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의달인 악기장 윤덕진
저파룡의 배에서는 ‘동 동 동’ 소리가 났다. 상제 전욱은 저파룡의 뱃 가죽 울리는 소리를 좋아하여 저파룡을
하늘나라의 악사로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저파룡이 배를 두드리는 일은 재주가 필요한게 아니었는데도 그의 명성은 순식간에 세상에 퍼져 나갔다.
그리고 사람들이 저파룡의 가죽이 음악적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자 저파룡의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기 시작했다. 맑게 울리는 북소리는
이상하게 힘이 있어 전쟁 때나 제사 때, 또 그냥 놀 때에도 이 북은 없어서는 안되는 물건이 되었다. - [중국신화전설] (민음사,
1998) 중에서
주요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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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북, 윤덕진,
31X45X45cm
- 줄북(Drum)
줄북은 몸통 부분에 줄을 매서 만들며, 줄이 늘어나 소리가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쐐기를 조이기 때문에 쐐기북이라고도 부른다. 북은
오동나무나 버드나무로 통을 만들고, 줄은 마른 가죽을 물에 하루 정도 담근 후 썰어서 만든다. 이때 궁판에 1치나 1치 5푼 정도의 넓이로
구멍을 뚫어 물기가 있는 상태로 양쪽 궁판을 서로 엇갈리게 당기면서 줄북을 메워 나간다. 줄을 당길 때 궁판의 가죽을 직접 뚫어 당기면
찢어지므로 테 가장자리에 굵은 철사를 넣고 끝을 한 겹 접으면 줄을 아무리 당겨도 찢어지지 않는다. 아울러 줄북에 철못을 쓰면 소리가 변질되므로
사용하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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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장북, 윤덕진,
30X40X40cm
- 고장북(Drum)
고장북은 판소리의 반주에 사용하므로 소리북이라고도 한다. 북은 통과 가죽으로 구성된다. 통은 굵은 소나무를 통째로 사용해서 안쪽을 파내야
하는데 요즘은 굵은 소나무가 적어 일정한 두께의 쪽을 여러 쪽 붙여서 만든다. 가죽은 질과 두께, 부위에 따라 소리가 좌우되며 2-3년 된
쇠가죽을 무두질하는게 핵심적인 기술이며, 윤덕진 장인의 솜씨가 여기서 드러난다. 무두질은 몇 단계를 거치는데 우선 표면의 털을 제거하기 위해
석회물에 담그며, 기름기를 제거하고자 닭똥이나 된장물에 담그는 작업을 여러 차례 반복하고, 다시 이것을 대패질하여 알맞은 두께로 만드는 복잡한
작업을 거쳐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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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구, 윤덕진,
63X49X49cm
- 장구(Hourglass Drum)
장구는 양쪽 머리가 크고 중간 허리가 잘록한 형태를 하고 있어 세요고(細腰鼓)라고도 부른다. 장구는 오동나무나 버드나무 통의 양쪽 궁판에
개가죽과 노루가죽을 각각 씌워 만든다. 왼쪽은 손이나 궁굴채로 쳐 궁판이라 하고 오른쪽은 열채로 채판이라 부른다. 장구는 춤이나 소리의
반주악기로 쓰이는데, 리듬의 구실을 도맡아 아악을 비롯하여 속악, 극악, 농악, 민요에 이르기까지 널리 쓰인다. 장구의 양편을 동시에 치는 것을
쌍(雙)이라 하고, 열채로 채편만 치는 것을 편(鞭), 왼손이나 궁굴채로 북편만 치는 것을 고(鼓), 그리고 열채로 잠시 치고 굴리는 소리를
내는 것을 요(搖)라고 한다.
