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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유기, 방짜유기, 유철(鍮鐵), 안성약기(安城略記),주물유기
 

안성유기(安城 鍮器)
안성유기는 청동기시대부터 제작되었던 것인데, 유기(鍮器)는 놋그릇을 가리키는 다른 말이다. ‘유기(鍮器)’란 좁은 의미로는 놋쇠로 만든 그릇이란 말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동()을 기본으로 하는 비철금속의 합금으로 만든 여러 가지 기물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놋쇠는 구리 78%에 주석 22%, 즉 동 1(600g)에 주석 4냥 반(168.7g)을 배합한 것으로, 유철(鍮鐵)이라고도 말한다.
 이 배합 비율은 방짜유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배합비율이며, 주물유기를 만들 때는 그 비율이 약간씩 달라진다.
우리나라에서 유기를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넓은 의미에서 동합금의 일종인 청동기 시대의 동검이나 동경 같은 물건으로 보아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청동기 시대의 청동제품은 일반인에게까지 보편화 된 것이 아니라 부족장이나 제사장 등 특별한 경우에 그 권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그 후 철기시대를 거쳐 삼국시대에 이르러 사용이 확대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주로 불교와 관련되어 불상, 범종, 반자 등을 청동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불교에서 뿐만 아니라 제기, 수저, 밥그릇, 향로, 타구, 명기(明器) 등 생활의 전반에 걸쳐서 동제품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나 역시 주로 상류층에서 사용하였다.
 유기가 일반대중들에게까지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이다. 서유구(徐有榘)가 지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는 조선시대에 유기로 유명한 곳은 안성을 위시하여 개성, 납청, 구례, 진주, 재령, 은산, 함흥, 운천, 순천, 봉화, 김천 등지가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단연코 안성유기가 가장 으뜸이라 하였고, 안성약기(安城略記)에서는 안성은 유기가 명산인데 그것은 견고하고 정교하여 전국에서 환영받았다고 하였다.
 안성은 유기가 유명하여안성맞춤이라는 속담까지 나올 정도였다. ‘안성맞춤이라는 말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아는 말일 것이다. 지금은 유기 뿐 만 아니라 무엇이든 조건이나 상황이 마음에 딱 맞을 때안성맞춤이라는 말을 쓰는데 비단 안성 뿐 만 아니라 전국 어디에서도 사용한다.
 안성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이 지역의 특산품인 유기(鍮器, 놋그릇). 안성 유기가 다른 지방의 것보다 유명한 까닭은 서울 양반가들의 그릇을 도맡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안성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유기를 만들어 판매했는데 하나는 서민들이 사용하는 그릇으로 이것을장내기라고 했다.
 다른 하나는 관청이나 양반가의 주문을 받아 특별히 품질과 모양을 좋게 만들었는데 이를모춤(맞춤)’고 한다. 안성 유기그릇은 제작 기법이 정교해 당시 양반들이 선호하던 작고 아담한 그릇을 만드는데 적합할 뿐 아니라 합금 기술이 뛰어나 견고하고 광채가 우수했다. 이렇게 장인정신과 뛰어난 솜씨로 정성껏 만들어 품질이나 모양 등 기교면에서 사람들의 마음에 꼭 들었는데 바로 여기서 안성유기를 대표하는안성맞춤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안성유기의 종류
모든 공정이 수작업으로 진행되므로, 제작기간이 길고 대량생산이 힘들다. 공방에서는 안성의 중요무형문화재 77호인 김근수옹과 아들이 맥을 이어가고 있다. 안성유기는 사용 용도에 따라 제기용품, 생활용품, 반상기용품, 혼수용품 그리고 절에서 사용하는 용품 등으로 구분한다. 제기용품에는 제사 지낼 때 제물을 담는 그릇으로 대접, 제주잔과 제잔대, 접시, 적틀, 퇴줏그릇, 촛대, 향로 등이 있다. 또한 생활용품으로는 수저를 비롯해 주발, 보시기, 종지, 주걱, 담뱃대 등이 있다. 이밖에 학, 사슴, 마패 등이 안성 유기로 만들어져 장식품이나 관광용품으로 팔리고 있다.
 안성유기의 역사
안성에서 유기의 역사에 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으며, 그 중 언제 시작되었다고 하는 시원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아직까지 밝힐 수 없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택당 이식 선생이 천장(遷葬)과 관련하여 전라도에서 서울 쪽으로 올라오면서 안성의 유점(鍮店)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十八日丙寅 宿 天安 德竟店. 十九日 丁卯 宿 稷山懸. 二十日 戊辰宿 安城 鍮店. 二十一日 宿 竹山府).
