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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최고의 핫 이슈 아리수 쟁탈전
15-05-10 11:50


 
충주 중앙탑공원에서 바라본 남한강 ⓒ 이병현
 
여러분, 혹시 '아리수(阿利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저처럼 서울 지역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쉬는 시간 목마름을 달래주던 서울시의 수돗물이 연상될텐데요, 이는 광개토대왕비에서 나오는 용어로서 삼국시대 한강을 지칭한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수도 서울의 젖줄 역할을 하는 한강의 중요성은 삼국시대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특히 한강의 지류인 남한강 유역은 지리적, 전략적 가치가 컸기 때문에 그 지역을 차지하는 나라가 전성기를 맞았으며 그곳을 둘러싸고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대략 1500년이 지난 현재, 당시 사람들의 피와 땀은 사라졌지만 치열했던 기억은 두 기의 비석 속에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지금부터 남한강 유역에 남아 있는 '충주 고구려비'와 '단양 적성비'를 통해 삼국시대의 '아리수 쟁탈전'을 복원해보고자 합니다. 
 
왜 남한강인가?- 남한강 유역의 지리적 가치 
 삼국은 왜 남한강 유역을 정복하고자 그토록 많은 공을 들인 것일까요?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그 까닭을 잠시 짚어보고자 합니다. 
남한강 유역은 예로부터 한반도의 남북과 동서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각광받았습니다. 그곳은 영서와 영동 지방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였으며, 아울러 조령과 죽령 등 그 지역의 고갯길을 통해 충청도에서 경상도로 갈 수 있었습니다. 
육상뿐만 아니라 수상교통 또한 발달하였는데요,  다른 강에 비해 수심이 깊고 유량이 풍부하여 상류까지도 배가 다닐 수 있는 남한강의 특성을 십분 활용하여 강원도 일대의 수로와 낙동강에 대한 접근이 용이했습니다. 
 아울러, 한반도 3대 철 산지로인 충주 등지에서 양질의 철을 채취, 제련한 다음 남한강을 따라 다른 지역으로 원활하게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철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삼국시대 남한강 유역의 전략적 가치는 더욱 각광받았습니다.
 
 삼국시대의 철기(국립중앙박물관) ⓒ 이병현
   
북방의 지배자 고구려, 남쪽으로 눈을 돌리다: 충주 고구려비 
 
고구려의 남진(南進) 한계선과 충주 고구려비(가운데  비석 표시)를 나타낸 지도(국립중앙박물관) ⓒ 이병현
 
 
5세기 삼국의 정세는 고구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습니다. 
일찍이 한강유역에 자리를 잡아 4세기 전성기를 이룩한 근초고왕의 백제에게 패배하고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아픔을 겪은 고구려는 뒤를 이은 소수림왕 대 이르러 불교를 수용하고 율령을 반포하며 국가체제정비에 성공하였는데요, 소수림왕의 조카인 광개토대왕은 이를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활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북쪽으로 후연 및 동부여 등을 격파한 광개토대왕의 고구려는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금관가야와 왜국의 침입으로부터 신라를 구원하여 명실상부한 삼국의 최강자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막강한 기세는 다음 장수왕 대로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충주 고구려비 ⓒ이병현
 472년, 수도를 국내성(현재 중국의 집안)에서 평양으로 옮긴 장수왕은 남쪽으로 영토확장을 시도하는 이른바 남진정책을 표방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고구려군은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임으로써 고국원왕의 복수에 성공하였으며,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남한강 유역까지 세력을 넓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한 지역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 비석인 충주 고구려비는 이 시기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밝혀진 충주 고구려비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왕의 명령을 대신한 고구려 태자가 이 지역에 와서 신라 왕에게 의복을 하사하고, 고구려 장수들이 신라 영토에서 군사들을 모집하였다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광개토대왕 시기 왜와 가야의 침략을 막아준 이후,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늘어났습니다. 
특히  비문에서 고구려 왕을 태왕(太王)으로, 신라 왕을 매금(寐錦)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을 장악한 고구려가 신라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충주 고구려비 건립 기록화(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 이병현
   
