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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창부채 단오선, 우리 나라 부채는 국교품(國交品)으로서 일찍이 사절편에 중국을 비롯하여 몽고·일본 등 여러 나라에 진출되었다.
 

거창부채 단오선
 
부채를 하사하는 연원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 명나라 사람 이후(李詡)가 쓴계암만필(戒菴漫筆)에 “단오에 임금이 서울 관리들에게 궁중 부채를 하사하는데, 그 부채는 댓살에 종이를 바르고 새나 짐승을 그리며, 오색 천으로 애호(艾虎)를 감는다. 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 서울의 옛 풍속에 “단오의 부채는 관원이 아전에게 나누어주고 동짓날의 달력은 아전이 관원에게 바친다. 는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시대 공조(工曹)에서 부채를 만들어 바치면 임금은 이것을 각 궁()에 속한 재상과 시종들에게 하사했다.조선왕조실록에는 단오진선(端午進扇)과 단오사선(端午賜扇)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단오진선이란 주로 단오날 왕이 하사하기 위하여 부채의 명산지인 경상도와 전라도의 방백(方伯)들에게 명하여 궁중에 바치는 부채를 말한다. 광해군 8 5월에 왕이 명하여 단오진선의 유선(油扇)을 경상도·전라도의 감사에게 올리게 하였다.
단오사선이란 단오날 궁중에서 왕이 신하들에게 하사하는 부채를 말한다. 선조 37 5월 단오절에 승정원(承政院)·홍문관(弘文館)·실록교정청(實錄校正廳)의 관원들에게 주찬(酒饌)과 부채를 하사했으며, 인조 15 5월에는 왕이 안주(安州)의 군병들에게 부채 370자루를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대나무 생산지인 전라도와 경상도의 감사와 통제사는 임금에게 명절 부채를 진상하고 예절에 따라 조정의 대신들과 친척, 친우들에게 선사한다. 부채를 만드는 고을의 수령들도 역시 임금에게 진상하고 친우들에게 선사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기록에 의하면 왕이 하사한 부채 중에는 흰 댓살이 40개 내지 50개나 되는 매우 큰 것이 있는데, 이것은 백첩선(白貼扇)이라고 하며 옷칠을 한 부채는 칠첩선(漆貼扇)이라고 했다. 이것을 받은 사람들은 대개 흰 종이에 금강산 일만 이천 봉우리를 그려 넣는다.
 
부채(夫菜)는 경기도 에서 대전, 왕대비전, 혜경궁, 중궁전, 세자궁에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공선정례에 기록되어있다.
 
우리 나라에는 10세기(고려 초)에 이미 부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견훤이 고려 태조에게 공작선을 보냈다는 이 기록은 고려사에도 보인다. 공작선은 남방의 여러 나라에서도 공작의 깃으로 둥근 부채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견훤이 하례품으로 주었던 공작선도 둥근 부채(방구부채)였다고 보인다.
 
