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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익 봉화 방짜유기 유기장명인 무형문화재 제22호 내성유기
조회 : 15,182  

봉화 방짜유기 무형문화재 제22호인 유기장 김선익 명인 

4째 이어가는 공방 전통 수제작 그대로

봉화 유기는 500여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전국의 많은 장인들에게 유기제조 기술을 전래한 유기나라 유기제조의 발상지이다. 특히 안성의 유기제조법도 봉화로부터 전래되었다는 얘기는 더욱 그렇다. 19세기 초 까지만 해도 봉화 유기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이곳 봉화(신흥리)는 놋점 거리라고 불러지기도 했다.

 

방자점에서 쓰이는 놋재는 구리 1근에 상납 4냥 반에 구리 78 : 22의 비율로 배합해 쓰며, 방자쇠는 이 배합률을 철칙으로 지켰다. 이 비율로 녹여서 쇳덩이를 만들고 이것을 달구어 쇠망치로 치고 두들기고 넓히고 우그려서 만들어지는 것이 유기종의 최고품으로 치는 진품 방짜유기인 것이다.

 

경북의 봉화유기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지리적으로 쇠를 녹이는데 필요한 숯 생산이 용이하고 내성천의 풍부한 수량 등 유기생산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봉화유기는 특히 이곳의 매봉산 기슭에 자리 잡은 신흥마을의 것을 으뜸으로 쳤다.

 

기록으로는 1830년 경 곽 씨와 맹 씨 성을 가진 두 사람이 이 마을로 와서 봉화현 소속의 外工匠으로 관급의 유기를 만들면서 그 이름이 알려졌다. 이 후 유기의 명성으로 마을이 흥하면서 신흥리, 즉 신흥마을로 불렸다. 1910년을 전후한 전성기에는 100여 가구가 50여개의 유기공방을 가동해 전국 수요의 70%를 봉화의 신흥유기가 점할 정도로 그 명성이 대단해 이곳이 놋점거리로 불리기도 했다.

 

김선익 유기장은 한창 젊음을 불사를 수 있는 청년 시절에 5대째 이어온 놋점을 운영하는 부친의 가업을 전수받아 오늘날까지 고향에서 수백 가지 종류의 유기 그릇을 생산하고 있다  아직까지 전통적인 제작과 옛날 기법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장인이다. 김 유기장과 함께 해룡 옹이 함께 이곳에서 가업을 지키고 있었으나, 고 옹은 별세했고, 지금은 그 아들 태주 씨가 4대 째 지켜가고 있다. 둘 모두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봉화유기장 제 22호이다.

 

1919년 태백산 일대의 산림벌채금지 조치와 일제말기의 시대적 변화에 이기지 못하여 모두 쇠퇴해 버렸고 지금은 두가구만 겨우 옛 명성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타지방의 경우 시설과 공구가 현대화되어 옛 모습을 잃어가는 추세이나 봉화유기는 아직까지 수제작의 옛 기법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최근 유기문화 전승과 제작기법 보존이 요구됨에 따라 지난 949월 경상북도가 무형문화재 제 22호로 5대 유기 공방을 해온 광산 김씨 김선익 옹을 지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11살 때부터 선친께서 숯불로 엽전 등을 녹여서 놋그릇을 만드는 일에 잔일을 했다.

 

초등학교 때는 숯불을 달구는 풀무질을 하는 것으로 일손을 도왔지만 어린 시절부터 방짜유기를 보고 듣고 자란 그는 봉화 방짜유기에 남다른 이력을 지니고 있다. 증조 때부터 봉화유기공방을 해온 그의 집안 봉화 방짜유기 역사는 약 150년에 이른다. 최근 들어 김씨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예술가쯤으로 대접을 받게 됐다. 그리고 대구공전 도예과를 나온 그의 아들 형순(28)씨가 전수자로 3년째 수업을 쌓고 있다. 요즘 그가 만드는 봉화방짜유기는 소백산, 태백산에서 놋쇠를 녹이는 숯을 가져오고 인천송도에서 흙을 가져와 일정한 틀을 만들고 쇳물을 녹여서 두들기며 만든다.

 

일주일동안 손으로 만들기 때문에 힘들고 까다롭다. 이렇게 만들어 지는 봉화유기는 은근한 멋이 있고 닦으면 닦을수록 광택이 더 난다. 주로 제작하고 있는 유기는 반상기세트, 제기세트. 불기세트로 저마다 전통미와 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배운 게 이것뿐이라 지금껏 한 우물을 팠으나 그는 해마다 그 수요가 늘고 있어 고생하는 보람이 있으나 출처가 불분명한 방짜유기가 판을 치고 있어 매우 유감스럽다고 봉화방짜유기 인생을 살아온 김선익옹은 말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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