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김애선 땅을 박차고 오르는 신명의 춤사위
“단오 당일은 물론이요, 전날부터 인근지방에서 봉산의 탈춤 구경꾼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당일 연예장에는 약 만 여 군중이
혼잡을 이룬다.…(중략)…주체인 탈춤은 저녁의 놀이로 휘황한 구화(煹火)를 피우고, 4상좌무가 순차로 나타난다. 이때에는 그 많은 군중이 소리
하나 없이 묘기에 황홀하여지며, 이따금 들리는 것은 오직 감격에서 우러난 탄성뿐이다. 그리하여 최후에 남강노인의 재담이 끝날 때는 짧은 여름밤도
밝기 시작한다.” - 송석하, ≪韓國民俗考≫ 중에서
장작불이 이글거리는 마당에서 펼쳐지는 일곱 가지 이야기
황해도 봉산에서 탈춤을 추던 김진옥 명인이
있었다. 사리원을 거쳐 광복 이후 서울로 이주한 이래 봉산지역의 어르신들을 규합해서 봉산탈춤의 전승과 보존에 헌신해온 분이다. 한평생 봉산탈춤과
더불어 살아온 공로를 인정받아 1967년에 봉산탈춤 예능보유자가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1969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진옥 명인에게는 그의
춤사위를 꼭 빼닮은 두 딸이 있었다. 사리원에서 호흡을 맞추던 큰딸 김금선은 결혼과 함께 춤판을 떠났다. 큰딸보다 열다섯 살 아래인 막내
김애선은 김진옥 명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춤판에서 호흡을 맞추었고, 1989년에는 봉산탈춤 예능보유자 가운데 최연소로 보유자가 되었으며,
이제까지 그가 없는 세상에서 봉산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예의 춤사위를 이어가고 있다. 봉산탈춤은 황해도 봉산지역에서 전승되던 전통연희다.
1915년경 사리원으로 행정기관이 이전하고, 경의선이 개통되면서 사리원 경암산 앞 너른 마당으로 옮겨져 행해졌다. 조선시대에는 초파일에 주로
연희되었으며, 단오가 이북지역의 큰 명절이 되면서부터 단오축제의 백미로 자리 잡았다.
4상좌춤·8목중춤·사당춤·노장춤·사자춤·양반 말뚝이춤·미얄 영감춤 등 7과장 속에는 파계승과 몰락한 양반들이 등장하고, 무속과 불교,
유교를 넘나들며 권선징악을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계층 간의 갈등, 양반과 파계승에 대한 매서운 비판이 담겨 있으며, 여느 탈놀이에 비해 유독
한시 구절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김애선 명인은 사리원 단옷날의 봉산탈춤 공연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단오 무렵이면 야산 마당에 새까맣게
다락들이 중에서 지어졌어요. 훤한 대낮에 남자들은 씨름을, 여자들은 그네뛰기를 했죠. 날이 저물면 장작불을 밝히고 탈춤놀이로 새벽까지 흥을
이어갔지요. 불기운 일렁이는 곳에서 팔먹중이 등장하면 아이들은 무서워서 울음보를 터뜨렸어요. 다락에 오르지 못한 무수한 사람들은 다락 밑에 서서
구경을 했고요. 관객들이 탈을 함께 만들어서 그 탈을 뒤집어쓰고 저마다의 소망을 기원하면서 다 같이 춤을 췄습니다.” 봉산탈춤 현장은 모두가 긴
밤을 지새운 채 날이 밝도록 난장을 펼치면서 하나 되어 어우러지던 축제의 자리였다. 동틀 무렵에 놀이판이 끝나면, 곧바로 조명 역할을 하던
장작불에 그날 사용한 탈을 모아 다 태웠다. 관객들은 끝까지 남아 재로, 연기로 변하는 탈을 보며 삿된 것들을 다 날려 보내기를 소망하고 한
해의 무탈을 꿈꿨던 것이다.
관객과 춤꾼이 하나 되는 화합의 축제판, 봉산탈춤
지난 5월 26일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선
봉산탈춤보존회의 66회 정기공연이 성황리에 펼쳐졌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된 봉산탈춤 전 과정을 1년에 한 번 대중에게 공개하는
행사였다. 분단 이후 고향을 떠나온 봉산탈춤이 타향 땅에서 공연된 지도 70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더위 속에서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활달한 봉산탈춤의 춤사위와 신명속에 넋을 잃은 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옛날 황해도 봉산과 사리원 일대에서 백성들이
놀던 탈춤이, 고맙게도 2013년 서울의 한가운데에서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엿보는 현장이었다. 발자국을 떼면서부터 탈바가지 속에서 생활한
김애선 명인은 다섯 살 때 원숭이 역할로 탈춤판에 데뷔한다. 그의 선친은 공연 일정이 잡히면 서른여덟 개의 탈들을 하나씩 만들기 시작했다.
진흙으로 틀을 짰고 겹겹이 한지 붙이는 일에도 정성을 다했다. 종이 염색에서부터 단원들의 의상 바느질까지 김진옥 명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아버지는 탈춤을 하기 위해 태어나신 분이었던 것 같아요. 말씀도 없으시고, 술 한잔 입에 댈 줄 모르시는 분이 무대에 서면 완전히
다른 분이셨거든요. 60년대 대학가를 두루 돌면서 봉산탈춤을 전수하신 분이 아버지세요.”
