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하게 자연을 다스려 덖은 죽로차
홍소술 명인은 50년 간 차를 덖었다. 차를 덖는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의 수많은 변수를 조절하는 일이다. 때에 따라 습도가 다르고 바람이 다르고 빛이 다르니, 그것을 잘 관장하는 것이 명인의 힘이다. 홍소술 명인은 그것을 오랜 경험으로부터 쌓았다.
홍소술 선생님은 우리나라 차시배지이자 야생차의 고장인 지리산 화개동에서 사십여년간 잊혀진 우리의 전통차맛과 다례문화를 재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진 노력해온 우리나라 차의 산증인이자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홍소술 선생님이 처음 차사업을 시작할 무렵인 1960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차사업을 하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우리나라는 차의 불모지였다. 하지만 선생님의 좋은차 만들기에 대한 노력과 전국의 차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차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증폭되면서 오늘날의 차문화가 많이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홍 명인의 바람은 ‘다도(茶道)’라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사회 전반에 차 문화를 보편화 시키는 것이다. 2008년 경남 980개 초·중·고등학교에 10만원 상당의 엽차 1200상자를 무료로 발송한 것도 차 문화를 전파하고픈 마음에서다. 그는 학교뿐 아니라 식당 등 많은 사람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곳에서 모두 차를 상용화해서 사회전반에 차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화개에 뿌린 천 년의 차씨 한 알
홍소술 명인은 화개에 다시 차산업의 씨를 뿌린 사람이다. 천 년 전 지장보살로 지칭되는 신라의 김교각 스님이 구도(求道)를 위해 중국으로 떠나면서 차씨를 품고 가 구화산에 심어‘김지장차’가 되었고, 그 천 년 후, 화개 골짜기에 차씨를 뿌린 홍소술 회장의 이야기를 쓴 장형남 씨의 소설《천 년의 찻씨 한 알》에 나오듯이, 눈덮인 지리산을 넘어 화개에 도착하여 차를 가꾼 지 어언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차를 모르는 사람이 없고,‘ 차’하면 화개이고 그 화개의 상징이 된 그는 군민들이 주는 문화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예로부터 자생하는 차가 있었지만 그 잎을 따서 차를 만들어 팔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없던 1959년대, 당시 시골에서는 물건값 대신 쌀이나 콩 기타 작물을 대신 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우연히 스웨터 값으로 받은 산천 덕상부락의 차 한 통이 인연이 되어 화개를 찾게 되고, 지천으로 자라는 야생 차나무를 보며‘이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구나’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그 길로 하던 사업을 접고 가족들에게 통보한 후 먼저 화개에 들어와 차씨를 뿌리기 시작했다. 29세 때였다. 화개 초입의 법하와 탑리 뒤 언덕에 약 500평씩 심은 차가 잘 자라는 것을 본 화개인들이 너도나도 차밭을 일구기 시작했고 때마침 분 홍차열풍을 맞아 재미를 보았다. 총 생산량 22톤 중 3톤 가량은 차를 만들어 국내에 팔고, 일본에 녹차와 홍차 각각 5톤씩 수출하였고, 나머지는 동서식품에 납품하였다.
독실한 불교도인 그의 어머니가 해인사를 드나들며 배운 제다법을 바탕으로 홍 회장이 반복하여 제다하면서 스스로 차 맛과 색, 향을 내는 원리를 터득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무슨 색, 무슨 맛, 무슨 향이라도 척척 만들어 낼 정도의 경지라고 하며 그래서 각종 차상은 마음만 먹으면 다 타던 때도 있었다. 한국차인연합회의 올해의 명차에도 세 차례나 선정되었다.
차의 역사
차는 중국에서 지금으로부터 약 5천넌전에 처음 마신것으로 알려진다. 중국 당나라 육우가 쓴 세계 최초의 차 전문서적 [다경(茶經)]에는 인류 최초로 차를 마신 사람이 신농씨염제(神農氏炎帝) 라고 했다. 신농씨는 지금 중국 서쪽 호북성(湖北省) 윗쪽 섬서성(陝西省) 기산(岐山) 아래로 흐르는 강수(姜\水)가에서 양떼를 몰던 부락민들과 살았으므로 그 성(性)을 강(姜)씨라 했다.
중국 고대 전설로 삼황오제 중 한사람으로 백성들에게 농경과 목축을 처음 가르쳤다는 머리가 소의 모습을 한 고대 중국의 황제라고 한다. 지금 중국에 있는 그의 능(陵)마저 차능(茶陵) 이라 불리워 지고 있으며 중국인들은 지금도 햇차가 나오면 제일 먼저 다신(茶神)인 신농씨에게 차례를 지내고 있다.
우리나라의 차의 역사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차를 마시기 시작하였다. 가야의 김수로왕비인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져왔고(삼국유사), 지금의 경남 창녕군 북면 백월산에 심었다는 설이(조선불교통사)고 한다. 사료에의한 우리차의 최초 전래다.
