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박장 김덕환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 창공을 차고나고 구름속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양 나래쉬고
보더라 한번 구르니 나무끝에 아련하고 / 두번을 거듭차니 사바가 발아래라 마음의 일만근심은 바람이 실어가네 - 가곡 '그네' [김말봉 詩 / 금수현 曲]
- 금박지를 이용해 직물 등에 문양을 장식하는 장인 금박장(金箔匠). 금박장(金箔匠)이란 직물 위에 얇은 금박을 이용해 다양한 문양을
찍어내는 기술과 그 기술을 보유한 장인을 일컫는다. 금박은 오늘날에는 여성의 혼례복 등에서 볼 수 있다.
- 금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광채가 나며 오래 두어도 변하지 않아, 사람들은 이를 진귀하게 여겨 호사스런 장식에 사용하였다. 금박에 관한
용어들은 시대와 기법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었는데, 직물금박과 관련된 용어에는 금박(金箔, 金薄), 금은니(金銀泥), 소금(銷金),
인금(印金), 첩금(貼金), 부금(付金), 부첩금(付貼金), 도다익(都多益), 화금(畵金), 쇄금(灑金) 등이 있다. 이러한 용어들은 금의
원재료 상태를 설명함과 동시에 금을 직물에 부착하는 공예기법과 작업까지를 포괄한 용어들이다. 현재 금박이란 용어는 금편을 두드리고
압면(壓面)하여 만든 극히 얇은 상태의 금박(金薄)뿐만 아니라, 금박을 옷감 위에 올려 금문을 표현하는 작업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까지의 금박의 의미는 재료로서의 금박, 또는 금박을 만드는 작업만을 말한다. 금박, 금박장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의 기록에 처음
확인된다. 조선시대에도 금박장을 두어 금박을 생산했는데, 만들어진 금박이 재료로 사용될 때에는 금박이라 하지 않고, ‘첩금(貼金)’ 또는 조금
두꺼운 금박은 ‘후첩금(厚貼金)’이라고 하였다.
- 금은니(金銀泥)는 극세한 금은가루를 접착제와 섞어 그림을 그리거나 찍어서 금문(金紋)을 표현하는 공예기법을 말하며, 금은니를 옷감에
사용한 기록은 삼국시대에 처음 보인다. 조선시대까지도 널리 사용되었는데, 왕비의 적의(翟衣), 하피(霞帔) 등에금니로 그림을 그려 문양을
표현했으며 그 기법을 화금(畵金)이라고도 하였다. 고려시대 이전의 기록에는 금박과 관련된 별도의 관직이나 관서는 보이지 않으며,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금박장 기록이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금박장, 도다익장, 부금장, 금장, 니금장 등 금박과 관련된 다양한 직관이 있어 금박 일이
전문적으로 세분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금박장은 공전(工典) 경공장(京工匠)에 소속되어 있었고,
상의원에 4명, 본조에 2명이 있었다. 외공장에 소속된 장인의 기록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금박의 사용이 왕실 위주임을 알 수 있다. 금박장과
니금장은 금박의 재료인 금박과 니금을 만들던 장인이며, 도다익장, 부금장은 금을 옷감에 올려 금문을 박아 내는 일을 맡아했던 장인이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는 기계로 금박을 만들면서 금박장의 일이 축소되었고, 사실상 금박 만드는 기법은 단절되어 부금장의 기능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주요 작품
- 녹원삼 |
132×170cm
-
원삼은 원래 궁중의 예복이었는데 일반 백성이 혼례 때 입기도 하였다. 단국대학교에 소장중인 직금 포도동자문양을 기초로 일부 수정하여 조각한
후 순금박으로 제작하였다.
- 면사포(面紗布) |
180×180cm
-
면사란 얼굴을 가리기 위해 머리 위에서 늘어뜨려 쓰는 여성의 내외용, 혼례용 쓰개로 장서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정유길례(1874년)에 사용한
면사(面紗)의 종이본을 재현한 것이다. 중앙에는 봉황문이 있고 전면에 원형수복자문(圓形壽福字紋)이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
도투락 댕기 | 127x22cm
-
수복당의
-
순금박 함보, 폐백보 | 180x180cm
-
홍원삼 | 145x160cm
현세의 복을 기원하는 금박문양
- 금박문양은 복식의 종류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었으며, 사용자의 신분에 따라 문양의 사용이 엄격히 제한되었으나 근대에 오면서 문양의 사용이
혼용되었다. 조선시대 직물문양의 큰 특징 중 하나는 현세의 복을 기원하는 길상(吉祥)·보문(寶紋)이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부귀, 권력,
공명, 장수, 평안, 자손번창의 기원을 문양에 담아 갖가지 형태로 도안하였다.
