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장 정윤석
버려지고 잊혀진 자의 가슴은 무척 아팠습니다. 항아리가 된 내가 그 무엇을 위해 소중하게 쓰여지는 존재가 될 줄
알았으나, 나는 버려진 항아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소나기가 지나가면 빗물이 고였습니다. 빗물에 구름이 잠깐 머물다가 지나갔습니다.
가끔 가랑잎이 찾아와 맴돌 때도 있었습니다. 밤에는 이따금 별빛들이 찾아와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만일 그들마저 찾아와 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그대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만을 위해 존재하고 있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고 안타까웠습니다. 나는 그 누군가를 위해 사용되는
가장 소중한 그 무엇이 되고 싶었습니다. - 항아리 [정호승(시인) 저, 열림원, 1999]
중에서
주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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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퉁이&앵병 [45x26cm, 19x61cm]
방퉁이 : 처진 어깨에 배가 부르며 배지름과 높이가 비슷하고 밑지름이 넓어서 안정감을 풍긴다.
앵병 : 병과 항아리의 중간 형태로 액체의 운반 혹은 저장에 쓰이는 용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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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 [26x24x39cm]
옹기는 황토로 성형한 후 잿물을 입혀 구운 것으로 윤이 나고 단단한 그릇을 말한다. 조미료와 주식, 부식물의 저장용구나 주류 발효 도구,
음료수 저장 용구 등으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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댕구항아리_42x4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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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독항아리_35x45cm
우리네 삶과 신앙이 담긴 옹기
- 옹기는 질그릇(진흙만으로 반죽해 구운 후 잿물을 입히지 않아 윤이 나지 않는 그릇)과 오지그릇(질그릇에 잿물을 입혀 구워 윤이 나고
단단한 그릇)을 총칭하는 말이었으나 근대 이후 질그릇의 사용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오지그릇을 지칭하는 말로 바뀌게 되었다. 한자로는 ‘甕’ 또는
‘瓮’이라고 쓰고 영문으로는 ‘Onggi’로 표기한다. ‘옹(瓮)’이라는 단어가 문헌에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삼국유사] ‘기이편’ 혜공왕조에
“천구성이 동루 남쪽에 떨어졌는데, 그 머리가 독처럼 생겼고...”라는 내용으로 그릇으로서의 옹기를 언급한 것이 아닌 하늘에서 떨어진 유성의
크기를 항아리에 비유한 언급이 있다. 옹기는 기형에 따라 옹(甕)·항(缸)·호(壺)·앙(㼜)·병(甁) 등으로 분류된다. ‘옹’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대옹(大甕)’ 또는 ‘큰독’이라 하고, ‘딜리골독’이라고도 부른다.
- 항아리는 ‘옹’보다는 작은 크기이며, 최세진이 지은 [훈몽자회]에 따르면 “키가 크면 ‘병’이고 목이 낮으면 ‘호’라 부른다 하였다.
‘앙’은 동이로, ‘분(盆)’이라고도 부르며 ‘부(缶)’와도 같은 의미이다. 큰 형태의 동이로 항아리보다 키가 작고 퉁퉁한 두멍이 있는데, 이는
지방에 따라 ‘드므’라 부르기도 한다. 북부지방의 두멍은 입이 점차 좁아지는 형태이고 남부지방의 것은 비교적 입이 넓다. 옹기의 이름은 그
역사만큼이나 용도에 따라 종류도 다양하고 지역마다 특징 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밥을 담아 먹는 하얀 막사발과 함께 질그릇에
흑갈유의 잿물을 입힌, 생활용기로서의 옹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 본래 옹기는 그 쓰임새를 정해 놓고 만들었다기보다는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쓰였다. 청자나 백자는 장식적인 그릇인 반면 옹기는
실용적인 그릇이었다. 주거 공간의 배치에 따라 옹기는 부엌·곳간·장독대 등에 놓이는데, 대개 쓰임새가 그 놓여진 공간의 용도와 일치하게 된다.
그 쓰임새에 따라 대개 보관용, 운반용, 제조용, 생활용, 민간신앙용 등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보관용(저장용) 옹기는 발효식품을 저장해 두는
식생활 용기로, 농경사회에서 곡식이나 씨앗을 보관하는 용기로 적합했다.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의 장류를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김치를 저장하는데
필요한 항아리와 쌀독, 물독, 씨앗단지 등이 있으며, 양념단지, 간장병, 술병, 수저통, 주전자, 푼주 등이 있다. 운반용 옹기는 집안에서
밖으로, 또는 집 밖에서 안으로 무언가를 운반할 때에 필요한 옹기였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 나르던 동이나 술을 담아 운반했던 술병, 물이나
술, 분뇨 등을 담아 운반했던 물장군, 술장군, 오줌장군, 똥장군 등이 있다. 물이 귀한 제주도에서는 물을 길어 운반했던 허벅이 있다.
