주의하도록 하세요.   ☆ 피지는 무조건 좋지 않다?  피지는 피지선에서 나오는 액체 상태의 지방으로서 적당량의 피지는 피부 노화를 막는 데 필수적입니다. 피부에서 수분이 빠져나가는 걸 막고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보호하기 때문이죠. 적당량 분비되는 피지는 피부를 보호하기 위한 보호막 역할을 한다니 무조건 피부의 적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세요 ^^   ☆ 피지제거, 기름종이 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피부가 번들거릴때, 혹은 수정 화장시 기름종이가 없다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해 보세요. 파우더가 묻어있지 않은 퍼프의 뒷면 부분으로 피지가 많은 부분을 살짝 눌러주세요.  자극이 가지 않는 선에서 지그시 누르듯 해야 피지샘을 자극하지 않고 화장도 지워지지 않아요. 아니면 티슈를 이용해 보세요. 물론 이번에도 살살 눌러주면서 피지를 제거해야 피부가 자극받지 않겠죠. 또 다른 방법으로는 미스트가 있습니다. 기름으로 번들거린다고 해서 수분이 부족하지 않은 것은 아니거든요. 유수분 밸런스를 맞춰 주는게 중요하답니다. 단, 미스트를 뿌려준 후 반드시 매트하게 모두 흡수될 때까지 잘 두들겨 주거나 휴지로 물기를 살짝 눌러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미스트가 증발하여 피부에 남아 있는 수분도 빼앗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지퍼맥,종이타월의 확실한 활용법

    랩·쿠킹호일·지퍼백·종이 타월. 독자 테스터와 기자가 남은 음식 보관 외에 더 쏠쏠히 사용할 수 있는 활용법을 찾아 일일이 사용해봤다. 이러한 15일간의 사용 경험 결과 찾아 낸 가장 쓸모 있고 확실한 활용법. 1 기름병 보관할 때기름이 흘러 지저분한 기름병. 종이 타월을 두른 다음 고무줄로 고정을 시킨다. 기름이 흘러도 종이 타월이 쏙쏙 흡수하므로 미끈거리는 일이 없다. 박정선 병이 미끄러지지 않으니까 편하다.이정화 이렇게 해서 우유팩 자른 것에 넣어두고 쓰면 옆이건 바닥이건 미끈거릴 일 없다. 2 간편하게 고추기름 내기고추기름을 만들 때 종이 타월을 두 겹으로 걸친 후 고춧가루를 가운데 놓고 그 위에 데운 기름을 붓는다. 종이 타월이 필터 역할을 톡톡히 해줘 맑은 고추기름만 아래로 빠지게 된다. 박정선 고춧가루를 팬에 볶으면 지저분해졌는데 이 방법은 편하다.이정화 고춧가루를 기름에 볶아 거르는 것보다는 색깔이 연했지만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 3 유리 그릇을 보관할 때유리 그릇은 자칫 잘못하면 금이 가기 쉽다. 종이 타월을 유리그릇 사이에 한 장씩 끼워서 보관하면 그릇끼리 부딪혀 흠이 날 염려가 없고, 이사 갈 때도 그대로 옮겨놓으면 된다. 박정선 접시보다 작게 접어 깔면 보기에도 깔끔하다.이정화 괜찮은 방법. 접시뿐 아니라 수저 등을 보관할 때도 좋다. 프라이팬에 생선 튀길 때그냥 뚜껑을 덮어놓으면 수증기가 생겨 생선살에 떨어지니까 맛있는 구이가 되지 못한다. 이때 종이 타월 두세 겹을 프라이팬에 올려놓고 뚜껑을 덮으면 튀는 기름과 수증기를 종이 타월이 흡수한다. 박정선 종이 타월이 기름을 흡수하니까 그릇 닦기에도 편하다.이정화 이렇게 덮었던 종이 타월은 프라이팬의 바닥 기름을 한 번 더 닦은 다음 버린다. 김 보관할 때, 용기 바닥에 깔아 기름 흡수플라스틱 그릇에 종이 타월을 깐 후 구운 김이나 튀긴 다시마를 보관하면 종이 타월이 기름을 흡수해 오랫동안 바삭바삭한 상태를 유지한다. 박정선 바닥에 낀 기름에 김이 다시 한 번 절었는데 그게 없어졌다.이정화 매번 그릇을 닦지 않아도 되니까 엄청 편하다. 지퍼백도 냉동용, 냉장용이 따로 있다. 냉동용은 약간 두꺼운데, 냉장용은 그에 비해 얇다. 요즘엔 1중 지퍼에서 발전해 2~3중, 호크형 등 여러 가지가 있다. ▶ 대중목욕탕 갈 때, 목욕타월 등을 넣어간다속이 보이니까, 방수도 확실히 되니까 젖은 물건을 넣기 좋다. 박정선깜찍한 발상. 방수가 되니까 젖은 물건을 넣어도 가방이 젖지 않는다.이정화 수영장 갈 때 수영복을 하나씩 지퍼백에 담는다. 해수욕장에서 선글라스, 카메라 등도 보관. ◀ 사골 국물을 1인분씩 나눠 냉동예전엔 우유팩에 보관했다면 요즘엔 지퍼백에 보관하는 추세. 지퍼백에 1인분씩 넣은 다음 눕혀서 냉동한 후, 꽁꽁 얼면 세워서 보관한다. 박정선 세워서 보관할 수 있으니까 정말 공간 차지가 줄어든다.이정화 우유팩에 보관했던 것보다 훨씬 편하다. 반조리 재료를 냉동, 여행 갈 때 가지고 간다여름에 여행 갈 때 음식을 반조리해서 지퍼백에 담아 얼린다. 이것을 아이스박스에 담으면 얼음 대용인 동시에 목적지에 도착하면 알맞게 녹아 그대로 음식으로 만들 수 있다. 박정선 쓰레기는 나중에 지퍼백에 담아서 버린다. 버릴 곳이 없을 땐 흐르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으니까 집까지 가져온다.이정화 얼렸던 것을 그대로 끓는 물에 중탕한 뒤 바로 먹을 수 있다. 밤 보관할 땐 구멍을지퍼백에 밤을 보관할 때는 구멍을 뚫어야 오래 보관할 수 있다. 밤이 숨을 쉬기 때문에 안에 습기가 차버린다. 박정선 오래 보관해야 할 때는 냉동실에. 그래야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이정화 작년에 밤을 보관했는데, 진짜 안에 습기가 차서 썩어버렸다. 먹다 남은 과자 보관새로 뜯은 것처럼 바삭바삭하다. 여기에 설탕을 1/2큰술 정도 넣어주면 습기를 빨아들이기 때문에 더 바삭바삭하다. 박정선 봉지째 넣어두는 것보다는 과자만 꺼내 넣어두는 편이 더 바삭바삭.이정화 5일 정도까지도 바삭바삭하다.

