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철장 원광식
-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 하나뿐인 영혼의 울림
- 비천상飛天像에 깊은 사연 / 고이고이 새겨놓고
천년의 능선을 넘어 / 또다시 천년의 봉우리를 향해 / 울려 퍼지는 소망의
소리
- 이제 귀로는 들을 수 없지만 / 천년이 지나도
애끓는 이별의 슬픔은 / 소리 없이 아파만 한다
- 오랜 세월 쌓아 올린 / 그리움의 무게 삭히고
울어라 울어라 에밀레야 / 어여, 깊은 침묵에서 깨어 / 멀리멀리 울려
퍼져나가 언제나 기인 여운으로 / 그립다 말하렴, 에밀레야
- 김성돈 시인의 [에밀레 종]
주요 작품
- 해인사종(2/3축소), 50×77cm
보물 제1253호인 해인사 동종을 주석과 청동을 사용하여 제작한 작품으로 무늬가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 상원사 동종(축소), 44×78cm
오대산 상원사에 소장되어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종인 상원사 동종을 전통주조기법인 밀랍주조기법으로 축소 제작한 작품으로 문양이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다.
천년을 이어 번뇌를 녹이는 참회의 소리 한국의 범종
- 새해가 바뀔 때마다 서울 종각에는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묵은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행사인 제야의 종 타종식에
맑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은 간절한 희망을 담아 기도한다. 시주받은 아이를 집어넣어 만들었다는 에밀레종 전설과 꿩의 보은설화를
간직한 치악산 상원사 종에 대한 이야기 등은 선조들의 삶에서 종이 어떠한 의미였는지를 말해준다.
- 주철장(鑄鐵匠)이란 쇠를 녹여 각종 기물을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우리나라 금속 공예의 주요한 기술인 주조 기술은 불교문화와 함께 크게
발달하였고 그 가운데 범종 제작이 그 주류를 이룬다. 우리나라 범종은 세부 장식이 정교하고 소리가 웅장한 것이 특징이며, 전통적인 범종 제작
방식은 밀랍 주조 기법이다. 먼저 밀랍으로 종의 모형을 만들고 그 위에 활석과 점토 등을 혼합해 만든 주물사를 일정한 두께로 바른 뒤 그늘에서
말린다. 그 다음 열을 가해 내부의 밀랍을 녹여내고 밀립이 제거된 외형과 내형을 결합한 빈 공간에 쇳물을 부어 제작한다.
- 범종(梵鐘)은 불가에서 사용하는 종, 즉 불교의 종을 말한다. 범종의 신앙적인 의미는 종소리를 듣는 순간만이라도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데 있다. 따라서 종소리를 듣고 법문을 듣는 자는 오래도록 생사의 고해를 넘어 불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한국의 범종은 그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20세기 초부터 국내외 고미술학자들의 지대한 주목을 받았다. 그리하여 ‘한국 종’(Korean Bell)'이라는 세계적인 학명으로
불릴 만큼 독자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다.
- 특히 신라 종의 우수성은 국내외에서 널리 상찬되고 있을 만큼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존하는 한국 범종의 상당수는 일본으로
반출되어 그곳에서 국보로 지정된 것만 해도 20여 구를 헤아린다. 국내에서 가장 오랜된 범종으로 밝혀진 것은 서기725년(성덕왕 24)에 제작된
오대산의 상원사 동종으로 한국 종의 전형적인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높이 167cm의 이 범종은 원래 경북 안동의 문루에 걸려 있다가 조선
초기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앞서 우리나라 사찰에 범종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삼국유사] 등 문헌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또한 속칭 에밀레종으로 더욱 유명한 성덕대왕 신종은 현존하는 고대의 종 중 최대 규모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왕명에 따라 국사 차원에서 주성해 봉덕사에
시납한 종으로 경덕왕이 선왕의 명복을 받들려는 효성에서 청동 12만 근을 모아 주종사업을 시작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아들
혜공왕이 부왕의 업을 이어 771년에 완성한 하여 성덕대왕의 원찰인 봉덕사에 시납된 종이다. 그 뒤 영묘사, 경주 읍성의 남문, 동부동의 옛
박물관을 거쳐 1975년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 보관되고 있다.
범종의 각 부분 명칭
-
- 종의 각 부 명칭을 살펴보면 종의 맨 윗부분부터 음통, 용뉴, 천판, 상대, 유곽, 유두, 비천, 당좌, 하대로 구분된다.
