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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백제의 열쇠, 풍납토성
15-05-10 12:33

안녕하세요? 문화재청 블로그 기자단 5기 한수연입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감기 걸리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다들 건강 잘 챙기시기를 바랄게요!  
이번 기사의 주제는 풍납토성입니다. 풍납토성은 백제사, 특히 한성 백제의 역사를 푸는 데 있어 키워드가 되는 중요한 문화재인데요, 올해는 1963년, 풍납토성이 사적으로 지정된 지 50년이 되는 해라고 합니다. 사적 지정 50주년을 맞아서 지난 10월에는 학술대회가 개최되는 등 풍납토성은 다시 한 번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풍납토성의 의의를 알기 위해서는 백제의 역사와 백제의 수도 하남 위례성에 대한 배경 지식이 조금 필요한데요, 잠깐 알아보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백제는 도성의 위치에 따라 한성(서울)기, 웅진(공주)기, 사비(부여)기 세 시기로 구분됩니다. 그중에서 풍납토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시기는 한성기입니다. 제일 초기 단계인 한성기는 백제가 건국 후 주변의 여러 세력을 통합하며 영토를 확장하고 국가 체제를 확립해나가던 시기입니다. 하지만 한성기는 백제사의 2/3를 차지하지만 역사적 사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는다고 합니다.『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한성기 백제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사료의 양이 충분하지 않고, 사실관계 역시 명확하지 않아서 한성기의 백제는 백제사에서 많은 의문점을 남기고 있었다고 합니다. 
“백제시조 온조왕이 마침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북한산)에 올라 살 만한 곳을 내려다 보았다. 10신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는 한수를 두르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자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기름진 땅을 바라보며 서로는 대해로 막혀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원년조, 기원전 18년]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시조인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 정했고, 하남 위례성은 이후 500여 년간 한성백제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하남 위례성은 그 위치가 불분명해서 학계에서는 오랜 시간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하남의 땅은 북쪽은 한수(漢水)를 띠고, 동쪽은 고악(高岳)을 의지하고 있으며, 남쪽은 기름진 옥토를 바라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다.” 라고 하남 위례성의 위치를 기록하고 있는데요, 이를 근거로 하여 하남 위례성의 위치가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 일대라고 주장하는 학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춘궁리의 지형은 동, 서, 남 세 방면이 막히고 북쪽만이 트여 있어 위에서 인용한 백제 초기 하남위례성의 지형과 차이를 보인다고 합니다. 하남 교산리 역시 하남 위례성의 후보지로 제기되었지만, 이 역시 뒷받침하는 증거가 미약하여 정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습니다. 이 외에도『삼국유사』 왕력조에서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했는데 일설에 따르면 사천이라 하여 지금의 직산”이라고 한 데서 ‘직산설’이 제기되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충청도 직산현을 온조왕의 도읍지로 명시하고 있어 직산설이 설이 힘을 얻는가 했으나 1989년과 1995년 서울대 발굴 조사 결과, 직산 동쪽에 위치한 천안의 위례산성은 통일신라 시대의 방어용 산성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그러던 1964년, 서울대 김원룡 교수팀이 풍납토성에서 시굴조사를 벌이던 중 토성의 북벽 근처에서 초기 백제 토기 조각들을 발굴하게 됩니다. 발굴팀은 출토 유물, 성의 규모로 미루어 보아 이곳은 1세기부터 한성 백제가 공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5세기 동안 사용한 중요한 거성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백제 건국집단의 한강 유역 진출은 최소 1세기까지 올라 갈 것으로 보인다”고 1967년 발표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한성백제가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해 고구려, 신라와 맞설 수 있었던 시기는 3세기 후반대인 고이왕 때라는 당대의 정설과 풍납토성은 “286년 백제 9대 책계왕이 수도인 위례성을 수리하고 고구려의 침입을 막고자 수축했다” 라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따라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1980년대 중반부터 풍납토성 인근의 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으로 여겨져 주목을 받았는데요, 88서울 올림픽 당시 몽촌토성 주변이 체육 시설 및 공원 조성지로 결정되어 1983년부터 발굴이 이루어졌고 이곳에서 주거터, 저장시설, 방어시설로 보이는 목책과 같은 다양한 건물터와 백제 시대 유물이 다량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이를 근거로 몽촌토성이 3세기 중반에서 백제가 멸망한 475년까지 약 2백여 년 동안 백제의 도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이는 백제가 3세기 고이왕대에 들어서야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기존 국사학설과도 절묘하게 부합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각광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풍납토성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풍납토성은 1925년에 있었던 대홍수 때에 토성 일부가 무너져 내리면서 그 존재가 확인되었고 그 뒤 1963년 성벽이 사적으로 지정되었지만, 토성 내부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진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습니다. 1990년대 주택 재개발 붐에 따라 풍납토성 인근에 올림픽대교, 현대중앙병원(현 아산병원) 등이 들어서게 되었고 풍납토성지에도 아파트 재개발이 이루어지게되었습니다.선문대 이형구 교수팀의 1995년 풍납토성 실측조사를 시발점으로 하여 1996년 말에는 정밀조사에 착수했습니다. 1997년에는 설 연휴로 공사가 잠시 중단된 틈을 타 현대아파트 재개발 부지가 되어 기초공사가 한창이던 풍납토성 지에서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공사현장에서 백제 토기 조각들이 발견되기 시작했고, 이는 특종으로 되어 곧이어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울대 박물관, 한신대 박물관 공동으로 참여하여 긴급구제발굴이 이뤄졌고 곧 유구와 유물이 공개되었습니다. 
  발굴 조사 결과, 풍납토성은 폭 43m 이상, 높이 11m, 둘레 3.5km에 이르는 사다리꼴 형태의 토성임이 밝혀졌고 늦어도 3세기 전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또한, 지하 2.5m~4m에 걸쳐 유물포함층과 기원 전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일종의 방어시설인 3중의 환호 유구를 비롯해 한성백제 시기의 주거지, 폐기된 유구, 토기 가마 흔적 등이 발굴되었습니다. 강력한 권력 없이는 이러한 거대한 토성을 축조하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백제는 한성백제 시대부터 강력한 힘을 가진 고대국가였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러한 발견들을 근거로 하여 풍납토성이 하남 위례성인가에 대한 논의가 다시 열을 띠게 되었고 풍납토성의 발굴은 역사학계를 뜨겁게 달구게 되었습니다. 
 