거북이는 어떻게 토끼들을 이겼을까: 단양 적성비
   여러분, 혹시 '토끼와 거북이'라는 우화를 아시나요? 
끝까지 부지런함을 잃지 않은 거북이가 속도의 차이를 극복하고 토끼와 달리기 시합에서 승리한다는 이야기인데요, 삼국시대 신라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신라는 건국 이후 450년이 다 되어서야 지도자를 왕으로 불렀으며, '박제상 이야기'처럼 한 때 외국에 왕자를 볼모로 보냈을 정도로 국력이 약했는데요, 삼국 중 가장 늦은 전성기를 맞은 다음 부단히 노력하여 국가발전을 거듭한 끝에 결국 삼국을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고구려로부터 남한강 유역을 빼앗고 나서 그 지역을 지키기 위해 세운 단양 적성산성 안에서 발견된 단양 적성비는 바로 신라 전성기의 원동력을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성산성 안에 세워진 단양 적성비의 모습 ⓒ 이병현
   
  오랜 시간 동안 백제와 고구려에 밀려 있었던 신라가 삼국의 정세를 본격적으로 주도하게 된 것은 6세기부터였습니다. 신라는 오랜 시간 동안 귀족들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여 국력을 하나로 모으는 데 난항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513년 즉위한 법흥왕은 불교를 수용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왕권강화 및 중앙집권화를 이룩하였습니다. 
뒤를 이은 진흥왕은 법흥왕의 체제 정비에 힘입어 전면적인 영토확장에 돌입하는데요, 신라의 영역은 주변의 가야지방은 물론 한강 유역뿐만 아니라 북쪽으로 함경도 일부까지 늘어났습니다. 
당시 진흥왕은 자신이 점령한 주요 지역마다 비석을 세우고 이를 기념하였는데요, 단양 적성비는 우리가 잘 아는 진흥왕 순수비 이전 건립되어 진흥왕의 초기 정복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안타깝게도 비석의 일부분이 파손되어 전문을 알 수 없으나, 현재 판독 가능한 부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첫 번째 부분은 진흥왕이 적성지방 공략에 참여한 관리들에게 교(敎)를 내린 사실을 나타냈고 두번째 부분에서 적성지방을 점령할 때 신라를 돕다 죽은 지역민 '야이차'의 가족들을 포상하는 내용을 기록하였으며 세번째로 비를 세운 사람들을 열거하였는데요. 비문에서는 우산국을 점령한 것으로 유명한 '이사부'와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 등 당대의 명장들의 이름과, 지방민을 활용한 신라의 적극적인 대외정책, 그리고 '전사법' 및 '소자', '소녀' 등의 표현을 통해 율령이 실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형제와 같은 두 비석   
 충주 고구려비와 단양 적성비는 각각 고구려와 신라의 전성기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한 편으로는 마치 형제처럼 느껴지는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단양 적성비의 경우 1978년 단국대학교 박물관에서 적성산성을 발굴하던 도중 신발에 묻은 진흙을 털 수 있는 돌을 찾다가 표면에 새겨진 글자를 보고 그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1년 뒤, 진흥왕 순수비의 선풍적인 인기에 힘입어 당시 중원군이었던 충주시 가금면의 입석마을에 세워진 돌을 조사하였는데요, 담당자는 바로 적성비를 세상에 알렸던 단국대 정영호 교수였습니다.
 
 이처럼 단양 적성비와 충주 고구려비는 남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공통점뿐만 아니라 발굴 과정에서도 연관성을 맺었습니다.
 지금은 각각 단양과 충주를 대표하는 중요한 삼국시대 금석문자료로서 지역을 홍보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래 전 사활을 걸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긴 시간이 지나고 결국 다른 국가지만  하나의 민족으로 역사에 기록된 삼국의 운명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참고자료]

 <고고학자 조유전 이기환의 한국사 기행(책문)>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국립중앙박물관

<제7기 문화재청 대학생 기자단 이병현 기자(korea7v@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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