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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전투

우리나라의 역사를 흔히 전쟁의 역사라고 말한다. 그만큼 우리 역사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쟁 중 대규모 전투나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강을 배경으로 전개된 경우가 많았다.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전쟁이었던 6·25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던 다부동지구 또한 낙동강을 놓고 북한군에 맞서 국군과 유엔군이 치열하게 싸웠던 곳이다.

당시 왜관전투와 함께 낙동강을 끼고 남북 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다부동은 경북 칠곡군 유학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다부원’이라는 역참이 자리했던 곳인데, 지형적 특징 때문에 피의 전쟁터가 됐다. 다부동 서북쪽에는 유학산, 동쪽으로는 가산이 있다.

당시 국군의 입장에서는 이 두 산이 북한군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방어하기에 유리한 고지였고, 북한도 이 산들의 지형적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에 총력전을 벌였다. 시간을 되돌려 57년 전 다부동으로 전사여행을 떠나보자. 1950년 6월 25일 기습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의 최종 목표는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7월 말까지만 해도 인민군의 목표는 순조롭게 달성되는 듯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점령하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인민군이 그동안 전투력 소진을 보충하지 못한 반면, 국군·유엔군은 점차 전투력을 회복해 낙동강 선에서 강력히 맞선 것이다. 당시 대구는 대한민국 정부와 각군 본부 및 미8군이 위치하고 있는 핵심 지역이었으며, 본토의 8%만을 확보한 곳으로 더 이상 밀렸다가는 반격할 공간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국군1사단은 위기를 타개하고 계획된 방어선을 회복하기 위해 배속된 미25사단 27연대와 연합으로 적진 돌파작전을 전개했다. 사실 이때의 연합작전이 한미 간 이뤄진 최초의 연합작전이었다. 이때 국군1사단에서는 매일 평균 600~700명의 인원 손실이 발생, 병력이 감소하자 신병·학도병으로 이를 보충했다. 이로 인해 중대장이나 소대원이 부하들의 이름은 물론 얼굴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또 1개 대대 평균 50~60명의 노무자가 배치돼 전투원의 식사를 비롯한 보급품과 탄약을 지게에 지고 최전방까지 운반하고 부상자를 후송했다. 이와 같이 육군과 미8군의 총력적인 지원에 힘입은 국군1사단과 미27연대의 혼성부대는 점차 적의 돌파구 확대를 저지하면서 방어지역을 안정시켰다.

이후 치열한 공방 끝에 8월 23일, 국군1사단은 마침내 방어지역을 안정시키고 작전의 주도권을 행사하게 됐다. 다부동 지역에서 승리를 거둔 국군1사단은 유엔군 병력 증원에 따라 8월 하순 다부동 지역을 미1기병사단에 인계한 후 팔공산 북쪽으로 이동했다.북한군의 8월 공세 기간 중 국군·유엔군 1만여 명, 북한군 3만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다부동 일대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이처럼 치열했던 다부동지구 전투로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킬 수 있었고 이는 인천상륙작전을 통한 반격의 발판이 됐다.현재는 이곳에 당시의 전투 상황을 설명하는 ‘다부동 전적기념관’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이 게시물은 master님에 의해 2015-04-07 14:43:41 블로그광장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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