- 봉황문 : 직물문양 중 권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양이 용과 봉황이다. 왕비의 대삼에는 니금과 오채로
운봉(雲鳳)을 그린 흉배를 갖추었으며, 원삼·대대·스란치마·당의 등에도 봉황과 구름을 부금하여 신분의 위엄을 나타내었다.
- 문자문 : 조선시대 길상문의 특징 중 하나는 길상문자를 직접 도안으로 사용하여 부귀, 권력, 공명, 장수,
평안, 기쁨, 자손 번창 등의 염원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가장 널리 사용된 문자는 복(福)·수(壽)·희(喜)·만(卍) 자 등으로 각
글자는 디자인에 조금씩 변형을 주어 각기 다른 조형미로 풍부하게 표현되었다.
- 과실문 : 복숭아[天桃], 석류(石榴), 불수감(佛手柑)은 삼다(三多)를 상징하는 과실무늬로 삼다는
다남(多男), 다복(多福), 다수(多壽)를 의미하며, 직조문양뿐만 아니라 금박문양으로도 많이 쓰였다.
- 새, 곤충문 : 왕비의 대삼에 부속되는 하피에는 니금으로 꿩[翟鷄]을 쌍으로 14식을 그려넣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영친왕비의 하피에는 새와 구름이 부금되어 있다. 이외 많이 시문된 문양으로는 벌, 나비, 박쥐 등이 있다. 나비는 아름다운
사랑과 즐거움을 상징하며, 박쥐는 한자로 편복(蝙蝠)이라 하는데, 복(蝠)은 복(福), 부(富)와 음이 같아 행복과 부를 기원하는 현실적 염원을
담은 길상적인 의미로 쓰였다. 장생의 상징으로 거북, 학 등의 문양도 많이 사용하였다.
- 화문 : 화문은 금박문양에 가장 많이 사용된 도안의 하나이다. 화문의 종류에는 난초, 모란, 국화,
소화문, 연꽃, 복숭아꽃, 배꽃 등이 있으며, 꽃과 가지를 함께 도안하기도 하고 꽃잎만 간략하게 도안한 경우도 있다.
- 금원문 : 금원문은 둥근 원안에 주된 문양을 넣어 단위 문양으로 시문한 것이다. 왕비의 노의에는 봉황
금원문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노의와 활옷에 원앙금원문을 시문하였다.
- 테두리문 : 테두리를 두르는 문양을 금박공방에서는 난간문이라고 한다. 고려시대 많이 사용된 난간문은
만초형으로 반복되는 문양이며, 조선시대 이단하 댕기에서도 보인다. 그 외 조선시대에는 만자와 격자형식의 난간문도 많이 사용하였다.
- 기타 : 그 외 잡보문, 불교의 팔보문인 팔길상문, 도교의 팔보문인 암팔선문 등이 시문되었으며, 드물게
팔괘, 태극 등의 문양도 보자기에서 보인다.
‘장이는 말보다 몸으로 익혀야 한다’ 금박장 김덕환 선생
- 증조부 이래 4대째 가업을 계승하고 있는 금박장 보유자 김덕환 선생은 1935년 서울 공평동에서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집은 대를 이어 금박일을 했다고 한다. 김덕환 선생은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있어 고장난 시계를 분해해서 조립하길 좋아했다. 어쩌면 그러한
손재주가 대를 이어 금박일을 해야 할 선생의 운명을 암시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릴 때에는 금박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형과 동생도
마찬가지였는데, 부친인 김경용 선생 역시 자식들에게 일을 물려줘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일이 많지 않았지만, 간혹 외국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단체 주문이라도 들어오면 부모님의 손만으로는 모자랐다. 형과 동생은 직장에만 다닐 뿐 부모님이 일하는 일방에 들어오지 않았으나, 김덕환
선생은 일방에 들어와 바쁜 부모님의 일손을 거들었다. 이렇게라도 금박일을 돕기 시작한 것은 20살 전후가 되어서이다. 당시는 한국전쟁 이후라
경제적인 문제가 무엇보다 중요했으므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 되어야 금박일을 거들었다. 하지만 어떤 과정을 책임지기보다는 부친의 일을 마무리
지어주는 정도였다. 또한 부친은 아들에 비해 키는 컸으나 몸이 약했기 때문에 금박판을 만들기 위한 톱질이나 대패질 등 힘쓰는 일은 자연 김덕환
선생의 손이 갔다.
