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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원의기적.jpg
 
 
90칸집 이씨네 임청각

안동 시내에서 “석주(石洲) 이상룡(李象龍)선생의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대개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고성 이씨네 임청각(臨淸閣)이 어디냐”고 하면 서슴없이 가르쳐 준다. 그만큼 임청각은 안동 시내에서는 유명한 저택(?)이다.
임청각은 중종 14년(1519)에 형조좌랑을 지냈던 고성이씨 이명(李洺)이 지은 집으로 원래는 99칸의 집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70여 칸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 중 하나인 이 집은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의 생가이며, 그의 아들과 손자 삼대에 걸쳐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용(用)자가 가로 누은 듯한 독특한 평면구성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남녀와 계층별로 매우 뚜렷한 공간 구분을 이루고 있어 건물의 위계질서가 매우 분명함을 알 수 있다. 별당형식의 정자 건물인 군자정(君子亭)은 임청각의 사랑채로서 평면이 '丁'자를 옆으로 누인 형태이다. 이 정자 내부에는 이 곳을 찾은 시인묵객들이 아름다운 자연에 취하여 지은 시들이 걸려 있다. 임청각이란 당호는 퇴계 이황의 친필로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에서 따온 것이다. 건물 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영남산 자락에 터전을 잡은 건물이 자연환경과 잘 어울린다.

중앙선 영주에서 안동으로 들어오는 기찻길 옆, 안동댐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산기슭에 임청각이 있다. 임청각 앞으로 기찻길과 도로가 나면서 99칸을 자랑하던 원래의 규모가 대폭 축소됐지만 현재 남아 있는 정침(正寢)과 별당인 군자정(君子亭)만으로도 옛 모습을 되살리는 데 부족함이 없다.

보물 182호로 지정된 임청각은 조선 중종 때 형조좌랑을 역임한 이명이 고향으로 돌아와 1519년 처음 지었다. 이에 앞서 개성유수를 역임한 그의 형 이굉은 1513년 낙동강과 반변천(임하댐 아래 전천의 옛 이름)이 만나는 와부탄에 귀래정(歸來亭)을 지은 바 있다. 임청각과 비스듬히 마주 보고 있는 귀래정 역시 지방문화재 자료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대저택이 강가에 모습을 드러내자 이를 두고 “도깨비가 지은 집”이라며 놀랐다고 한다. 집터와 건물은 당대의 터잡기 기술인 풍수의 법도에 따랐다. 임청각에 대한 평가는 뒷날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임청각은 이씨가 대를 이어 사는 곳인데 영호루와 함께 고을 안의 명승이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은 점에서 드러난다. 임청각은 안동 8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꼽혔다.

임진왜란과 뒤이어 일어난 숱한 전란에도 불구하고 임청각은 이를 묵묵히 지켜보면서 역사의 무게를 더해갔다. 창건자인 이명의 후손들은 선조의 뜻에 따라 벼슬길보다 사림으로 남아 선비의 길을 고수했다. 이런 가풍도 서구 열강과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하는 격동의 세월을 맞으면서 바뀌었다.

1858년 석주 이상룡 선생이 태어나면서 임청각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서산 김흥락의 문인으로 정통유학을 공부한 석주는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한 것을 목격하고 구국의 대열에 뛰어들게 된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석주는 47세의 나이에 국권 회복은 `전쟁'의 길밖에 없다며 군사를 양성하기 위해 박경종 등과 함께 거금 1만5000냥을 들여 가야산에 군사기지 건설을 도모했다.

이 비밀계획은 끝내 실현을 보지 못했지만 향후 석주의 독립운동 방략(方略)을 이해하는 단서가 됐다.
1907년에는 안동 유림들과 함께 협동학교를 설립·운영했다. 신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에 가산을 아낌없이 투자했다. 임청각 군자정은 애국운동의 산실로 활화산처럼 열기를 뿜어냈다.

1909년 안동경찰서는 지역 독립운동의 진원지를 봉쇄하기 위해 석주를 구금했다. 안동군민의 잇따른 항의로 경찰은 그를 1개월 만에 석방했다.
석방된 뒤 석주는 서울과 연락을 취해 안동에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 전국적 연대를 꾀했다. 1910년 8월 이른바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이용구·송병준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에 앞장섰다.

석주와 함께 안동 애국운동의 산실이던 임청각이 마침내 눈물을 흘리는 날이 왔다. 1911년 1월6일 석주는 일가 50여 명을 인솔, 조상 대대로 지켜온 임청각을 뒤로하고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다.

