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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을 만든 장인의 이름을 다시 불러본다
15-07-06 13:53

1964년 12월 24일. 그 날은 중요무형문화재가 탄생된 역사적인 날이다. 이렇게 5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때 그 시절 인간문화재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배움이 많지도 가진 것도 많지 않았던 그들을 아들과 딸도 아닌 우리가 잊지 않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뛰어난 솜씨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필자는 1970년대 중고등학교 시절 경복궁 뒤쪽에 위치한 전통공예박물관(현, 건청궁 자리)에서 인간문화재 작품과 함께 그들의 이름을 보았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이후 1980년대 홍익대 재학시절에는 은사이신 故 이종석 호암갤러리 관장님이 민속공예론 수업시간에 그들의 기술과 함께 이름을 불러주곤 하셨다.

1970년대 중반 정춘모 보유자가 김봉주 보유자에게 입자기술을 전수받을 당시에 찍은 사진으로 김봉주 보유자가 작업하는 모습을 담았다.(사진기증: 정춘모 보유자, 국립무형유산원)


1964년 12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종목은 제1호 종묘제례악, 제2호 양주별산대놀이, 제3호 남사당놀이, 제4호 갓일이다. 그중 전통공예 분야는 제4호 갓일이다. 갓은 조선시대 내내 선비들의 의관정제의 핵심 공예품이어서 갓을 만드는 장인 또한 총모자장(驄帽子匠), 양태장(陽太匠), 입자장(笠子匠), 사립장(斜笠匠) 등 다양한 명칭의 많은 장인들을 조선 후기 의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의 기능을 이어 받은 기능보유자로는 총모자를 만드는 총모자장 고재구(高在九, 1898.3.30.~1979.5.26.), 양태를 짜는 양태장 모만환(牟晩煥, 1887.2.12.~1971.1.23.), 갓을 모으는 입자장 전덕기(田德基,1897.12.3.~1972.12.6.)와 김봉주(金鳳珠, 1903.5.2.~1977. 4. 28)가 인정되었다. 당시 장인들의 연령은 61세에서 77세에 이르는 고령이어서인지 인정되고 7년 뒤인 1971년부터 1979년까지, 1970년대에 모두 사망하였다.
이렇게 최초의 인간문화재들은 비록 짧은 인생을 마감하고 우리 곁을 떠났으나, 우리는 결코 그들을 보내지 않았다. 곧 그들은 아직도 우리의 기억 속에 함께 하며 잊히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기능들이 그들의 제자에 의해 전승되어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바로 1991년 5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의 제2세대 입자장으로 정춘모(鄭春模, 1940.9.5.생)가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정춘모 보유자를 만난 것은 문화재청의 상근전문위원으로 근무하며 무형문화재 기록화사업을 수행하던 때였다. 특히 2001년 본인이 갓을 제작하는 기술을 기록하면서 정춘모 보유자를 인터뷰하였고, 이 때 그의 입을 통해 1세대 보유자의 이름을 다시 들을 수 있었다.

통영 김봉주 갓방(김봉주 보유자, 사진 중앙)에서 일하던 젊은 시절의 정춘모 보유자 (사진 왼쪽) (사진기증: 정춘모 보유자)주지하다시피 정춘모 보유자는 원래 경북 예천 출신이며 고향에서 어린 시절부터 갓 만드는 기술을 배운 장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머물지 않고 대구로 옮겨 고등학교 졸업 후 ‘입자공업사(笠子工業社)’를 경영하면서 고재구, 김봉주 보유자를 모셔 일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이 일을 통해 근대기 이후 점차 사라져가던 갓이나 망건 및 탕건 등을 만들거나 수리하는 장인들이 전국 어느 곳에 누가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과 교류하여 그들의 물건을 구입하고 판매하는 일을 하였다. 그를 인터뷰할 때 그가 매일 꼼꼼하게 기록한 <거래 장부> 2권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전국에서 활동하던 여러 장인들이 이름이 빼곡이 기록되어 있어 인상적이었다.
정춘모 보유자는 비록 예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남 통영에서 입자장으로 인정되었던 김봉주와 인연이 닿아 통영으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김봉주의 양자이자 제자가 되어 갓을 모으는 일을 배우기도 하였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서 그의 젊은 모습을 찾아낼 수 있다. 마루에 걸터 앉아 김봉주 보유자와 고재구 보유자와 함께 있는 젊은 정춘모는 지금 보아도 신선하다. 이로 미루어 당시 통영의 김봉주 갓방에는 총모자 만드는 일을 하는 고재구 보유자와 갓 모으는 일을 하는 김봉주 보유자가 함께 일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두 명의 장인에게 총모자와 입자일을 배운 그는, 갓 만드는 데 빠져서는 안 되는 양태 만드는 일까지 익히고자 멀리 떨어져 살던 모만환 보유자를 찾아가 그 일까지 익히게 된 것이다.

고재구 보유자와 김봉주 보유자 사진 (사진출처: 국립무형유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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