- 제조용 옹기는 주로 음식을 만드는데 쓰였으나 간혹 의료용으로 사용된 것도 있다. 떡을 찔 때 사용되는 떡시루, 소주를 내릴 때 쓰는
소줏고리, 콩나물을 길렀던 콩나물시루, 식초를 만들어 담는 식초병, 마늘이나 고추를 갈던 확과 확독 등이 있으며 밥이나 국을 끓이던 옹기솥과
뚝배기, 새우나 멸치 등 어패류의 살이나 내장을 담아 발효시키는 젓갈독 등이 있다. 의료용으로는 한약을 달이던 약탕기, 부황을 뜰 때 사용하던
부황단지가 있으며, 뜸돌, 약연 등이 있다. 일상 생활용 옹기로는 불을 밝히는 등잔과 호롱, 방안에서 사용했던 연적, 필세, 필통, 재떨이,
화로, 요강, 다리미받침, 집 처마 밑에 세워진 굴뚝의 연통과 연가가 있다. 민간신앙용으로는 집안을 지키는 가신(家神)을 모시는데 사용되기도
했다. 성주단지는 집안의 가신으로 집을 지켜 주는 성주를 모시며, 조상단지는 종가집에서 조상신을 모셔 놓기 위해 사용했던 단지이다. 업단지는
재산운을 관장하는 업을 모시던 단지로 쌀이나 뱀·두꺼비 등을 신으로 믿었다. 이 밖에 풍년을 기원하며 농업신을 모신 용(龍)단지나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신(七星神)을 위해 장독대에 정화수를 올려 놓고 식구들의 건강을 기원하던 칠성단지 등도 있다.
옹기의 문양
- 옹기에 나타난 문양들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나 재료의 특성을 살린 시유방법과 다양한 점토를 이용한 옹기만의 미를 갖고 있다. 이는 어떤
형식이나 사고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 아닌 단순한 손놀림을 이용해서 생긴 문양인데, 이러한 작업을 흔히 ‘환을 친다’라고 말한다.
- 손가락 그림은 기물을 만들고 잿물을 입힌 후 잿물이 마르기 전에 손가락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려 넣는 방법으로 표현된 그림을 말한다.
옹기에 그려지는 가장 대표적이고 특색 있는 방법으로 꽃과 동물, 산 등 자연을 소재로 한 것들이 많다. 어떤 물체의 형태를 그대로 본떠 그린
그림과는 달리 옹기 장인이 손가락이 가는 대로 그리는 문양들(대나무잎문, 활문, 산문, 물결문, 용수철문 등)과 어떤 특정 물체의 형태를 본떠
그린 그림들(풀꽃문, 구름문, 동물문, 글자문, 도형문 등)로 구분한다. 이외에 항아리에는 띠를 이루면서 몸체를 한 바퀴 둘러 표현된 문양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띠 문양들은 크게 근개띠, 목질띠, 누름띠, 양손띠, 꽃잎띠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띠 문양은 항아리의 어깨부분에
많이 나타나며 잿물을 바르기 이전, 즉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작업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근개띠나 누름띠, 양손띠는 음각 또는 양각으로 표현되며,
목질띠나 꽃잎띠는 항아리 기벽에 덧대어 붙여지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문양은 허허로움을 채워주는 미적 기능이 가장 크지만 옹기에 있어서 다른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옹기는 가마에 포개어 쌓기 때문에 같은 모양의 옹기라도 아래쪽에 놓는 것은 좀더 두껍고 튼튼하게 만들며, 위쪽에 놓는
것은 얇게 만든다. 이 때문에 문양을 넣어서 위아래에 놓일 옹기를 구분하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는 천주교를 믿는 옹기장들이 신자들만이 알 수
있는 표시를 남몰래 옹기에 새겨 넣어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거나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표식으로 삼기도 했다.