 
  1997년 이후에도 풍납토성에 대한 발굴은 계속되었습니다. 한신대 박물관팀의 경당 연립 신축용지 발굴 결과 주거지와 제사 관련 대형 건물터를 비롯하여 전돌, 와당, 초대형 항아리, 중국제 도자기, 중국 동전인 오수전, ‘대부’라는 글자가 새겨진 항아리 파편 등 한성백제의 유물들이 추가로 발견되는 등 풍납토성에서는 계속해서 한성 백제의 비밀을 벗겨줄 다양한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2011년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조사를 통해 기초공사구간과 출토 유물 등을 통해 단계별 축조시기와 증축과정 등에 대한 설명을 발표했는데요, 기초공사구간에서 수습된 시료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 등을 통하여 성벽이 기원후 235~260 또는 290~325년경에 축조된 것으로 산출되었다고 합니다.
  2012년에는 중국의 왕즈가오 교수가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시유도기(3세기 중국 동오~동진 시대의 유물로 추정)를 근거로 하여 풍납토성의 축조 연대가 중국 동진 중후기에서 남조 초인 4세기 후반에서 5세기라고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시유도기 연대를 성벽 축조 연대와 곧장 결부시키기는 어렵다"는 국내 학계의 반박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풍납토성의 연대는 아직도 연구 끊임없는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요, 풍납토성의 정확한 성격과 연대를 위해서는 연구와 조사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풍납토성이 초기 백제의 중요한 성으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중요한 문화재라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풍납토성은 백제사에 미치는 영향만으로도 충분한 의의를 지니지만, 풍납토성의 발굴 사례에서는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는데요, 바로 문화재 보존과 개인의 재산권 사이의 갈등입니다. 지난 25일 풍납토성 사적 지정 50주년을 맞아 개최된 학술회의에서 선문대 이형구 교수는 “풍납토성은 1963년 사적 지적 당시 성벽만 문화재로 지정하고 내부는 제외됨으로써 오늘날까지 극심한 갈등이 초래됐다”고 발표했습니다. 
  풍납토성 안쪽은 이미 오래전부터 주거 밀집 지역이었기 때문에 발굴 과정에 있어 주민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90년대 재개발 열풍으로 풍납동 지역 역시 주택 개량과 재개발의 대상이 되었지만, 풍납토성의 발굴이 진행 과정에서 문화재보호법 따라 공사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화재 보존이라는 공익적인 면에서는 당연한 행위이지만 개인의 측면에서 보면 재산권을 침해당한 것이기 때문에 반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발굴 과정에서 재건축 당사자와 조사기관 사이에 발굴 기관 및 발굴조사비 문제로 갈등이 생겨났고, 발굴이 중단되는 일이 생기는가 하면 2000년 5월 13일에는 문화재 발굴로 인한 재산권 침해를 우려한 재건축아파트 조합원들이 발굴과 보존 여부에 대한 결정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굴착기로 밀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2002년에는 삼표 산업이 풍납토성의 서벽 밖에 새로운 사옥 건물을 짓기 위해 시굴조사를 의뢰했는데요, 시굴 조사 결과 시굴 결과 공사가 진행될 개흙층 주변에 문화재가 없다는 결론이 지어져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터파기 작업 중 국립문화재연구소 측이 백제 시대 문화층이 존재함을 공사가 중단되었고, 2002년 말부터 2003년 3월까지 발굴이 진행된 끝에 풍납토성 서벽과 해자로 추정되는 추정 유구가 발굴되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 문화재에 대한 모호한 지정과 발굴 과정에서의 미숙함, 주민들의 피해와 불만 사항을 해결해 줄 문화재 행정부서의 부재와 문화재에 대한 시민 의식의 부재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습니다. 하지만 풍납토성을 둘러싼 논쟁들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지난 7월 1일에는 국회가 문화재 보존과 주민 재산권 간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풍납토성 문제 해결을 위한 피해주민 초청 증언대회를 열었고, 10월 25일에 개최되었던 풍납토성 사적 지정 50주년 학술대회 역시 주민 생활권 보호와 문화재 보존 사이에서 일어나는 충돌을 주제로 제시하였습니다. 문화재 보존과 주민의 생존권 보호 간의 대립점 역시 앞으로 우리가 해결해나가야 할 숙제로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백제사를 푸는 열쇠로 여겨지지만 그만큼 수많은 논점을 남기고 있는 풍납토성,
그렇다면 현재의 풍납토성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입구 부분은 공원으로 잘 조성이 되어있어 산책하기에도 좋은데요,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언덕이 바로 풍납토성입니다