아버지의 버들가지 같은 춤을 보고 자랐다. 단 한 번도 춤은 이렇게 추는 거란다, 하는 자상한 가르침을 받아본 일이 없다. 그저
어깨 너머로, 눈짐작으로 따라한 게 뼛속까지 새겨진 것이다. 그이에게 봉산탈춤은 그렇게 찾아온 운명이었다. 그러나 미군정 시절을 거치면서
서구문물들이 쏟아지고 이 땅의 전통문화가 낡고 버려야 할 것으로 홀대받던 시절, ‘전통의 맥을 잇는 일’은 어찌 수월한 일이었으랴. “지방
공연을 다니면 광주리에 의상 한 아름, 탈 한 아름을 메고 다녔어요. 무거운 짐 때문에 어깨에 광주리 줄 자국이 두 줄로 생겼지요. 여럿이
무리지어 가는 게 창피해서 혼자 멀찍이 떨어져 걷기도 했어요. 어린 시절엔 그런 것들이 왜 그렇게 부끄러웠던지요.” 방방곡곡을 떠도는 일은
고달팠다. 지방공연 중에 숙박비가 없어서 숙소에서 쫓겨나는 일이 다반사였고 죽 한 그릇 편히 먹지 못하던 매정한 시절이 그이에게도
있었다.
야외공연 중엔 낡은 탈을 묶은 줄이 끊어지며 내려앉은 탈이 시야를 가리면서 발을 헛디뎌 몇 미터 아래 야산으로 굴러 떨어진 아찔했던 기억도
있다. 그런 일쯤이야 두 눈 질끈 감고, 봉산탈춤 하나로 ‘좋아라’ 하며 기운 내며 살았다. 그런 열정이 오늘날 봉산탈춤 명성의 바탕이 됐을
터다. 김애선 명인도 선친을 여의고, 혼인과 함께 잠시 봉산탈춤을 떠난 일은 있었다. 그러나 봉산탈춤을 되살려 아버지의 맥을 이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찾아온 탈꾼들 앞에 감격해하고 의기투합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엄앵란이 인기를 모으던 시절에 그이 역시 영화판에서 모셔가겠다는 제의를
받았을 만큼 뛰어난 미모의 춤꾼이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한평생 무대 위에서 그이는 미모를 드러내 보일 일이 없었다. 늘상 험하게 생긴
팔먹중탈을 비롯해 상좌탈과 소무탈을 뒤집어쓰고 춤을 추기 때문이다. 물론, 봉산탈춤의 맥을 잇는다는 소신으로 영화판을 향해 기웃거리지 않고
봉산탈춤 하나로 뚝심 있게 살아온 일만큼은, 지금도 퍽 잘한 일로 꼽는다.
흥겨운 장단에 뒤섞이는 거침없는 춤사위
고향땅에서 밤을 지새우며 펼쳐지던 공연은 이제 50분에서 한
시간 남짓의 공연으로 줄어들었다. 그뿐이랴, 소리 하나, 춤사위 하나, 피를 타고 흐르는 법이라 봉산탈춤을 온전히 이어갈 봉산의 후학이 없다는
현실은 김애선 명인이 애틋해하는 점이다. 40년씩 된 기량 출중한 제자도 따라오지 못하는 한 가지가 바로 ‘황해도의 정서’인 것이다. 하지만
다른 장르에 비해서 타고난 춤꾼들이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찾아오는 인기분야가 ‘봉산탈춤’이라는 사실 하나만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통일되면
북녘 고향 땅에서, 고향에서는 잊힌 봉산탈춤을 선보이는 걸 꿈꿔오며 그이는 봉산탈춤의 맥을 후학들에게 남김없이 이어주는 일에 매진해왔다. 소질
있는 제2의 김애선이 나와주는 일만큼, 그이가 간절히 꿈꾸는 일은 ‘봉산탈춤의 구술작업’이다. 봉산탈춤에 관한 한 스스로 보고, 배우고,
익히며, 이해하고 있는 것을 두루 정리해서 봉산탈춤이 어떻게 이어져왔는가를 후세에 보전하는 일이 봉산탈춤 보존회 회장인 그의 소망이다. 맑은
기억이 남아 있을 때, 남김없이 전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요즘 그 방법을 찾고 있다. 1937년생이니, 그의 말마따나 ‘내일모레면 여든’을
바라본다.
그런 그이가 즐겨 입는 옷은 청바지에 티셔츠, 그 위에 가죽 소재의 라이더재킷이다. 놀랍게도 봉산탈춤 복장 이상으로 썩 잘 어울린다. 매주
금요일이면 그이가 금쪽같이 여기는 이수자와 전수자들이 기다리는 강남구 삼성동의 중요무형문화재 전수회관으로 출근을 하는 라이더재킷차림의 김애선
명인을 어김없이 볼 수 있다. 봉산탈춤은 강인한 에너지를 요하는 남성적인 춤사위로 대표된다. 손가락의 놀림조차 온몸에서 춤사위가 뿜어져야 하는
춤이다 보니 춤이 전체적으로 활발하고, 힘이 넘친다. 팔목춤만 잘 추면 봉산탈춤은 마쳤다고 하던가. 봉산탈춤의 기교가 첫목춤 속에 다 들어 있다
할 만큼, 봉산탈춤을 대표하는 춤은 역시 8목중 가운데 첫목춤이다. 그 첫목춤의 대가가 김애선 명인이다. 70대 후반에도 라이더재킷 차림으로
20대 제자들과 소통하고, 무대에 서기만 하면 펄펄 나는 기운으로 춤사위를 펼치는 김애선 명인의 자신감이야말로, 70여 년 세월 동안) 에너지
넘치는 봉산탈춤을 통해 비축해온 힘일 것이다.
출처: 한국문화재재단 글˚이윤수 (문화예술전문 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