봉황마을 옹기의 명맥을 이어온 정윤석 선생
- 옹기장 정윤석 선생은 1942년 4월 15일 부친 정인옥 선생과 모친 이화엽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옹기를 만들지는 못했으나
옹기를 판매하던 상인이었다. 집안 사정으로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쉬었다가 16세 되어서야 졸업할 수 있었다. 어려운 형편에 중학교
진학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학업의 길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선생은 스스로 돈을 벌어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홀로 서울에 올라가
여인숙에서 2달간 일을 하다 장래성이 없다고 생각해 다시 강진군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 선생의 고향이자 친가와 외가 모두 거주하였던 강진군 칠량면 봉황마을은 옹기로 유명한 마을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후 다른 일에 비해서 많은
품삯을 받는 옹기장을 보고 옹기 제작기술을 익히기로 결심하게 된다. 옹기점에서 일하고 있던 외숙부 이동근 선생을 찾아가 흙을 판 형태로 만드는
기초부터 익히기 시작하였다. 전라도는 쳇바퀴타림이라는 다른 지역과 확연히 다른 방법으로 옹기를 만든다. 다른 지역은 옹기를 성형할 때 흙을
가래떡처럼 만들어서 사용한다. 그러나 전라도는 흙을 넓게 판처럼 펴서 질판을 이용하여 옹기를 성형한다. 다른 지역은 흙가래를 건아꾼이 만들지만
전라도는 대장이 직접 질판을 제작했다. 이 때문에 전라도에서 대장이 되려면 질판을 만드는 방법부터 익혀야 했다. 16살에 외숙부에게 옹기 제작을
배우기 시작했던 선생도 초기에는 질판을 제작하며 흙이 손에 익도록 만들었다. 외숙부 밑에서 옹기제작에 관하여 하나씩 배워나간 선생은 봉황마을에
있는 옹기점에서 일을 하게 된다.
- 1963년 결혼을 하고 그해 음력 6월에 군대에 입대하였는데 휴가 때마다 옹기점에서 일을 하고 받은 품삯은 집안살림에 보태었다.
1970년대 초 봉황마을보다 품삯이 높은 광주 삼소동에 있는 옹기점에서 3~4개월 일을 하다가 다시 봉황마을로 내려가 옹기를 만드는 것과 더불어
바지락 양식을 하기 시작하였다. 봉황마을에서는 배를 소유한 선주가 옹기점에서 옹기를 구입해 판매하였는데 그에 따라 봉황마을의 옹기장은 자신이
만든 옹기의 수에 따라 품삯을 지불 받았다. 물가는 지속적으로 상승한 반면에 옹기의 가격은 크게 변화가 없어 옹기장의 품삯은 상대적으로 낮아져
갔다.
-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느낀 선생은 직접 옹기를 판매하기로 결심하고 장흥군 해진면에 있는 한 마을에 옹기를 쌓아두고 부인과 함께 인근에 있는
마을에 직접 옹기를 팔았다. 36세 되던 무렵 직접 옹기점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혼자 옹기를 만들어 판매까지 하려니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아 다른
옹기장(박영곤 선생) 한 명과 함께 옹기를 만들고 판매도 같이 하게 되었다. 1970년대부터 점차적으로 옹기의 소비가 감소되어 봉황마을의
옹기점도 하나둘씩 문을 닫게 되었다. 1980년대 말에는 20곳이 넘던 옹기점이 단 2곳 밖에 남지 않았다. 그중 한 곳을 운영하던 옹기점
주인이 1989년 봄에 작고하면서 정윤석 선생이 유일하게 봉황마을에서 옹기점을 운영하는 옹기장이 되었다. 어려워진 환경으로 선생은 옹기장의 길을
자신의 대에서 끝내려고 하였으나 막내아들(정영균氏)이 군대에서 제대한 후 옹기장의 길을 걷겠다고 나섰다. 처음에 만류하였으나 봉황마을의 옹기점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아들의 뜻에 결국 허락하게 되었다. 선생은 2004년 9월 20일 전남 무형문화재 옹기장으로 인정되고 2010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제작과정
- 1) 점토 가공 점토는 선생이 살고 있는 마을이 속한 칠량면에서 채취한다. 점토의 상태는
손으로 만져서 점력과 모래 성분이 혼합된 정도를 보고 판단한다. 옹기장은 옹기를 만들기 좋도록 적당히 차지면서도 불에 강한 점토를 사용한다.
반죽하고 가공하기 이전의 점토를 생흙이라고 부르는데 생흙을 반죽하려면 물을 부어서 적당히 차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것을 ‘질물 맞춘다’고
한다. 이후 점토를 뚝메로 쳐서 다져주는 뚝메질을 한다. 뚝메질로 다져진 점토더미는 깨끼질을 한다. 점토를 깨끼로 깎아서 돌과 같은 이물질을
골라내는 작업이다. 이후 옆메질과 메통질을 하여 옹기 성형에 쓸 타래미를 만든다. 다른 지역에서는 점토를 가래떡 형태로 만든 흙가래를 이용해
옹기 성형을 하는데 전라도에서는 점토를 판처럼 만든 ‘타래미’ 혹은 ‘질판’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옹기 성형을 한다.
