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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용부 명인 우리의 몸짓과 소리 춤이 아닌 몸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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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슴이 허리 펴고 쉬는 백중날 영남춤
하용부는 한껏 춤추고 흥건하게 땀 흘리며 무대 뒤로 걸어 나올 때의 희열을 두고 ‘삶의 최고 정점’이라고 했다. 이런 그를 또다시 ‘삶의 최고 정점’으로 이끄는 순간이 있다.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공연장 로비에서 기다리다가 그의 양손을 부여잡으며, “아이고 하 선생, 조부님 춤사위를 내 생전에 다시 뵙게 될 줄이야” 하며 감격해하는 순간이다. 춤꾼 하보경이 그리우면 하용부를 찾는 이웃들이다. ‘그저 서 있기만 해도 춤이 된다’던 전설의 춤꾼 하보경 명인은 바로 하용부의 조부이자, 스승이다. 평생 한량으로 사셨던 조부님 따라서 배운 게 춤이라 하용부는 다섯 살에 이미 소싸움판에서 우승한 소 등짝에 올라 춤을 추며 박수를 받았다. 중학생 시절의 그는, ‘쇼쇼쇼’ 프로그램에서 예의 눈썰미로 파악한 최신댄스를 이튿날 뚝방 밑에 야외 전축을 틀어놓고 또래들에게 전수하던 춤꾼이었다. 고교생 시절에는 ‘어깨’들과 ‘형님동생’ 하느라 다섯 해를 보냈지만, 돌아보면 그 시간들조차 하용부의 춤사위를 더 옹골차게 만들어주었을 터다.

그의 선친은 북춤에 뛰어난 명무였으나 ‘부자지간에 어찌 한 판에서 놀 수 있겠느냐’며 춤꾼의 길을 포기했다. 대신, 하용부는 조부님 곁에서 1980년부터 ‘버들가지 흔들리듯’, ‘몸에 뼈다구 없이 추라’는 본격적인 가르침을 받으며 밀양백중놀이를 전수받았다. 생전에 ‘잘한다’는 칭찬 한 번 없던 조부님께서 1985년 용인민속촌 공연 당일, 당신의 옷을 내주시며 “용부야, 오늘은 니가 춰봐라” 하셨다. 공식 제자가 된 지 꼭 5년 만의 일이었다. 내 대신 무대에 오르라는 한마디, 더구나 자신의 무대의상을 입으라 한 것보다 더한 ‘수제자로의 인가(認可)’가 또 있을까. 불가에서 선사의 법맥을 잇는 거룩한 의식이 의발전수(衣鉢傳授)가 아니던가.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젊은이들이 민족문화에 높은 관심을 갖던 1980년대, 마당극을 비롯한 굿판이 곳곳에서 벌어지면서 하용부는 대학가의 인기강사가 되었다.
 
강의하면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할배가 ‘용부야, 굿거리에선 우에 추라’ 이런 말씀 한 번 한 적이 없었거든요. 도제식으로 보고 배운 거였죠. 가르치다 보니 몇 걸음 밟은 뒤 돌아서야 하는지,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밀양백중놀이를 체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2002년, 하용부는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의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백중은 석 달 공부에 드는 수행자들에게 백 가지 종류의 꽃과 과일을 공양하는 날이자, 세상 떠난 조상들을 천도하는 날이다. 농촌에서는 머슴들이 세벌김매기를 마친 뒤 호미를 씻으며 하루 질펀하게 놀고 쉬는 머슴의 날이기도 하다. 그런 건강하고 활기찬 정서의 백중놀이는 이제 밀양에서만 생명력 있게 살아남았다. 밀양백중놀이의 춤은, 머슴들이 놀이판을 펼치면 거드름 부리는 양반이 등장해 양반춤을 추고, 병신춤으로 양반을 놀리면, 쫓겨난 양반이 다시 범부행색으로 등장해 범부춤을 춘 뒤. 북재비들이 오북춤을 추는 구성으로 마무리된다.
 
하용부, 몸의 시인이 되다
낙백한 생활을 하던 중에 두 인연을 만났다. 1988년 부산 가마골 소극장에 게스트로 섰을때 한국적 연극어법을 찾고 있던 이윤택이 악수를 청했다. 전통춤의 형식미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유로운 몸짓의 진정성을 하용부에게서 보았던 것이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이듬해 하용부의 고향땅 밀양에 밀양연극촌을 일궜다. “이윤택은 하용부의 스승입니다. 춤만 추던 제게 춤 이전에 움직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줬으니까요. 공부를 하다 보니 인간의 움직임, 춤을 보는 시각도 달라졌습니다. 거짓과 진실을 볼 수 있게 됐다고나 할까요? 무대와 마당, 판의 흐름을 관객의 눈으로 보게 됐습니다.” 천부적인 춤꾼 하용부는 연희단 거리패와 함께 하면서 얼씨구 좋다, 하는 추임새가 가득한 마당과 조명으로 가득한 무대와의 간극은 어떻게 줄이고, 그 사이에서 신명을 전달할까를 화두로 삼고 끝없이 실험했다. 그리하여 이제 몸의 시인이 되었다.