자세한 기록은 아니지만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안성에서는 이미 1614년에는 유기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마을이 형성될 정도로 성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유점이 어딘지는 지금은 알 수가 없다.
 조선시대에는 중앙관청에서도 안성유기의 뛰어남을 인정하여 안성유기장을 징발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의궤에 잘 나타난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혼례식을 정리한 1744년 장조헌경후(莊祖獻敬后)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에 안성에 뛰어난 선수(善手) 유기장이 많이 있다는 기록과 함께 김태강, 김하로매 등 구체적인 장인의 이름까지 나온다(鍮器匠善手多在安城郡如乎其中金泰康金賀老味等捉來赴役亦縷縷白活爲).
 또 순조의 비인 순헌왕후의 장례식을 정리한 1857년의 순원왕후(純元王后) 국장도감의궤 (國葬都監儀軌)에도 안성유기장의 이름이나온다(祭器皿鑄成之役萬分時急而有善手匠人然後可以及期鑄成是如乎安城鍮匠中李景實鄭仁守李億哲李魯成崔武乭李宗祿裵漢甲金判孫嚴得天姜士弘李大吉全錫大). 이러한 사실로 보아 18세기 중반에 이미 안성의 유장들이 국가의 중요한 행사시에 불려갈 정도로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볼 수 있다.
 안성공원에는 많은 비석들을 모아 놓았는데 그 중 1841(헌종 7) 안성군수를 지낸 정만교의 선정비가 있다. 이 비석에 갓점, 연죽점, 숟가락점, 야점, 목수점 등 10여종의 수공업자 명단이 있는데 그 중 하나로 유점(鍮店)이 나온다(郡守鄭候晩敎永世不忘碑 / 我候淸白 千載爲上 孰不蒙惠 尤切工匠 / 鍮店 鑄店 匙店 笠店 烟竹店冶店 木手店 皮店 鞋店 馬鹿店). 이로 미루어 보면 이 당시는 군수의 불망비를 세워줄 정도로 수공업자들의 영향력이 강세였었고 그 중 유기점도 역시 강성했었다고 볼 수 있다.
 서유구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예규지(倪圭志) 4 화식조(貨殖條) 팔역물산(八域物産)에 안성장 물품목록 중에 유기를 거론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전국 장시 물목중 유기가 거래되는 장은 총 81군데로 이것만으로는 특별한 내용을 밝히기는 어렵다. 고문헌에서 볼 수 있는 안성에서 유기를 생산하였다는 구체적인 자료는 이정도이고, 일제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안성유기관련 내용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이상으로 보아 안성에서는 1600년대 초반에 이미 유기를 전문으로 만드는 마을이 형성될 정도로 유기산업이 발달해 있었으며, 1700년대 중반에는 국가에서도 인정하는 유기장들이 다수 거주하는 유기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5세기 후반 성종대의 경국대전에 나오는 외공장소속 유기장을 살펴보면, 경기도에서는 수원과 광주, 양주에 각 1명씩 있지만 안성에는 없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외공장 소속 장인이 없다는 말이 유기장이 없다는 말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관청소속 관장이 없었다는 말인지 사장(私匠)도 없었다는 말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최근 고고학적 성과로 안성유기의 역사를 짐작하게 해주는 자료가 발굴되었다. 2004년 안성시 죽산면 봉업사지에 대한 발굴조사결과 동종을 주조했던 주형시설로 추정되는 터가 발견되었다.(『高麗 王室寺刹奉業寺』, 경기도박물관 안성시, 2005, p50)
 이로 보아 통일신라에서 고려 사이의 시기에 안성에서도 이미 동제품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추정 주형유구에서는 바닥 조성에 사용된 기와 외에는 다른 유물이 출토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성격을 정확히 밝힐 수 없어 아직 학계의 논란이 있다.
 역사적으로 잘 유지되어 오던 안성유기는 일제침략으로 인하여 1941년부터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전국에 있는 유기를 거두어들임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어 일시에 안성유기가 없어지는 큰 수난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뜻있는 유기공들은 산으로 숨어들어 계속 유기를 만들었다. 전쟁 중에는 안성 유기가 별로 성행을 보지 못하여 5~6곳이 있을 정도였으며 대부분 일제의 눈을 피하여 산속 등지에서 숨어 제작하였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안성 유기는 갑자기 성행하여 안성시내 곳곳에서 유기업이 번성하였다. 이때는 식기류인 반상기를 중심으로 하여 수저, 젓가락, 담뱃대 등을 비롯하여 해방의 감격으로 급격히 성행한 농악기구까지 만들게 되었다. 본래 농악기구는 방자(놋쇠를 달군 후 두들겨 만드는 방법)식으로 제품을 만드는데 안성 유기의 특징은 주물제작법이었으므로 이때부터 안성유기에도 방자 제작법이 성행하여 안성유기의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안성유기도 거대한 생활 변화로 밀려오는 시련은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은 광복 후 반짝하고 빛나던 성황이 사라진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 생활에 있어서 연료의 변화가 온 것이다.