신라에서는 828년에 대렴이 중국에서 차씨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었고(삼국사기), 백제에서는 문헌은 없지만 백제의 성왕이 차를 일본에 보냈다는(일본서기)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귀족계급을 중심으로 다도가 유행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사찰을 중심으로 그 전통이 이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의 융성으로 한때 쇠퇴기를 가졌던 다도는 19세기 들어서 다시 활상화 되기 시작했다. 당시 초의선사로인해 다도의 이론적인 면과 실제적인면이 크게 발전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재배되어진 것은 1.000~2.000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차 문화는 삼국시대~고려시대에 중흥기를 맞이하다가 조선시대에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지만, 초의 선사, 다산, 추사등의 훌륭한 다인들의 등장으로 다시 우리차의 재중흥기를 마련하던 중, 근대적인 재배차가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것은 1941년 일본인들에 의해서이고, 1969년 농특사업의 일환으로 차 재배가 확대되었지만 외래차인 커피문화의 범람으로 차 산업은 쇠퇴기를 맞았다.
최근 우리 전통차가 우리몸에 좋은 기능성들이 알려지면서 그 소비가 매년 늘어나 현재 연 재배 및 소비가 20~30% 증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다례(茶禮)란 무엇인가?
차(茶)라고 하는 것은 차를 마시는 것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의 수양을 쌓는 것이다. 즉, 차는 목의 갈증 을 없애줌과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의 갈등과 괴롭고 슬픈일들을 잊게 해주는 의미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조선초의 의인(義人) 이목(李穆)이 「차가 사람으로 하여금 예(禮)를 갖추게 한다.」고 하였듯이 차 생활에 있어서 기본은 여유로운 마음에서 우러나는 경(敬)과 정성 담긴 예(禮)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육우도 「다경」에서 「차는 지극히 맛이 차서 행실이 한결같고 정성되며 검소하고 덕이 있는 사람 [精行儉德之人]이 마시기에 가장 알맞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차를 다룰때는 자연히 정성을 들이게 되 고 또 자신이 처한 환경과 위치(주인, 손님, 봉차자)를 정확히 알므로써 자연인으로서의 분수를 알아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됨으로 겸손해져 예의를 갖추게 된다.
사람은 예의를 지킴으로써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또한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의를 간단 명확하고 정확하게 순서를 몸에 익히는 것이 다례이다.
다례는 예의를 기본으로 하므로 사람들이 당연히 하지 않으면 안될 규율을 편안하고 쉽게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실용다례
실용다례는 중, 고, 대학생들이 다례를 통해 심신을 수련하며 차 마시는 행위와 더불어 禮를 익힐수 있는 다례이다.
일반인들은 3∼4인 이상의 손님, 또는 그 이상의 손님이 모였을 때, 행하는 다례인데 이는 어떤 격식 이나 번거로운 절차를 필요치 않으므로 찻자리의 아취는 적으나 자연스럽고 편안한 마음으로 다례를 할 수 있다.
행다(行茶 , 차를 우려 마시는 모든 일)순서
1. 주인과 봉차자 손님은 정위치에 서서 조용히 앉으며 예(행례)를 올린후 편안한 자세를 가진다.
2. 주인은 찻상보를 접어서 오른쪽 정위치에 놓은후 준비된 백탕을 물식힘 사발에 따루어 다관에 옮겨 따른다.
3. 다관의 탕수를 찻잔마다 나누어 따루어 가셔낸다.
4. 적당한 온도로 식힌 탕수를 다관에 붓고 차를 넣는다. (상투법)
5. 잘 달여진 차를 물식힘사발에 따른후 찻잔마다 옮겨 따른다.
6. 먼저 왼쪽 봉차자가 찻상보를 접어 주인에게 전하면 주인은 찻상보를 오른쪽 정위치에 놓는다. 다음 오른쪽 봉차자도 그렇게 한다.
7. 주인은 왼쪽 봉차자에게 찻잔을 건네고, 오른쪽 봉차자에게도 찻잔을 전한다.
8. 봉차자는 차반을 들고 조용히 일어서서 손님에게 나아가 가벼운 초례를 한다.
9. 봉차자는 찻잔은 손님의 왼쪽, 다식은 손님의 오른쪽에 놓고 정중한 예(行禮)를 드린후 다음 손님에게도 그렇게한 후 손님 옆에 나란히 앉는다.
10. 손님이 차를 마신후 다식을 먹으면 차와 다식을 먹은후 봉차자는 손님앞에 나아가 찻잔과 다식접시를 걷어들인 후 행례를 한다.
11. 봉차자는 정위치로 돌아와서 찻잔을 주인에게 전하면 주인은 찻상보를 먼저 오른쪽 봉차자에게 다음 왼쪽 봉차자에게 건네준 후 주인도 같이 찻상보를 나란히 덮는다.
12. 조용히 일어서서 정중한 예(行禮)를 올린 후 오른쪽 손님이 먼저, 다음 왼쪽 손님, 봉차자, 주인, 봉차 자 순으로 물러난다.
연혁
1967 제3회 농산물품평회 장려상
1995 한국차인회 명차상 수상
1997 하동군 명차상 수상
2002 한국차인회 명차상 수상 (2년 연속)
2007 식품명인 제30호 지정
현재 경남 하동 화개면에서 화개제다를 운영하며 차를 덖고 있으며 막내아들이자 전수자인 홍창로(36) 씨가 홍명인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출처 홍소술명인 홈페이지, 한국식품명인협회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