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혈
사적 134호로 지정되어 있는 유적.
고·양·부 세 신인이 솟아났다는 곳.
삼성혈은
제주시 이도 1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134호로
지정되어 있는 유적이다.
고.양.부 삼성이
시조인 고을나.양을나.부을나 세 신인이
솟아났다는 곳이다.
삼성혈은
지상에 파인 세 구멍으로 되어 있는데, 구멍은
品字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둘레가 6자이고 깊이는 바다까지 통한다고 전해지며 나머지 구멍은
둘레가 각각 3자인데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흔적만 남아 있다.
위쪽 구멍은 고을나,
왼쪽 구멍은 양을나, 오른쪽 구멍은 부을나가
솟아난 곳이라 전한다.
삼성혈은
그 주위의 7,987평이 성역화되어 있다.
그 시초는 조선 시대인
1526년(중종 21년) 李壽童 목사가 그 주위에
돌 울타리를 쌓고 穴 북쪽에 紅門과 穴碑를 세워 삼성의 후예로 하여금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祭禮는
鄕校의 釋奠과 같이 제복을 갖추어 매년 4월 10일에 춘제,
10월 10일에 추제를 지낸다.
춘, 추제의 삼관헌은
고.양.부 3성씨가 윤번제로 하고, 12월 10일 건시제는
제주 도민제로 모시는데 초헌관은 지방 장관, 아헌관과 종헌관은 기관장이나
유지 중에서 선정한다.
춘, 추제는
삼을나와 신라에 입조하여 星主, 王子, 都內의
작위를 받은 高厚, 高淸, 高季의 위패를 모신 삼성전에서 지내고, 건시제는
穴壇에서 지내므로 穴祭라고도 한다.
제주시 중심에 위치한 삼성혈에서 고, 양, 부 삼신인의 탄생과 함께 시작 된다. 국가 지정 사적 제134호로 정된 삼성혈은 7,097평의 울창한 숲속에 혈단을 중심으로 탐라시조 삼으라의 위패가 봉안된 삼성전과 분향소, 제향을 받드는 전사청, 서원이었던 숭보당이 들어서 있다.
신화의 섬인 제주도에는 개국신화인 삼성신화가 전해 내려온다. 이 신화는 제주시 중심에 위치한 삼성혈에서 고, 양, 부 삼신인의 탄생과 함께 시작 된다.
국가 지정 사적 제134호로 정된 삼성혈은 7,097평의 울창한 숲속에 혈단을 중심으로 탐라시조 삼으라의 위패가 봉안된 삼성전과 분향소, 제향을 받드는 전사청, 서원이었던 숭보당이 들어서 있다.
<영주지> <고려사 지리지>등의 옛 문헌에 의하면 삼성혈에서 용출한 삼신인은 수렵생활로 '피의육식'하다가 오곡의 종자와 송아지, 망아지 등 육축을 가지고 온 동해 벽랑국 삼공주를 배필로 맞이 하여 땅을 정한 후 농경생활과 함께 생활터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지상에 파인 세개의 구멍은 품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느데, 그 가운데 한나는 둘레가 6자이고 깊이는 바다까지 통한다고 한다. 나머니 둘은 둘레가 각각 3자이나 오랜세월로 말미암아 지금은 흔적만이 남아 있다.
이곳이 성역화되기 시작한 것은 1526년(중종 21)에 이수동 목사가 삼성혈 주의에 석단을 쌓고 혈 북쪽에 홍문과 혈비를 세워 삼성의 후예들에서 춘추제를 지내게 하고 매년 11월 상정일에 도민들이 현제를 봉행하게 한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이후 유한면 절제사(1698), 이형사 절제사(1702), 양세현 방어사(1772), 이행교 방어사(1827), 장인식 방어사(1849)가 삼을 나묘(삼성전), 전사청 숭보당 등을 건립하거나 혈주의에 축성, 식목함으로써 오늘날의 구모가 같추어졌다.
현재 매년 4월10일과 10월 10일에 춘추대제를 후손들이 봉향하고, 12월 10에는 건시대제가 혈단에서 행재지고 있다.
조선시대까지 국가적인 제사 였다가 지금은 제주도 지방제로 봉향되고 있는 건시대제의 초헌관은 제주도지사, 아헌관과 종헌관은 지역 유지중에서 추천된인사가 맡고 있다.
삼성신화와 관련된 곳으로 삼성혈 이외에도 삼사석, 쌀손장오리, 혼인지, 혼인포(황루알) 등이 있다.