악기장이란
악기장이란 전통 음악에 쓰이는 악기를 만드는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데, 조선시대에는 궁중에 ‘악기조성청’이라는
독립적인 기관 안에 ‘ 풍물장’을 두어 궁중 악기를 제작하였다. 해방 이후 서양 음악이
발전하면서 국악이 설 자리를 잃고 그에 따라 국악기도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국가에서는 전통악기를 만드는 공예 기술 중 현악기는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으로, 북을 제작하는 기술은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3호 북메우기로 별도 지정하였다가, 1995년 3월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으로 통합되었다.
재래식 가죽북을 제작하는 기술자를 고장(鼓匠)이라 일컬어
- 북은 타악기로 통에 가죽을 덮어씌워 공명을 이용하여 소리내는 일종의 피명악기(皮鳴樂器)이다. 북은 한자로 고(鼓)라 하며 금속제의
쇠북까지 포함하는 경우도 있으나 여기서는 혁고(革鼓)에 한하며, 재래식 가죽북을 제작하는 기술자를 고장(鼓匠)이라 일컫는다. 한국의 상고시대에
있어서도 부여에서 천신께 제사하고 가무로서 즐기던 행사를 영고(迎鼓)라 하여 고대에 두레의
발전과 농악기로써의 북은 긴밀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음이 추정된다. 조선시대 정악에 쓰인 북은 좌고(座鼓), 용고(龍鼓), 교방고(敎坊鼓), 절고(節鼓), 진고(晉鼓), 건고 (建鼓), 삭고(朔鼓), 응고(應鼓), 뇌고(雷鼓), 영고(靈鼓), 노고(路鼓), 장고(杖鼓) 등 14종에 달하고 민속악에서는
법고(法鼓), 소리북, 매구북, 소고(小鼓), 장구 등이 쓰였다.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는 북은 장구, 소리북, 고장북, 줄북, 소고
등이다.
- 그런데 이러한 북들을 만드는 기술은 그에 필요한 가죽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에 집약되며, 그 다음에 북통을 만들고 현가(懸架)시설을
제작하는 문제 등이 부수된다. 일반적인 북은 쇠가죽을 사용하며 장구에는 개가죽을 사용한다. 특히, 큰북에 있어서는 4~5년생 한우의 황소 가죽을
제일로 친다. 쇠가죽도 그 부위에 따라 용도를 달리하는데 엉덩이 가죽은 음질이 딱딱한 좌고(座鼓)에 알맞고 목가죽은 저음이라서 소리북에
이용되고, 겨드랑이와 배가죽은 비교적 연하고 높은 소리가 난다. 그밖에 마피(馬皮)는 과거 정악(正樂)의 여러 북에 쓰였다고 하나 근래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3대에 이어 북을 만들다
- 윤덕진 선생은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향교리 출신으로 할아버지 윤억판, 아버지 윤랑구에 이어 3대째 북을 만드는 장인이다. 하동은 본래
경상남도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지리산 남쪽과 남해를 사이에 두고 섬진강이 흐르는 중요 교통요지로서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지형이다. 하동에서
일찍부터 북이 만들어진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지리산에 좋은 목재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 주로 옛날에는 통북을 많이
만들었는데, 통북이란 북테가 조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나무통을 이용하여 만드는 방법이다. 이 통나무 북의 재료로 쓰이는 피나무,
물푸레나무, 춘향목(소나무) 등이 지리산에서 많이 나온다. 또 한가지 이유로는 하동의 장에 황소가 많이 나오는데 전국에서도 하동지방의 소가죽이
북 만드는 재료로서 가장 질이 좋기 때문에 예로부터 윤씨 집안은 이곳에서 터를 잡고 북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 그러나 경상도 지방보다는 전라도 지방이 소리북이나 농악이 성하였으므로 북의 소비성을 따라서 윤덕진 선생이 7세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
순천시 동해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윤덕진 선생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도와 북을 만드는 중에 ‘여순사건’이 일어나 불행히도 아버지가
유탄에 맞아 돌아가시게 되자 생계가 어렵게 되었다. 이후 윤덕진 선생은 북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 1950년 경찰에 투신하였으나 1954년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였다가 팔 부상을 입고 퇴직하였다. 이후 다시 북 만드는 일을 계속하였다. 1961년 35세 되던 해에는 전국적으로 경제가
침체되고 일반인들의 북에 대한 관심도가 없어 사업이 잘 안되므로 서울로 옮길 것을 결심하고 영등포 신길동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곳에서 2년동안
북을 만들다가 다시 이문동에서 5년동안 거주하다 1981년에 구리시 교문동으로 이사를 하여 조그마한 공방을 두고 북을 제작하였다.