 본래 우리나라의 일반적 연료는 장작을 위주로 한 나무였다. 그러나 6.25가 지나고 대도시의 연료가 연탄으로 바뀌게 되었다. 주로 부엌에서 사용되는 놋식기는 연탄가스와 상극적인 관계가 있어 시뻘겋게 녹이 슬거나 누렇게 변해버려 곧 식기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유기 대신에 알루미늄 그릇이나 스텐레스 그릇으로 바꾸어 사용하게 되고 아울러 유기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6.25를 전후해서 안성의 유기는 절정을 이루는 듯 하여 그 공장의 수만도 37개나 되었으나 지금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계보를 잇고 있다.
 옛날 궁궐의 진상품이나 불상·종 등의 불교용품 또는 가정의 생활용품으로 널리 쓰이던 유기도 오늘날에는 스테인리스스틸 그릇이나 플라스틱 그릇에 밀려 사양길에 들어서고, 다만 전통 공예 미술품으로 전승되고 있는데, 현재 안성시 봉산의 유기장 기능보유자 김근수에 의하여 전통적인 유기 제작이 계승되고 있다.
 주물유기와 방짜유기
방짜란 쇳물을 녹여서 곱돌 위에다 부어바둑이라는 큰 쇳덩이를 만들어, 그것을 11명이 한조가 되어 계속 불에 달구어가며 망치로 매질을 하여 형태를 만드는 방식을 말한다. 무형문화재 제 77호 방짜유기장 이봉주 옹에 의하면 이 방짜 제작방식은 각 지방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른데 대개 남한에서는방짜라고 하고, 북한의 납청에서는 양대(良大)라고 하였다 한다.  양대란 말 그대로 좋고 큰 유기제품을 말한다.
평안북도 정주군 마산면 청정동과 납청 부근의 유기가 유명하여 안성유기와 쌍벽을 이루었는데, 납청지방에서는 특히 대야나 징 등 큰 유기제품을 많이 만들어서 납청유기를 다른 말로 양대유기라고 하였다. 이에 반하여 안성에서는 주로 밥그릇과 같은 식기류를 주로 만들어서 작고 아담한 것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봉주 옹은 이곳에서는 양대공장을놋점이라고 하였고, 주물공장을퉁점이라고 하였는데 납청에서는 예로부터 놋쇠와 퉁쇠를 확실히 구분하여 주문 및 판매를 했다고 한다.  김영호 선생은 1960년대 안성유기공업에 관한 조사 논문에서 안성과 납청의 유기 분업화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안성고노(安城古老) 들은 〈방자〉유기로 유명한 곳은 정주납청이었다고 하며, 안성에서는 납청의 〈방자〉유기에 눌리어 〈방자〉유기를 만들 수 없었다고 하고 납청에서는 안성〈붓배기〉유기에 눌리어 〈붓배기〉를 만들 수 없었다고 하니 어느 정도 지역적 분업이 행해진 것 같이 추측되었다.(「安城鍮器産業에 관한 調査硏究」, 『아세아연구 20호』, 金泳鎬, 1965. 12)
 붓배기는 안성에서, ‘방짜는 납청에서 만드는 것으로 분업이 되었다고 하였다. 실제로 무형문화재 제77호 주물유기장인 김근수 옹도 안성에서는 수저나 방짜로 만들었지 식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유기는 주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항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들어서의 일이다.
 1926년 동아일보 기사에 '안성유기에는 두드려서 만드는 방짜라는 것이 있고 부어서 만드는 붓백이라는 것이 있는데 외국물품이 들어오게 된 뒤로는 유기가 많이 쓰이지 않기 때문에 만들기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드는 방짜는 없어지고 붓백이만 만들게 되었으며(1926. 7. 2일자 동아일보 기사)' 라고 나와 있어 원래는 안성에도 방짜유기가 만들어졌으나 구한말을 기점으로 경제성이 떨어지는 방짜는 없어지고 붓백이라고 부르는 주물유기만 남아 지금까지 전해 옴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외국물품이란 일본산 사기와 도자기를 말한다.
출처: 서유구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예규지(倪圭志) 4 화식조(貨殖條) 팔역물산(八域物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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