 접는 부채(접부채)가 우리 나라에 있은 기록은 송나라 사람 곽약허(郭若虛)도화견문지 圖畫見聞志에 고려사신 최사훈(崔思訓) 1076년 신종 희녕 병진년(문종 30)에 접는 부채[摺疊扇]를 사용하였다고 한 것을 보아, 접는부채가 11세기 중엽에는 우리 나라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들로 볼 때 방구 부채는 중국이 그 역사가 오래고, 접는 부채는 일본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접는 부채는 일본 것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 우리 나라 사람이 그를 모방하여 우리의 재료로써 우리 식대로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 나라 부채는 국교품(國交品)으로서 일찍이 사절편에 중국을 비롯하여 몽고·일본 등 여러 나라에 진출되었다. 이에 대하여서는 고려사,고려도경 高麗圖經,조선왕조실록,임하필기林下筆記,열하일기, 오주연문장전산고,지봉유설,주영편 晝永編,열양세시기 洌陽歲時記, 계림지 鷄林志등에 보인다. 화계 畫繼,춘풍당수필 春風堂隨筆,남산묵담 南山墨談,장해동집 張海東集 등 여러 문헌에도 보인다. 고려사에는 1232(고종 19) 4월에 상장군 조숙창(趙叔昌) 등을 원나라에 사신으로 보냈을 때, 헌물(獻物) 중에 화입선(畫入扇)을 보낸 일이 있다. 장해동집에 의하면 중국에는 옛날에 접부채가 없었다 하였다.
유원경(劉元卿)현혁편 賢奕編에는 접부채는 일명 살선(撒扇)이라고 하니, 살선은 영락연간에 조선국이 살선을 진상한 데서 비롯되었다.
봉창속록 蓬窓續錄에는 접부채를 영락연간에 조선에서 진상하므로 나라 안에 성히 사용되었다 한다. 이러한 기록은 명나라 사람 육심(陸深)춘풍당수필과 방이지(方以智)통아 通雅등에도 보인다.
청나라 사람 고사기(高士奇)천록식여 天祿識餘에는 청나라 때에 와서는 우리 나라의 접부채가 크게 유행되어 중국의 방구 부채[團扇]는 그 당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 10 4월에 왕은 명나라 사신에게 흰 접부채 100자루를 주었고, 세종 2 4월에도 명나라 사신에게 흰 접부채 100자루를 주었다고 한다.
세종 8 5월에는 명나라 사신이 부채를 구하므로 왕은 방구부채 10자루, 접부채 88자루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또 단종 즉위년(1452) 11월에 명나라 사신 김유(金宥)에게 접부채 50자루를 회사품(回賜品)으로 보냈고, 세조 14 4월에는 왕이 명나라 사신에게 접부채 103자루와 깃부채[羽扇]를 주었다.
광해군 14(1622) 4월에도 명나라 사신 및 수행원들에게 흰 부채[白扇] 224자루, 기름먹인 부채[油扇] 1,830자루와 흰 부채 1,800자루, 기름먹인 부채 9,000자루를 여러 차례에 걸쳐 증답(贈答)의 명목으로 보냈다는 것이 보인다. 특히 우리 나라 접부채는 중국 송나라 때부터 비롯하여 원·명·청대에 이르기까지 주로 국교품으로서 많은 수량이 진출되었다.
통문관지 通文館志에는 조선시대에 우리 나라 사신 세 사람이 일본에 갔을 때에도 국교품으로서 부채를 가져갔다. 선물처와 수량을 적어보면, 대마도 관계로는 부채 215자루와 대첩선(大貼扇) 3자루, 대판(大阪)·경도(京都) 관계로는 부채 215자루, 에도(江戶 : 지금의 東京) 관계로는 부채 60자루, 백첩선(白貼扇) 8자루, 첩선(貼扇) 36자루이다.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3(1421) 7월에 부채 20자루가 다이라노(平滿景)로부터, 1426년에는 접부채100자루가 이시시로관사(石城管事) 쇼카네(宗金)로부터 세종에게 보내왔다.
1434년에는 갑선(匣扇) 1백자루가 아시카가(足利義敎)로부터, 1440 12월에는 채화선(彩花扇) 100자루를 역시 아시카가가 세종에게 보내왔고, 성종 5(1474)에는 부채 100자루를 아시카가(足利義政), 14758월에는 부채 1백자루가 아시카가(足利義尙)로부터 성종에게 보내왔다.
선조 40(1607)에는 부채 100자루가 도쿠가와(德川秀忠)로부터 선조에게 보내왔다. 그리고 인조 14(1636) 3월에는 금은선(金銀扇) 200자루를 일본의 봉행(奉行)으로부터 조선 사신에게 보내왔다.
,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10년 윤4월조에는 왜선(倭扇) 400자루를 전라도로부터 봉진(封進)하게 하였다는 기사도 보인다. 이와 같이 일본 부채 또한 상당한 수량이 우리 나라에 들어왔던 것이다.
 
진상품 관련이야기
•㉠군기를 강화부의 별고에 저장하고 나서 유수에게 하유하기를, “…단오선 1천 병…목환자 1만 개 등을 신축년 별치조의 명목으로 특별히 차정한 별군직 신응주가 표신을 받들고 겸하여 물건을 영수해 내려가니, 경은 숫자를 대조하여 영수하고, 별군직과 입회하여 별고에 저장한 다음 그 형지를 장계로 아뢰라.” 하였다. ; 藏儲軍器于江華府別庫 諭留守曰…端午扇一千柄…木子一萬箇等 名以辛丑別置條 別定別軍職申應周奉標信 兼領物件下去 卿其照數領受 與別軍職眼同 藏于別庫後 形止狀聞 [정조실록 권제12, 78장 앞쪽~뒤쪽, 정조 5 12 19(정해)]
㉡공조에서는 단오부채를 만들어 진상한다. 그러면 임금은 그 부채를 각 궁가와 재상, 시종신들에게 나누어 준다. 부채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대나무로 만든 살의 폭이 화살 크기만 한데, 40개 내지 50개나 된다. 이것을 백첩이라 하고, 옻칠을 한 것을 칠첩이라 한다. 이 부채를 받은 사람은 대부분 부채에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 그림을 그리며, 혹은 기생이나 무녀들이 갖는 부채에는 근래의 풍속에 복사꽃•연꽃•나비꽃•은어•백로 등의 그림들을 즐겨 그렸다. ; 工曹造進端午扇 頒于宮掖宰執侍從 扇之絶大者 竹幅白矢滿五十四十 名曰白貼着漆者名曰漆貼 得此者 多畫金剛一萬二千峯 或爲倡巫所把 近俗喜寫折技桃花芙蓉 蝴蝶銀鷺鶿 [동국세시기 5월 단오]
 
