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무형문화제 14호 방연옥 한산모시
1,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한산모시는 최고의 품질을 자랑 하며, 지난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선정 된 우리나라의 대표 문화 유산이다. 예로부터 서천군은 비가 많고 습윤한 지역으로 모시재배에 적합한 기상 조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이곳은 모시를 짜는 기술이 뛰어나 삼국시대부터 최고의 진상품으로 여겨졌다.
명인이야기
한여름 더위에도 피부에 달라붙지 않는 청량한 촉감의 모시는 습하고 더울 때 짜야 잘 짜진다. 중요무형문화재 방연옥 씨는 모시로 유명한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모시 일을 해왔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에 이어 3대째 사용하는 전통 베틀에 앉아 옛 방식 그대로 모시를 짠다. 베틀은 나무에서 쇠로 개량되었지만, 아직도 모시 짜기는 모시 실 만드는 과정부터 직조 과정까지 완전히 기계화할 수 없는 영역이다.
폭 30㎝ 너비에 800가닥 이상의 날실로 짠 세모시는 때로 명주보다 곱고, 옷으로 만들었을 때 요염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옥색, 분홍색, 치자색으로 곱게 물들인 모시도 아름답지만, 고운 모시는 노란빛이 은은히 감도는 본래 빛깔이 더 멋있어서 멋쟁이들이 즐겨 찾는다.
한산모시 짜기는 1967년 국가가 지정하는 중요무형문화재 14호가 되었는데, 그 첫 기능보유자가 문정옥(84)이었다. 방 명인은 같은 마을에 살던 한산모시 짜기 중요무형문화재였던 문정옥 문화재 장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때 방연옥 명인의 나이는 서른여섯이었으며 1980년에 전수학생으로 등록해 일주일에 사흘씩 선생님께 배우러 다녔다.
그런데 방연옥이 문 선생 밑에서 배운 지 3년째 되는 해, 문 선생이 고혈압으로 덜컥 쓰러지고 말았다. 문 선생은 몸은 움직이기 힘들어졌지만 정신은 온전해 방연옥은 혼자 연습하면서 궁금한 점은 스승에게 물어가면서 베 짜기를 계속해나갔다. 1986년 이수자가 되었고, 이듬해 전수조교를 거쳐 드디어 1990년 중요무형문화재를 이어받았고 문 선생은 명예 보유자가 되었다.
1500년 역사를 지닌 한산모시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방연옥 선생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 방연옥 선생은 1947년 12월 16일 충남 서천군 기산면 가공리 36번지 옹근절 마을에서 부친 방자순 선생과 모친 박수영 여사의 2남 6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선생이 모시 짜기를 처음 접한 것은 친정 어머니를 통해서였다. 어머니는 환갑이 넘어서까지 모시 짜기를 하였는데 선생이 모시 짜기를 배우려고 할 때마다 모시짜기가 정말 힘들다며 다른 일을 하라고 하며 못 배우게 하셨다. 그러나 모시 짜기를 하는 어머니 등에 업혀 자란 선생은 자연스레 접하게 되었고 6살 때부터는 바디 꿰기를 할 정도로 모시 짜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숙제보다 모시 일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는데, 사실 한창 모시에 재미를 붙였을 때에는 학교 가서도 공부하는 것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모시 하는 것만 생각나곤 했다. 그래서인지 훗날 문정옥 선생께 모시 짜기를 전수받을 때 이미 어머니한테 배운 바가 있어 보다 쉽게 터득할 수 있었다.
선생의 나이 29살 되던 1973년 한산면 지현리에 사는 이소직 선생과 혼인하였다. 한산면으로 시집와서 살던 중 우연한 기회에 동네에 사는 문정옥 선생을 만나 본격적으로 모시 짜기를 배우게 되었다. 문정옥 선생 댁에서 짬이 날 때마다 일을 도와드리던 중 문정옥 선생의 권유로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모시 짜기를 배우게 된 것이다. 1981년 생애 최초로 짠 모시 4필은 약 12만원을 받고 팔았다. 당시 쌀 2가마니에 해당하는 꽤 큰 금액이었다. 모시를 판 돈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생활비로 가정경제의 보탬이 되기도 하였다.