- 2) 옹기 성형 옹기의 바닥을 먼저 만든 후 몸체를 만드는데 점토를 넓은 판형으로 만든
타래미로 몸체를 만든다. 타래미를 올려서 둥글게 붙인 모습이 마치 쳇바퀴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러한 성형기법을 ‘쳇바퀴타림’이라고 한다. 옹기의
몸체는 타림질, 수레질, 근개질의 세 가지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만들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가리 부위인 전을 잡고 무늬를 넣음으로써 옹기가
완성된다. 몸체 만들기가 끝나면 무늬를 넣는다. 무른 점토를 이용해 옹기에 양각으로 넣는 띠를 목질띠라고 하는데 목질띠를 넣을 때는 우선
바깥훑테 모서리를 이용해 음각으로 엷게 띠 넣을 자리를 표시한다. 무른 목질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음각으로 표시한 띠 자리에 댄다.
그리고 물레를 회전시키면서 목질띠를 넣는다. 옹기가 완성되면 물레에서 떼어내기 위해 밑가새로 바닥둘레를 깎는 밑 가시기를 한다. 전라도 옹기는
윗배가 많이 나온 전체적으로 배가 부른 형태이다.
- 3) 건조 및 시유성형이 끝난 옹기는 물레에서 들어내 건조를 한다. 건조 과정은 시유 전
1차 건조와 시유 후 2차 건조로 나누어진다.
- 4) 가마재임가마재임은 소성을 위해 옹기를 가마에 쌓는 것을 뜻한다. 통가마 측면에 있는
출입구인 대새기를 통해 옹기를 가마 안으로 운반한다. 가마재임이 끝나면 옹기를 운반하던 통로인 대새기를 흙벽돌로 막고, 그 사이에 점토를 발라서
열기기 새는 것을 막는다. 옹기장의 노력이 마지막으로 결실을 맺는 순간은 가마에서 옹기를 구워내는 때이다. 이 때문에 옹기가 잘 구워지게 해
달라고 제사상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낸다.
- 5) 옹기 소성가마와 옹기 속에 포함된 습기를 제거하기 위하여 피움불은 급하지 않게
서서히 불을 지핀다. 피움불에서 온도를 높여 나가면 돋군불로 들어선다. 불을 땔 때는 중앙보다 가마 양쪽 벽에 더 많은 화목을 넣는다. 불이
양쪽 벽에서 안쪽으로 휘감아 돌며 옹기가 전체적으로 골고루 익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대새기에 흙칠을 한 번 더 해주는데 이것을 ‘맥질’이라고
한다. 돋군불을 계속 키우면 녹임불로 들어선다. 옹기에 칠한 잿물을 녹이기 위한 준비 단계로 화목을 지속적으로 투입하여 1000℃이상 화도를
높인다. 화도가 1200℃에 가까워지면 화목이 연소되어 불이 사그라지길 기다렸다가 4~5분 후에 가마 입구가 가득 찰 정도로 나무를 투입하기를
반복하는데 이것을 다룸불이라고 한다. 가마 입구와 가까운 옹기의 겉에 칠한 유약이 녹아서 윤기가 나면 창불을 뗄 시기가 된 것이다. 창불은
마지막 불로서 창구멍을 통해 옹기에 근접하게 소나무를 투입하여 땐다. 순간적인 고열을 이용하여 유약을 녹이며 옹기를 익히는 것이 창불의
목적이다.
- 6) 가마에서 옹기 꺼내기 가마를 식히고 난 후에 옹기를 꺼내기 위해서 막았던 대새기를
허문다. 공뚜껑을 사용해도 옹기에 칠한 잿물이 고열에 녹아서 붙는 현상이 조금씩 발생하기 때문에 창칼로 옹기를 떼어낸다. 그리고 대새기와 가마
입구를 통하여 옹기를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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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흙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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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_몸체만들기_웃타래미 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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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_성형하기_수레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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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_성형하기_훑테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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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_무늬넣기_막띠 넣기
약력
- 1942년출생
- 1955년전국공예품 경진대회 특선
- 1996년노동부 옹기 기능 전승자
- 2002년노동부 장관 표창
- 2005년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상설전시
- 2010년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기능보유자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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