- 부친이 바쁠 때만 일을 돕던 김덕환 선생이 본격적으로 부친의 대를 잇기로 결심한 것은 부친의 병환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친으로부터 따로
정해진 가르침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런 부친에 대해 서운할 법도 하지만, 김덕환 선생은 ‘장이’들은 항상 머리 속에 일에 대한 생각만
가득하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면서 부친을 이해한다. 그리고 선생 역시 부친의 그러한 면을 닮아 ‘장이는 말보다 몸으로 익혀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아들에게 별다른 말없이 가르침을 전할 분이다. 하나하나 자세하게 일을 가르쳐 주지는 않았지만, 부친은 김덕환 선생이 단계별로 일을
배울 수 있도록 유도했다. 조각을 배울 때에는 2~3년간 다른 일을 시키지 않고 조각칼만 가는 일을 시킬 정도였다. 조각칼을 갈면서 도안에 맞게
칼을 가는 법을 익혔고 도안을 자주 보면서 도안에 대한 안목도 넓힐 수 있었다. 김덕환 선생에게 금박일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풀을 꼽는다. 50여 년 동안 풀을 다뤄 온 장인에게도 섬유의 특성에 맞게 재래 풀과 개량 풀의 사용을 신경 써야 하는 풀 작업은 여전히
어려운 작업인 듯하다. 1980년대에 선생이 입힌 금박 옷은 외교사절들에 의해 입혀져 알게 모르게 국위를 선양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 금박장은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으나 유일한 보유자 김경용 선생(김덕환 선생의 부친)이 그 해 타계하면서 곧 지정이 해제되는
곡절을 겪었다. 이후 33년만인 2006년 김덕환 선생이 중요무형문화재 제119호 금박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게 된다. 김덕환 선생은 배나무에
문양을 조각하는 목공예 기술과 함께 바탕옷감과 날씨에 따른 풀의 변화 등을 예측하여 금박문양을 완성하는 기술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선생은 자신이 만든 작품들이 우리나라의 전통을 알리는데 쓰였음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다시금 있기를 바란다.
어렸을 적부터 우리 공예에 관심을 갖고 많이 배우고, 직접 사용해 보았으면 하는 것이 장인의 바람이다. 좋은 물건들을 많이 사용해 보고 만져
보면 더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장인은 지금의 공방을 좀더 발전시켜 개인 박물관을 만들어 어린이들이 좋은 물건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하는 바람도 가지고 있다.
제작과정
- 금박 장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아교를 바른 문양판을 문양을 넣고자 하는 위치에 찍는다. 묻어난 접착제가 완전히 마르기 전에 그 위에
금박지를 붙인 다음 문양 바깥 부분의 금박지를 다시 떼어내면 된다. 금박장 기술은 옷의 구성에 어울리는 문양을 고르고 배치하는 안목을 바탕으로
한다. 또한 이 기술은 문양판을 조각하는 목공예 기술, 주재료인 아교와 금박지의 물성을 잘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오랜 제작 경험이
어우러져야 완성된다.
- 제작과정은 크게 금박만들기[칠지만들기-금박만들기] - 금 올리기[금박판 만들기-금박풀 만들기-금박 올리기-건조시키기-금 털어내고
뒷손질하기]로 나뉜다.
-
-
1.금박 올리기
-
2.금박 문양 찍기
-
3.금박문 수정하기
약력
- 1935년출생
- 1954년김경용 선생 문하 입문
- 1978년~1980년제3회~제5회 인간문화재 공예작품전시회 입선, 장려상
- 2006년중요무형문화재 제119호 금박장 기능보유자 인정
- 2008년인사동 서호 갤러리 개인전
- 2008년대한민국 새로운 국새제작 참여
- 2009년한국의류학회 한복복식분과 대상 시연 및 세미나
- 2009년동경 신주쿠 한국문화원 한일 전통공예 교류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