실을 입술로 찢어 모시섬유를 만드는 ‘모시째기’는 숙련도에 따라 품질이 좌우된다. 한산모시의 ‘숨은 비법’은 이 모시째기에 있다. 모시풀 껍질을 벗겨서 말린 다음 그것을 앞니로 쪼개는 과정은 입술이 다 부르트고 피가 날 정도로 매우 고단한 작업이다. 또한 여러 과정을 거쳐 베틀에서 모시를 짤 때도 건조한 날에는 모시가 다 바스러져서 기후가 안 좋다 싶으면 한여름에도 문을 다 닫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을 해야 한다. 그야말로 여인네들의 땀과 피와 침과 눈물이 고스란히 배어야 하나의 명품으로 완성되는 것이 한산모시이다. 선생 역시 처음 모시 째기를 할 때 입술이 부르트고 피가 나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였다. 나중에는 입술에 굳은살이 박힐 정도라고 했다. 또한 모시를 쪼개려면 앞니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때 불편함이 없도록 한산지역에서 모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치과에서도 불편함이 없도록 신경을 쓴다고 한다. 모시 일을 하면서 온몸이 파스투성이, 입술에 굳은살이 생겼고, 일하기 편하게 이도 새로 해 넣었다. 그렇게 30년을 꼬박 온몸을 혹사시켜왔다. 문정옥 선생으로부터 모시 짜기를 배우면서 모시 짜기 전 과정을 습득하게 되었다. 1980년 전수장학생이 되었고 1986년 이수자로 인정되고, 1987년 전수교육조교가 되었다가 2000년 8월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한산모시 역사
모시는 처음부터 멋을 내기 위한 옷이다. 일할 때 입는 옷이 아니라는 말이다. 굵은 막저든 고운 세모시든 모시옷은 점잖은 자리에나 어울리고, 입으면 누구든 눈길을 받게 된다. 그래서 예부터 고급옷감으로 나라에 진상되었고, 중국에 가져가는 조공물품이자 귀한 교역품이었다.
이곳 한산에는 삼국시대 한 노인이 한산의 건지산에 약초 캐러 갔다가 늠름한 약초를 발견했는데 그게 모시풀이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그것은 한산모시가 유명해서 생겨난 전설 같다. 우리나라는 7000~8000년 전인 신석기 시대 유적지(강원도 오산리 등)에서 이미 실을 잣는 가락바퀴(방추차) 등의 유물이 나왔고, 청동기시대 유물로는 물레까지 등장하니 길쌈의 역사가 무척 오랜 것을 알 수 있다.
기록으로 살펴보아도 우리 방적 역사와 기술은 남다르다. 단군시대부터 누에치기를 가르쳤다고 하며 ‘한서(漢書)’에는 기자가 비단 직조를 가르친 내용이 나온다. 유물로 보면 모시는 베와 더불어 청동기시대부터 짰을 텐데 기록상으로는 변한시대 대마와 저마로 섬세한 옷감을 짰다는 중국 기록이 있고, 신라 경문왕 때에는 당으로 모시를 수출했다고 한다.
고려시대는 미술과 공예가 꽃을 피운 시기다. 직조기술이 매우 정교해 서민부터 왕까지 흰 모시옷을 입었다는 이야기가 송나라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에 나오며 생모시로 짠 옷이 유물로도 남아 있다. 모시의 수난은 오히려 조선시대에 시작됐다. 조선시대 초기와 중기는 사회가 안정되었으므로 자연히 사치가 심해지는 경향을 보이는데, 결국 수요가 공급을 따르지 못할 정도로 모시가 인기를 얻어 세모시와 관련된 폐단이 일자 중종은 모시 생산을 아예 금해버렸다. 또 모시는 벌레가 잘 피지 않으므로 수의 감으로도 인기였는데, 가뜩이나 모자라는 모시의 수요를 더욱 올려놓는 요인이 되어 “모시로 수의를 지으면 후손의 머리가 하얗게 센다”는 말을 일부러 퍼뜨리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중기 기록만 보아도 다양한 모시 생산지가 언급되지만 후기에 이르면 모시 생산지는 ‘저산팔읍(苧産八邑)’ 또는 ‘저포칠처(苧布七處)’로 충청도에 집중돼 있다. 저산팔읍이나 저포칠처로 손꼽히는 고을은 조금씩 다르나 한산과 서천, 비인, 임천, 홍산, 정산은 공통으로 들어간다. 이 고을을 중심으로 오일장이 서고 한때 막강한 보부상단도 조직되었지만 말기에는 서천군 한산만 살아남아 ‘한산 세모시’ 명맥을 이어왔다.
제작과정
1) 태모시 만들기 : 모시나무를 베어 모시의 겉껍질을 벗기는 과정이다. 모시나무에서 겉껍질을 벗긴 후 다시 부드러운 속살만을 골라내는데, 낫과 같이 생긴 손가락 크기의 특수한 칼로 훑어서 겉껍질과 속살을 분리시킨다. 벗겨낸 속살을 한주먹의 다발로 묶어서 4~5회 물을 반복해서 적시며 양지에 말린다.
2) 모시째기 : 잘 말린 태모시를 이와 입술을 이용해 쪼개는 과정인데, 이때 모시의 굵기가 결정된다. 모시는 굵기에 따라 올의 굵기가 가장 가는 상저(세모시), 중간 정도의 중저, 가장 굵은 막저로 구분한다. 따라서 모시의 품질은 바로 장인의 입술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모시는 보통 7새에서 15새(보름새)까지 짜는데 10새 이상을 세모시라고 하며, 숫자가 높을수록 상품으로 여긴다. 1새는 30cm 포폭에 80올의 날실로 짜인 것을 말한다.
3) 모시삼기 : 모시째기가 끝난 모시는 “쩐지”라는 틀에 걸쳐 놓고 한 올씩 입술의 침을 이용해 이어붙인다. 한 주먹 정도의 모시 한 태래를 ‘한 굿’이라고 하는데 10굿 정도가 돼야 한 필의 모시를 짤 수 있다.