안동에 가면 필자는 열일을 제쳐놓고 임청각을 꼭 찾는다. 군자정 돌 계단을 오를 때마다 `과연 나라면 이런 집을 두고 만주로 망명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진다.
석주 선생 외에 안동은 물론 전국 각지의 명문가 후예들이 풍찬노숙을 마다않고 만주 등 해외로 망명길에 올랐다.

어쩌면 봉건왕조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린 그들이기에 국권 회복에 앞장서는 것이 마땅하고 역사에 대한 보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 국내에 남아 외세에 협력, 기득권을 유지한 사람도 적지 않다.

만주에 간 석주는 해외 독립운동 단체의 효시인 경학사를 설립, 사장에 취임하고 부설로 신흥강습소를 설치했다. 이것이 뒷날 신흥무관학교가 된다.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919년 4월 서로군정서 설립에 참여해 독판에 추대됐다. 만주·상해의 독립단체들이 내분을 겪을 때마다 석주는 화해의 중심에 섰다. 1925년 상해 임시정부가 헌법을 개정, 국무령제도를 도입하자 초대 국무령에 선출됐다. 그의 나이 67세 때였다.

1926년 국무령을 사임하고 1932년 5월 만주 서란현에서 서거할 때까지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에 진력했다. 석주는 “조국이 광복을 맞으면 내 유골을 환국해 달라”고 유언했다. 광복된 지 45년 만인 1990년 10월 석주의 유해가 환국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끝내 선생은 살아서 임청각을 다시 보지 못했다.

최근 석주의 후손들이 임청각을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밝혔다. 사람의 온기가 끊어진 임청각은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의연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포인트-안동 충혼탑
영호루에 오르는 길목에 추강 김지섭 선생 기념비가 있다.
안동 출신으로 1920년 중국에서 의열단에 가입, 상하이(上海)·베이징(北京) 등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김의사는 1924년 도쿄(東京) 니주바시(二重橋)에서 일본 의회 요인들을 암살하기 위해 폭탄을 투척하고 현장에서 체포됐다. 지바(千葉)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옥중 서거했다.

추강 기념비와 마주한 곳에 충혼탑이 있다. `꽃다운 청춘을 조국에 바친 용사들의 영령이여/진리와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가실 길 없는 님들의 넋이여/이 나라 이 겨레에 길이 등불이 되어 주소서'라는 한솔 이효상이 지은 헌사가 새겨져 있다.

1965년 건립된 이 충혼탑에는 6·25전쟁에서 산화한 영령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안동지역은 6·25전쟁 발발 초기 국군 8사단과 북한군 12사단이 격전을 치른 곳이다.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되면서 8사단의 철수작전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아 많은 피해를 입기도 했다. 안동지구 전투는 후퇴작전의 중요성을 일깨운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가볼 만한 유적지-신세동 7층 전탑
안동 시청 부근에는 고려조에 들어 `안동'(동국을 평안하게 하는 곳)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삼태사의 묘(廟)가 있다. 태사는 벼슬 이름이고 묘는 사당을 뜻한다.

고려 창업 당시 왕건을 도와 후백제 견훤군을 물리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이곳 출신 김선평·권행·장정필 세 분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내는 곳이 삼태사묘다. 이들은 안동 김씨·안동 권씨·안동 장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한편 임청각 근처에서 볼 만한 문화재가 신세동 7층 전탑(塼塔)이다. 국보 제16호인 7층 전탑은 벽돌을 주재료로 건립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전탑이다.
8세기 통일신라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17m , 기단부는 7.5m다. 이 전탑은 안동의 지기를 보존하는 비보탑으로 예부터 보호돼 왔다.

먹거리-안동 헛제삿밥
안동시 중심가에 관광객을 위한 전통음식거리가 있다. 안동찜닭을 비롯, 안동국시 등 전통음식과 최근 개발한 특유의 음식들이 관광객의 입맛을 유혹한다. 이 가운데 역사가 오랜 것이 헛제삿밥이다.

과거부터 제사를 지낸 음식으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 풍습이 우리나라에 있었다. 평상시에는 제삿밥을 먹지 못하므로 제사음식과 같은 재료를 마련해 비빔밥을 먹는데 이를 헛제삿밥이라고 한다.

재료는 매우 단출하다. 쌀·쇠고기·간고등어·두부·다시마·고사리·시금치·배추 등이다. 전주 비빔밥과는 달리 맛이 담백·깔끔하다는 점에서 한번쯤 먹어볼 만한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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