상품정보
 
단오선
한자: 端午扇
분야: 생활/민속·인류
성격: 부채
재질: 종이|대나무|()|구슬
용도: 단오날 임금이 신하들에게 하사한 물품
부채는 축재 또는 뇌물로서도 효용이 컸다. 성종 24 10월 대사헌 허침이 임금에게 사치를 경계토록 하는 상주에 “부채 값이 무명 8~9동에 이르고 있다.”라는 대목이 있다. 무명 1동이 50필이므로 400~500필이나 되는 고가의 부채가 있었다는 것이다.수령이나 무관 등은 반드시 부채를 휴대했는데 이는 더위를 쫓기 위해서가 아니라 손가락 대신 지시, 지휘하기 위한 도구였다. 부채를 내리침으로써 응징 또는 견책을 표하고, 접었다 폈다 함으로써 아랫사람에게 불편한 심기를 나타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즉위하자, 견훤이 하신(賀臣 : 축하의 뜻을 전하는 신하)을 보내 축하하고 왕 3년에는 공작선을 바쳤다. 이는 견훤이 고려 태조의 통치권을 인정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부챗살은 10골에서 60골까지 다양하다. 단옷날을 앞두고 임금에게 부채가 진상되면 임금은 그 부채를 신하들에게 하사했는데, 벼슬의 품수에 따라 부챗살의 골수를 맞추어 냈다. 따라서 부챗살이 촘촘하고 성긴 정도로 벼슬과 신분을 어림할 수 있었다.
 
정선 「도서여가」의 일부한 선비가 부채를 들고 마루에 앉아 꽃을 보고 있다.
부챗살의 골수뿐 아니라 부채 끝에 다는 패물로도 신분을 식별했다. 비취나 호박, 서각(犀角) 등을 단 것은 품수가 높고, 옥이나 쇠뿔이면 중간, 쇠붙이면 낮은 신분이었다. 3품 이상의 벼슬아치에게 하사하는 부채에는 내의원에서 만든 옥주단에 구멍을 뚫어 다는데, 가지고 다니다가 복통이나 곽란 등이 생기면 이 선초(扇貂)의 옥주단을 긁어 타 마심으로써 응급 처치를 하였다.민요에 “가을에 곡식 팔아 첩을 사고 오뉴월이 되니 첩을 팔아 부채 산다.”라는 가사가 있다. 여름에는 무엇보다 부채가 제일임을 표현한 것이다.
 
부체의 변천과정
임하필기 각양선자조(各樣扇子條)에는 영조 때의 부채 가운데에 승두선(僧頭扇)이라는 부채가 있었는데, 대개 그 살에 옻칠을 하고 두꺼운 종이로 붙인 뒤 파란 줄로 선을 둘렀으며, 길이가 한자 남짓하며, 그 모양이 사치스럽고도 견고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부채도 시속에 따라 그 모양이 새로 만들어지고, 얼마간 계속되다가는 폐하여 없어지고 하여, 변천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경국대전 공전(工典)에 의하면 경공장(京工匠)에는 첩선장(貼扇匠) 네 사람, 전라도에는 선자장(扇子匠) 두 사람, 경상도에는 선자장 여섯 사람을 두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전라도에서보다 경상도에서 부채 만드는 일이 성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부채는 그 외양이나 품질에 있어서 전라도의 남평과 전주에서 나오는 것을 제일로 쳐주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 팔로이병(八路利病) 변증설 중에는 감영과 병영에서 만든 부채 외에 남평의 부채를 제일로 친다 하였고, 동국세시기 5월 단오조에도 전주와 남평에서 만든 것이 가장 좋다 하였다. 그러므로 그 전통이 아직도 남아 있어, 오늘날에도 그 지방에서는 적지않은 부채가 생산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그 품질에 있어서는 예전 것만 못하다.
동국선제변증설 東國扇制辨證說에는 선추는 중국 송나라 때부터 전하여 내려온 것이라 하였다. 명나라 사람 사조제(謝肇)오잡조 五雜俎에는 선추가 당대(唐代) 이전부터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송나라 고종이 신하들과 더불어 잔치할 때 장순왕(張循王)의 부채를 보았는데 그 부채에 선추가 있었다 하여, 송나라 때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2 2월조에는 왕은 공조에 명하여 이제부터는 단오진상의 접부채에는 금·은을 사용하지 말라고 한 기사가 있다. 이는 부채고리 또는 선추에 사용되는 금·은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성종 24 10월조에는 당시 부채 한 자루 값이 목면 400필이라 하였으니 부채가 대단한 사치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부채 자체의 값보다도 그 부채에 달린 선추의 장식품값에서 기인되었던 것이다. 그 장식에 금·은·주옥 등을 사용하여 실용품 또는 기완품(奇玩品)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축재의 뜻을 가졌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당시 선추가 발달되었던 까닭은 이러한 데 있었던 것 같다.
 
관련근거 및 출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홍석모 지음, 정승모 풀어씀, 풀빛, 2009),『한국 부채의 연구』(최상수한국기념도서출판협회,1972),한국민속대백과,두산백과, (한국고전용어사전,2001.3.30,세종대왕기념사업회),『계암만필(戒菴漫筆)』『조선왕조실록』『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공선정례,≪고려사≫ ≪도화견문지 圖畫見聞志≫≪고려사≫ ≪장해동집≫ ≪현혁편 賢奕編≫.≪봉창속록 蓬窓續錄≫ ≪춘풍당수필≫ ≪천록식여 天祿識餘≫ ≪조선왕조실록≫≪통문관지 通文館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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