4) 모시날기 : 모시째기가 끝난 모시는 ‘조슬대’라는 틀에 매어 한필의 모시를 짤 만큼의 실을 감는다. 모시날기를 할 때 실이 엉키지 않게 잘 해야 모시를 잘 맬 수 있다.
5) 모시매기 : 모시날기가 끝난 모시를 모시짜기에 앞서 날실을 부드럽고 보푸라기가 생기지 않도록 콩풀을 먹이면서 모시베틀에 얹을 ‘도투마리’라는 틀에 감는 과정이다. 이때 왕겨불로 콩풀을 말리면서 작업을 한다.
6) 꾸리감기 : 모시는 날줄과 씨줄로 엮는다. 모시매기는 날줄로 쓸 모시원사이고, 씨실이 되는 실꾸리를 만들어서 북집에 끼워 넣는 작업 과정이다. 보통 7, 8승 정도의 모시 한 필을 짜는 데는 날실로 모시굿이 10굿이 필요하며 씨실에는 꾸리용 모시굿 8굿 정도가 필요하다. 이것을 실꾸리로 계산하면 모시 한 굿은 실꾸리 약 두 개 정도에 해당되므로 씨실에 필요한 실꾸리의 수는 모시의 곱고 섬세한 정도에 따라 약 10~16개가 사용된다.
7) 모시짜기 : 모시매기 과정을 거쳐 날실이 감긴 도투마리를 베틀의 누운 다리 위에 올리고 바디를 끼운 날실을 빼어 각각의 잉아에 번갈아 끼운다. 짜기를 할 때에는 베틀신대에 달려 있는 베틀신끈을 오른발의 끌신에 걸고 오른손에는 북을 쥐며 왼손에는 바디집을 잡아서 짤 준비를 한다. 모시가 짜이는 원리는 끌신을 당기고 놓고 함에 따라 베틀신대가 고정되어 있는 원산이 눈썹대를 움직여서 사올과 잉아올을 교차시켜 주게 되므로 매번 날실이 교차될 때마다 씨실이 담긴 북집을 통과시켜 씨실을 걸어 주게 되므로 천이 짜이는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서 모시를 짜는데 도중에 날올이 마르면 준비해 둔 물소래기의 물로 중간중간 물을 축여가며 짜야 도중에 실이 잘 끊어지지 않는다.
8) 실 잇기 : 모시를 짜는 도중에 제일 힘든 것은 도중에 실이 끊어지는 일이다. 실이 잘 끊어지는 이유는 모시실의 질에도 문제가 있지만 습기가 부족해서 실이 건조하면 잘 끊어지게 된다. 실이 끊어졌을 때는 베틀 옆에 준비해 둔 잇기용 모시실과 눈썹끈에 붙여 둔 풀솜을 이용해서 실을 이어준다.
9) 표백하기 : 다 짠 모시는 흐르는 물이나 더운물로 대충 헹군 뒤에 콩즙을 빼기 위해 잿물에 1~2시간 정도 담궜다가 건져내고 더운물을 끼얹어가며 방망이로 두들겨서 콩즙을 깨끗이 빼내는데, 이렇게 한 모시를 반제라고 하며 생모시는 이것을 그대로 말려서 손질한 뒤 보관한 것이다. 생모시를 반쯤 표백한 것을 ‘반저’라 하고 완전히 표백한 것을 ‘백저’라 한다. 반저는 생모시의 연한 갈색에서 미황색을 지닌 색이며, 백저는 눈이 부시게 하얀 모시 본연의 독특한 특성을 가지는 흰색이다. 그해 옷을 지어 입지 않을 경우는 콩즙은 뺀 후에 풀을 하지 않고 잘 접어서 보관하고 염색을 할 경우엔 풀을 하기 전에 해야 하며 모시염색은 쌀겨나 쪽, 그리고 치자나 홍화 염색 등 색이 차분하고 은근한 천연염색을 많이 한다.
국산 모시어디서 살까?
생산지 직접 연락하면 진품 구입
국내에 유통되는 모시 제품의 70~80%는 중국산이거나 다른 섬유가 섞인 질 낮은 제품이다. 최근에는 중국산도 품질이 많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자세히 살펴보면 구분이 가능하다. 한산모시가 까슬까슬하면서도 윤기가 흐르는 데 비해 중국산은 천이 흐늘거리면서 윤기가 없다. 1필 규격도 한산모시는 31~32㎝×21.6m인 반면 중국산은 34㎝×20.4m로 약간 차이가 난다.
전라도와 충남 부여 등지에서도 일부 모시를 재배하지만 국산 모시시장을 주도하는 곳은 충남 서천군 한산면이다. 제대로 된 모시를 구입하려면 서천 현지를 방문하거나 전화로 주문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모시 생산자들의 모임인 (사)한산모시조합으로 연락하면 진품 모시를 구입할 수 있으며, 모시옷을 취급하는 한복점도 소개해준다. 섬세한 정도에 따라 1필에 45만~400만원까지 가격대가 다양하다.
☎041-951-94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