제주도에는 삼성혈이라고 하는 구덩이 3개가 있다.(그러나 자료 사진에는 뚜렷이 남아있는 구덩이를 실제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찾아낼 수 없었다.) 이는 선사시대에 고을나, 부을나, 양을나라고 하는 3명의 남자가 난데없이 용출, 즉 튀어나왔으며 이들은 수렵생활을 하다가 벽랑국에서 오곡의 씨앗을 가지고 온 세 공주와 결혼하여 제주도를 삼분하여 통치하였으며, 이들이 탐라국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이상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3명의 시조가 나타났다는 때는 바로 단군 왕검이 등장한 시기와 비슷하다고 하는데, 이 때 대쥬신제국(혹은 대환국)은 유라시아 반도 전체에 걸친 거대한 판도를 자랑하고 있었으며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장악하여 수밀이국이라는 괴뢰정권까지 수립하여 조종하고 있었다. 또한 태평양 방면에는 무 대륙에 위치한 무 제국이 일본까지 판도를 장악하고 있었다.(특히 일본인들의 독특한 유전형질이 무 제국에서 유래한 것임을 서양의 역사학자들이 밝혀낸 바 있다.) 그런데 그런 초고도 고대 문명 사이에 끼여 완벽한 중계무역의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던 제주도에서 시조가 피의육식(가죽으로 옷지어 입고 고기를 먹음) 같은 석기시대 수렵을 하다니 말이나 될법한 일인가? 때문에 우리는 이런 시조설화의 행간을 읽을 줄 알아야 하는 법이요, 기록된 역사는 승자의 역사이므로 한번 쯤 뒤집어서 생각해 볼 일이다.
분명히 당시 제주도는 무 제국과 대환국 사이의 중계무역으로 양쪽의 문화를 받아들여 위대한 문명을 건설하였을 것이다. 지금 제주도의 특산물로 남아있는 돌하루방은 당시에 제주도에 건설되었을 해상왕국인 탐라제국의 기동병기인 거신병들을 묘사한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에는 이러한 탐라제국의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철조망 대신 탐라제국이 사용하던 레이져 차단벽의 모습이 정낭으로, 군수보급을 위한 8차선 포장도로가 올래로 남아 있는 정도이다. 어떻게 이러한 강력한 해상왕국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일까. 우리는 그 의문을 이 삼성혈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 상식상 사람이 바닥에서 갑자기 솟아날 수는 없다. 하지만 상식을 넘어서 초끈 이론과 차원간의 공간에 대한 이론을 살펴볼 때 우리는 한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로 탐라제국에 난입한 세 명은 바로 이계에서 난입한 고등학생들이라는 것이다.
이계에서 고등학생이 한 명만 난입해도 세계 멸망의 위기가 오는데 동시에 3명이나 유입되었으니 제국이 버텨낼 리 없다. 이들이 초반에 피의육식했다는 말은 탐라제국을 이 셋이 거의 파괴하였다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탐라제국을 사실상 파괴하고 제주도 전역을 장악한 이들은, 이계에서 난입한 고등학생들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질환인 중2병에 걸려 있던 것으로 보이며, 또한 그 부작용으로 일본을 증오하는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때문에 이들은 일본, 즉 벽랑국을 침공, 철두철미하게 파괴하고 여자를 납치하여 겁탈하고 곡식을 약탈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무 제국의 서쪽 국경이나 다름없었던 일본은 완전히 파괴되어 석기 시대로 회귀하였으며 그 때문에 후에 백제와 신라에서 문물이 전해질 때까지 문명 발달의 길이 막혀버렸다.
하지만 자국의 변방이 침공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정도로 무 제국이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무 제국의 대규모 병력이 탐라제국을 침공했으며 곳곳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고깽 3명을 상대하기에는 무 제국은 너무나도 무력했다. 제주도에는 이들 삼성인이 한 오름에서 화살을 쏘아 화살이 떨어진 곳에 정착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데, 화살은 평화로운 정착이라는 묘사에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다. 때문에 화살은 원정군을 묘사한 것이며, 화살을 높은 곳에서 쏴 떨어진 곳에 정착하였다는 것은 탐라제국의 원정군이 3로로 나뉘어 무 제국을 침공해였다는 것을 뜻한다. 이들 이고깽에 의해서 무 제국의 영화는 완전히 파괴되어 전설 속으로 사라졌으며 이고깽들은 그에 그치지 않고 무 제국의 지반을 파괴하여 제국 전체를 태평양의 물 속에 가라앉혀 버렸다.
하지만 무 제국의 몰락은 탐라제국에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대환국과 무제국을 중계함으로서 얻어졌던 수익들이 사라졌고, 결국 탐라제국은 대환국, 즉 대쥬신제국을 약탈함으로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대환국이 중국의 한족들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무너지고 한반도에서 삼국시대가 시작되었을 때에도 이런 탐라제국의 강성함은 빛이 바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백제는 나라의 멸망을 우려하여 산동반도로 진출하여 대륙백제라는 탈출구를 확보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역사에 보면 백제와 왜군이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같은 민족이 백제가 어찌 동족인 신라를 다른 나라의 군대를 동원하여 쳤을 것인가. 분명히 백제는 당시 강성하던 탐라제국과 연합하였을 것일진데, 일제 시대에 식민사학자들이 한민족은 타국의 군대를 동원하여 같은 민족을 공격한 모래알 같은 민족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탐라제국의 군대를 왜군으로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이러한 탐라제국의 강성함은 삼성인이 죽고 계속해서 약화되는데, 고려 시대에 탐라국이 고려에 복속됨으로서 그들의 영화는 끝이 났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새로운 문제가 일어났으니 탐라제국의 위세로 그 동안 억울려 있던 왜구들이 바다에서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문에 왜구들이 강성하여 결국 임진왜란까지 이어지고 말았으니, 탐라제국의 과거의 위세가 참으로 그립지 아니하다 할 수 없다.
[출처] 제주 삼성혈|작성자 화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