- 용뉴: 용의 모양을 취한 범종의 가장 윗부분으로, 이곳에 쇠줄 등을 연결하여 종을 매달게 된다. ‘용뉴’는
종고리가 용으로 장엄하게 조각된 형상을 말하는데, 동북아 삼국을 비롯한 대부분 동아시아 국가의 범종들이 종고리에 용을 장식하고 있다. 용을 종에
장식한 까닭은 훌륭한 소리를 얻기 위함인데 그 이유에 대해 [문선(文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용의 아홉 자식에 대하여
설하기를... “바다 속에는 큰 물고기가 있는데 고래(鯨魚)라 하고 또한 해변에는 짐승[용의 자식]이 있으니 포뢰(蒲牢)라 한다. 본디 포뢰는
고래를 두려워하여 고래가 나타나면 곧 큰 소리를 내어 운다. 무릇 종은 소리가 커야 하므로 그 위에 포뢰를 만들고 경어 형상을 깎아
당봉(撞棒)으로 하였다.
- 음관: 용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음관은 용통, 음통이라고도 불리는 소리대롱이다. 이 음관은 외국 종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우리나라 범종에서만 볼 수 있는 한국 종의 가장 독창적인 조형요소이다.
- 문양대(상대와 하대): 상대는 종의 어깨 부분에 둘러진 무늬 띠이고 하대는 종의 아래 부분인 종구에 둘려진
무늬 띠이다.
- 유곽과 유두: 유곽은 상대 밑쪽 네 곳에 붙인 네모난 테이며, 유곽 속에서는 각각 9개씩 볼록하게 솟아
있는 도들꼭지가 있는데 이를 유두라 한다. 이 유곽과 유두 또한 중국 및 일본의 종과 차이가 있는 것으로 한국 종이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 비천상: 비천상은 신라 종에서 많이 나타나며 고려와 조선 종에서는 불보살상이 나타난다. 비천상에서
불보살상으로 바뀐 이유는 부처님에 대한 강했던 신심이 옅어지면서 불상의 힘을 빌려야 했기에, 신심이 아닌 신앙의 힘을 빌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당좌: 종을 치는 당목이 직접 접촉되는 부분으로 종의 소리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밑동에다 치면 소리는
크나 뒤섞여서 시끄럽고 깨지기도 쉬워 가장 적절한 위치는 밑에서 1/3쯤이 좋다고 한다. 종의 몸매는 시대별로 차이가 있는데 신라 종은 늘씬하게
길며, 밑으로 갈수록 천천히 배가 부르다가 2/3쯤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모양이고, 고려 종은 길이가 짧아져 종의 밑인 종구의 지름과 키가 거의
1:1에 가깝고 밑으로 갈수록 차츰 배가 부르다가 배부른 모습이 거의 직선을 이루며 끝까지 이어진다. 조선 종은 위에서부터 펑퍼짐하게 선을
그리면서 내려오다가 끝에서는 밖으로 벌어지는 형태를 하고 있다.
혼을 담아 천년의 소리를 이어온 주철장 원광식 선생
- “이 사람아! 나는 종을 위해 한쪽 눈을 바쳤어.
혼을 담아야 천 년의 소리가 나오는 거지. 잔재주 부리면 끝이야, 끝!”
- 모 증권회사 CF 주인공으로 친숙한 주철장 원광식 선생의 말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주철장 기능보유자인 원광식 선생은 경기도
화성시 남양면에서 아버지 원용호 선생과 어머니 배성녀 여사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17세까지 성장하면서 이듬해인
18세에 8촌형인 원국진 선생이 운영하던 주물공장에서 일하게 되면서 종장(鐘匠)으로서의 첫 인연을 맺게 된다.
- 주물공장에서 1년 남짓 생활하다가 서울로 상경한 후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친구들과 같이 기거하며 자동차 정비일을 배웠다. 1963년 군
전역 후 8촌형이 운영하던 성종사(聖鐘社)에 다시 들어가 종제작 등 주물일에 전념하게 된다. 일제가 대동아전쟁을 일으키면서 군수물자 재료로
활용하기 위해 공출되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에는 사찰에 종이 거의 없었다. 1960년대부터 공출된 종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는데 1960년대는 교회
중심으로 1970년대는 사찰중심으로 종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당시만해도 종의 도면작업, 조각, 초제작 등이 전부 수작업이었기 때문에 일하기가
너무 어려웠다고 한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도면작업하고 조각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범종 제작에 대한 지식을 조금씩 쌓아가기 시작했다.