- 1989년 경기 무형문화재 제6호로 인정되었고, 1991년에는 남양주 화도읍 창현리로 옮겨 ‘한국
전통북전수소’를 개설하였다. 65세 되던 1991년 5월 중요무형문화재 제63호 북메우기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북메우기 기능은
1995년 3월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으로 통합되었다.) 1994년 다시 구리시로 공방을 옮겨 작품활동을 지속하였다. 기능보유자가 된
이후 전통적인 방식으로 각종 북을 제작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2002년 뇌출혈로 별세하였다. 윤종국, 윤신 두 아들이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 전수교육조교로 인정되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윤덕진 선생이 사용하던 작업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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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통의 재료와 도구 북통은 피나무가 연하고 가벼우며 대못을 잘 받기 때문에 가장 좋다.
15~20년생에서 베어낸 생나무는 서늘한 그늘에서 2~3년간 말려서 쓴다. 북통의 나무를 켜거나 다듬을 때에는 소목용 도구가 공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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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의 재료와 도구 북 양쪽에 덮어 씌우는 가죽은 4~5년생의 황소가죽이 좋고, 장구는 개가죽을
사용한다. 쇠가죽을 북통에 씌우는 공정은 복잡하며, 다양하고 독특한 도구가 많이 필요하다. 우선 쇠가죽의 핏물을 빨고 백회 세 바가지와 닭똥 두
바가지를 섞은 다음 오줌 두 바가지를 다시 혼합한 후, 이것을 소가죽 위에 부으면 기름을 제거하고 털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이 작업이 끝나면
넓은 가죽을 이불 개듯이 접어서 나무 목욕통과 비슷한 ‘회통’에 넣고 적당한 돌로 누른다. 회통에 물을 가득 부어 3일 가량 담가 놓으면,
가죽이 불어나고 지방이나 털 그밖에 각종 이물질까지 제거된다.
- 다음으로 넓은 소가죽을 걷어 장대 위에 걸쳐 놓고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장두칼’로 문지르면 가죽 표면의 털이 제거되고 하얀 바탕으로
변한다. 또 가죽의 털을 제거할 대에 사용하는 ‘보디’는 북 메우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공구이다. 털을 밴 가죽을 냇가의 깨끗한 물에
3일간 담가두면 내부에 있던 석회질이나 닭똥 찌거기까지 다 빠져 깨끗하게 된다. 깨끗한 가죽을 V자형 다리를 세우고 비스듬하게 판을 단
‘받침대’에 걸쳐 놓고 말린다. 다 건조하면 가죽을 펴면서 궁판의 가죽을 씌우거나 늘릴 때에는 ‘작기’를 사용한다. 생소가죽을 말리기 위해서는
사방 2m 정도의 넓은 ‘쟁판’이 필요한데, 여기에는 녹슬지 않는 25개 내지 30개의 ‘걸고리’가 필요하다.
약력
- 1926. 3월출생
- 1989경기 무형문화재 제6호 고장(鼓匠) 기능보유자 인정
- 1991. 5월중요무형문화재 제63호 북메우기 기능 보유자 인정
- 1992경기도 박물관 전통북 25종 복원 특별전
- 1995. 3월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으로 통합
- 1999한양대학교 박물관 기획전시
- 2001봉암사 대법고 설치
- 1991~2001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작품전 출품
- 2002 1월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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