하용부가 감사한 인연으로 꼽은 또 한 사람은 동숭아트센터의 김옥랑 대표다. 1993년, 연극 작업중인 그에게 동숭아트센터 5층의 세미나실을 내준 덕에 여섯 달 동안 마음 놓고 춤을 추었다. 이후 그는 석 달 동안 일주일에 한 차례씩 하용부와 재즈, 하용부와 구음의 만남과 같은 결과물들을 선보였다. 빠른 비트의 시대에 전통이 어떻게 숨 쉴 수 있는가를 찾아 나서면서 음악이 첨단이고 현대적이더라도, 그에 걸맞은 움직임이 따라주면 감동 어린 무대가 마련될 수 있음을 배우는 ‘깨달음의 시간’이었다. 이제 그는 트로트가요 ‘네박자’에 맞춰 춤을 추면 어떨까를 고민한다. 시간을 쪼개어 공연예술 현장을 부지런히 찾는 편이다. 그네들의 춤사위가 ‘터억 터억’ 막힐 때마다 그는 저 몸짓을 어떻게 숨 쉬듯 자연스럽게 우리 춤의 메소드로 풀어낼 수 있을까를 고심한다.
 
 연극 <오구>에서 무당 석출로 관객의 눈물과 웃음을 쥐락펴락하던 하용부의 대표작은 첫 출연으로 백상예술대상 인기상을 거머쥔 연극 <어머니>다. 지난 2월에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17일 동안 연극 <손숙의 어머니>가 공연되었다. 외지로 떠도는 남편대신 억척스레 살아온 구절양장 같은 어머니의 삶은 긴 세월 동안 변함없는 공감을 얻고 있다. 더불어 마치 무중력으로 허공에 떠 있듯 내딛는 걸음걸음, 너울너울 휘젓는 팔 사위, 영락없이 호방한 한량으로 등장하는 아버지는 적은 비중인데도 유독 큼직하게 두드러져 보인다. 떠돌면서도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놓지 않았을 아버지, 큰애가 아내 첫사랑의 아이었음을 끝내 모르는 척했을 아버지…중절모의 하용부가 호흡을 펼칠 때마다 이 땅 아버지들이 처한 현실적 무게감까지 무대 위에 꽉 찬다. 이 작품은 하용부가 1996년 초연부터 아버지 역을 해 오고 있거니와, 그의 몸짓으로 한국적 미감이 진국처럼 배어든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연극<손숙의 어머니>의 또 다른 이름은 <하용부의 아버지>다.
 
세계적으로 ‘현대적’이라 찬사받는 하용부의 춤
프랑스의 대표 안무가 도미니크는 하용부의 춤에 반해 1995년과 1997년에 프랑스 무용축제에 그를 초대했다. 이 공연을 본 태양극단의 대표 아리안느 므누슈킨은 그 자리에서 하용부의 열혈 팬이 되어 2009년, 파리의 상상축제에 하용부를 초대한다. 프랑스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무대에서 이틀 동안 밀양백중놀이의 진수인 북춤과 범부춤, 양반춤을 비롯해 하용부의 창작춤 ‘영무’를 선보였다. 역동적인 춤판에선 파란 눈 관객의 기립박수가 끊이질 않았다. 독일의 안무가 피나 바우쉬는 생전에 여러 편의 한국 춤꾼 비디오를 보다 그 가운데 하용부를 지목해 독일로 초청했고, 2005년에는 작품 <러프컷>의 안무를 위해 독일 춤꾼들을 그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네들은 하용부의 춤을 ‘한국 전통적 춤’이 아닌 ‘가장 현대적인 춤’으로 여긴다.
 
“아리안느 므누슈킨이나, 피나 바우쉬를 만나면 언어는 전혀 통하지 않는데도 우린 몇 시간씩 함께 앉아서 서로에게 감동합니다. 말이 필요 없는 자리지요. 보는 순간 이해되고, 보면서 통한다는 게 그런 겁니다.”

예술가로 살아가는 보람 중에 하나가 이런 지음지기(知音知己)를 만나는 일이 아닐까. 공연장 로비에서 그가 소탈한 춤사위를 펼쳐놓는다. 그저 턱을 끄덕이고 어깨를 흔들며 춤을 출 뿐인데, 음악 없이도 가락이 넘나든다. 춤은 몸으로 추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추는 것임을 보여준 하보경 명인. 그 맥을 잇는 하용부 명인에게 ‘진정한 춤’은 남들에게 보여주려고 애쓰지 않는 춤이며, 즐겁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는 춤이자, 숨 쉬는 대로 흘러가는 춤이다. 그의 춤을 보면 신명이란 저런 것이거늘, 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한국적 몸짓이 얼마나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인가를, 큰 움직임 없이도 물 흐르듯 하는 춤사위가 얼마나 싱싱할 수 있는가를 전율처럼 느낀다. 한평생 춤으로, 연극으로, 놀이로, 우리 것으로 체화된 하용부의 몸짓이야말로 깊고 깊은 샘물이다. 샘 깊은 물은 결코 마르지 않는다.                          출처: 한국문화재재단 글˚이윤수 (문화예술 전문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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