- 선생은 1968년 결혼 후 종장(鐘匠)으로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주물일을 하던 중 쇳물이 눈에 튀어 눈을 심하게 다치게
된다. 이로 인해 주물일을 그만두려고도 생각을 했다. 사고가 난 후 1년을 놀면서 허송세월을 보냈다. 주물일이 수입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8촌형에게 주물일을 배우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기술을 전수할 때는 철두철미했으며, 피눈물이 날 때까지 일을 시키며 야박하게 대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일을 야무지게 배울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눈을 다친 후 1년여 만에 다시 재기에 몸부림을 쳤다. 다 접자고 마음먹었으나 밤에
눕기만 하면 자꾸 귓가에 종소리가 맴돌았다. 종과의 질긴 인연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 1970년 수덕사에 들어가 1973년까지 4년 동안 기거하면서 건국 이래 가장 큰 범종(1000관, 4톤)을 제작하였다. 스님들처럼
머리를 깎은 후 열정을 다해 종을 만들기 시작했다. 1972년 8촌형인 원국진 선생이 타계하자 수덕사 종을 만든 후인 1973년 4월 성종사를
인수했다. 수덕사 범종 제작은 범종 분야의 전문가를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에밀레종의 도면을 최초로 그렸고 경주박물관장을 역임한 홍사준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종에 대한 지식을 많이 배울 수 있었고, 밤에는 도면을 그리고 낮에는 쇳물을 부으면서 종을 만들기를 이어 가던 중 1976년
‘범종연구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범종연구와 제작이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서울대학교에서 켬퓨터로 범종에 대한 가상설계와 음향측정을 했고
실험결과에 따라 많은 종이 제작되었다. 우리나라 범종계에서 최고의 권위자였던 서울대학교 고 염영화 교수가 함께 하여 종을 만들고 깨보기도 하고
자르고, 측정하는 등 종에 대한 조사 연구를 현장에서 같이 하였다.
- 현재 전국 방방곡곡의 사찰에 있는 범종 대부분이 모두 원광식 선생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덕사, 법주사, 화엄사,
쌍계사, 범어사, 해인사, 통도사, 보은사, 용주사, 월성사, 백양사, 금산사 등 우리나라의 유명 사찰의 큰 범종은 거의 제작하였다. 해마다
제야의 종 타종식이 거행되는 보신각종과 몇 년 전 불타 녹아버려 재제작한 낙산사 동종도 선생의 작품이다.
- 선생은 우리 선조가 만든 종을 복원하고 이를 통해 선조들의 주조기능을 연구하기 위해 중국과 일본을 수시로 답사한다. 특히 일본 후쿠오카는
신라와 고려의 종이 많이 유출되어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 범종의 본(本)을 많이 떠왔다고 한다. 선생의 끊임없는 노력과 도전을 인정이라도 하듯
지난 2000년에는 노동부로부터 대한민국 명장으로 인정되었고, 2001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주철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천
년을 간다는 범종은 긴 세월 동안 그 입자가 서서히 부서지며 더 좋은 소리를 낸다고 한다. 그리고 쇠로서의 수명이 다하는 그날, 마지막으로 내는
소리가 그 종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소리라고 한다. 최고의 소리를 낼 수 있는 범종 제작을 위해 혼을 담은 선생의 작업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제작과정
- 전통적인 범종 제작방식은 밀랍 주조기법이다. 먼저 밀랍으로 종의 모형을 만들고 그 위에 활석과 점토 등을 혼합해 만든 주물사를 일정한
두께로 바른 뒤 그늘에서 말린다. 그 다음 열을 가해 내부의 밀랍을 녹여내고 밀랍이 제거된 외형과 내형을 조립한 빈 공간에 쇳물을 주입하여
완성한다.
-
약력
- 1942년출생
- 1960년원국진 선생 사사
- 1973년성종사 제2대 대표 취임
- 1976년한국범종연구회 발족
- 1985년보신각 새종(5300관) 제작
- 1993년한국민속예술연구원 위원장 역임
- 1997년선림원사지종 등 옛 범종 다수 복원 및 재현
- 1999년임진각 평화의 종(5600관) 제작
- 2000년대한민국 명장 지정
- 2000년노동부 장관 표창
- 2001년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주철장 기능보유자 인정
- 2005년진천 종박물관 명예 박물관장
- 2005년대통령 표창
- 2006년한국중요무형문화재기능보존협회 부이사장
- 2006년한국폴리텍Ⅵ대학 명예교수
갤러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