  • 체인지업 도시탈출 씨앗종이 전주 김명진 횡성 아마란스 농사 방태호 서삼석 부부 파쇄종이 종이에물주는 남자 협동조합 온리 네 남자의 약초농장

    1,행복한 귀...aver.com/herb4man ● 코너 2. 수상한 귀촌 > 종이에 물주는 남자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김명진(45)     우리나라에서 전통에 멋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전주. 이곳에 귀촌 4년차 김명진 씨가 살고 있다. 명진씨는 매일 아침 전주 거리를 돌아다니며 종이를 찾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역에서는 명진 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종이를 매일 직접 집으로 갔다주거나 몰래 두고 가는 사람들까지 있다고 한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쓸모 없는 종이 일지 모을지만 명진씨에게는 보물과 같은 재료다. 파쇄 종이로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새싹종이" 씨앗을 품고 있는 종이에 물을 주면 그대로 새싹이 자라는 특별한 종이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해외엣 먼저 알려진 것이지만 보통 새 종이로 만들고 있지만 명진 씨는 파쇄종이를 이용해서 만들고 있다. 전주에서 대학을 나온 그는 서울에 직장 생활을 하면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지만 바쁜 직장 생활로 인해서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그래서 젊은 시절 추억이 많은 전주로 귀촌을 결심하게 된것이다. 명진 씨는 지역을 살리기 위해서 합동조합을 만들어 소외된 이웃들을 조합원으로 꾸려서 운영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생기는 수익금은 대부분 지역 사회를 후원하고 있다. ■ 종이에 물주는 남자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김명진 * 협동조합 온리 - 전북 전주시 완산구 향교길 69 - 063-282-0028http://wisdom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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