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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맛 살리는 귀한향신료 후추
15-04-07 14:53

막강한 제국을 건설한 로마의 귀족과 부자들은 고기를 먹을 때도, 채소를 먹을 때도 후추로 범벅을 했다. 아무나 못 먹는 귀한 향신료였기 때문이다. 당시 후추는 멀리 인도에서 아랍을 거쳐 가져온 조미료였기에 가격이 거의 금값과 맞먹었다. 아니, 같은 무게의 금보다 오히려 후추가 귀했을 정도였다는데 부자들이 찾는 향신료였기에 금보다도 환금성이 더 좋았다. 그래서 전쟁에서 패하면 배상금으로 막대한 양의 후추를 물어주기도 했다.

 로마제국이 멸망하기 전, 북방의 게르만족이 수시로 로마를 침공했다. 서기 408년, 도나우 강변에 살던 서고트 족의 왕 알라리크 1세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로마를 포위했다. 그리고 황제 호노리우스에게 물리적 보상을 해주면 로마를 파괴하거나 약탈하지 않고 곱게 물러나겠다며 싸울 것인지 보상을 하고 로마를 보전할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강요했다.

 이때 알라리크 1세 왕이 보상금으로 요구한 것이 황금 5000파운드와 후추 5000파운드였다. 황금과 같은 규모의 후추를 요구한 것인데 당시 후추의 가치가 황금과 맞먹었기 때문이다.

 지금 식탁에 놓인 후추는 그저 조미료에 불과하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인류는 후추 때문에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후추를 얻는 자가, 후추를 얻는 나라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로마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전쟁사와 경제사의 핵심에는 후추가 있었다. 후추 한 알이 같은 무게의 금값과 같은 가격이었으니 지금은 석유를 검은 황금이라고 부르지만 근세 이전까지는 후추가 검은 황금이었다.

 전쟁의 원인은 복합적이기 때문에 다각도의 해석이 가능하다. 십자군 전쟁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유럽과 아랍 세계의 충돌이고 종교적으로는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이다. 명분은 그렇지만 내면에는 경제적 측면도 중요하다. 부유한 아랍경제에 대한 가난한 유럽경제의 도전이었는데 사실 십자군 전쟁 내막에는 경제적 이익이 도사리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의 기사, 상인, 농민들은 돈을 보고 전쟁에 뛰어들었는데 그중에는 후추를 포함한 향신료도 포함돼 있었다.

 1101년,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제노아에서는 승리하고 돌아온 군인에게 보너스로 후추 1㎏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후추 값은 금값과 비슷했다고 하니까 요즘 시세로는 7000만 원쯤 된다. 12세기 물가수준으로 보면 팔자를 고치고도 남을 만한 금액이었으니 돈을 보고 전쟁에 뛰어드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후추는 개인뿐만 아니라 나라의 팔자도 고쳤다. 옛날 후추의 주생산지는 인도였고 육로를 통해 아랍까지 운반한 후에 지중해 바닷길을 통해 유럽으로 전해졌다. 르네상스 이전,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였던 베니스가 유럽에서 경제적 중심지가 된 배경도 바로 후추 운송로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지중해의 제해권을 확보했던 베니스는 아랍세계와의 후추무역을 독점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유럽의 중심지로 세상을 지배하던 베니스는 15세기 말부터 패권을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넘기는데 그 배경에도 후추가 있었다. 몽골제국의 세력이 무너지고 오토만 제국이 떠오르는 과정에서 아랍세계는 부족과의 다툼으로 전쟁이 그치질 않았다. 결과적으로 인도에서부터 아랍을 잇는 후추의 육상 운송 루트가 불안정해지면서 아랍 상인들이 후추 가격을 대폭 인상했다. 육로로 아랍에 전해진 후추를 지중해를 통해 유럽으로 운송하면서 무역 강국이 된 베니스의 입지가 좁아졌다.

 이 틈을 이용해 포르투갈이 유럽과 인도를 직접 잇는 해상 운송로를 개척했다. 그뿐만 아니라 인도의 케랄라를 비롯해 인도 남부의 후추 산지를 장악하고 있던 아랍세력과 전쟁을 벌여 이들을 축출한다. 후추무역의 주도권이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포르투갈로 옮겨지면서 포르투갈이 경제적 부를 축적하며 유럽의 신흥 세력으로 떠올랐다.

 당시 포르투갈 이사벨 공주는 아들 찰스의 결혼식 때 재력을 과시하려고 후추 290파운드를 식장에 쌓아 놓았다고 한다. 1545년 지중해에서 침몰한 영국 선박을 인양하자 익사한 선원들 대부분의 몸에서 후추가 한 주먹씩 나왔는데 배가 가라앉기 직전, 혼란에 빠진 선원들이 배에서 가장 값비싼 물건을 챙겨 넣었기 때문이었다. 후추가 값비싼 물건의 대명사였던 것이다.

 베니스로부터 제해권을 빼앗아 후추무역을 독점했지만 포르투갈의 해상 운송로 역시 불안정했다. 연안의 근거리 항로를 통해 인도로 가야 했기에 수시로 아랍의 공격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안전한 해상 운송로를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를 도는 장거리 항로 개척에 나섰고 그 결과가 바스쿠 다가마의 대항로 개척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도착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후추 값이 폭락한다. 후추의 대량 수입과 대용품 고추의 전래로 후추 수요가 급격히 줄면서 후추는 ‘검은 황금’에서 평범한 조미료 중 하나가 됐다.

 출처: 국방일보 <윤덕노 음식문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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