풍납토성 (사적 제11호/백제 초기)

이 성은 흙을 다져 쌓은 성으로 원래 경기도 광주에 속하였으나, 서울시에 편입된 후에는 흔히 풍납토성으로 불린다. 1964년 시굴조사에서 백제 초기에 축조된 성으로 밝혀졌으며, 1997년 이후 성 내부와 성벽에 대한 발굴조사가 여러 차례 실시되어 자세한 내용이 알려졌다. 풍납토성은 남북으로 길쭉한 타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 둘레는 원래 3.5km 이상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1925년 홍수로 인해 서벽이 유실되어 지금은 2.2km 가량이 남아 있다. 성벽은 모래와 점토를 교대로 다져 쌓는 판축기법으로 축조되었는데, 기저부의 폭은 43m, 높이는 11m가 넘는 거대한 규모다. 성 내부에서 주거지와 의례용 건물터 등이 많이  발굴되었으며 많은 양의 백제 토기와 철기가 출토되었다. 그 외에도 기와와 와당, 문자가 새겨진 토기와 철기가 출토되었다. 그 밖에도 기와와 와당, 문자가 새겨진 토기, 중국제 도자기 등이 출토되어 왕성으로서의 위상을 보여준다. 풍납토성은 3세기 무렵 축조되어 475년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함락될 때까지 백제의 도성이었다. 발굴된 유적과 유물은 고대국가로 성장한 백제의 다양한 모습,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과 기술수준을 잘 보여준다. 


저는 답사 중에 사정이 생겨서 동쪽 토성 부분만 보고 돌아와야 했는데요,
쭉 이어진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가 끊겨 있기 때문에 지도를 통해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고 가시는 편이 좋습니다. 

토성 울타리 안으로 곳곳에 쓰레기가 버려져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주민들의 생활 공간에 위치하고 있지만, 우리의 중요한 문화재인 만큼 조금 더 관심을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위의 아파트는 풍납토성 동쪽에 위치한 극동아파트입니다.
 아파트 모양이 경사가 져 있어서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데요, 이것은 사선제한에 의한 높이 규제 때문입니다.
이는 문화재 주변 건축물에 27도 이내로 사선제한을 하여 문화재를 보전하기 위한 사적지 사선제한법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위의 사진과 같이 비교적 높은 동쪽의 토성과 달리 남쪽의 토성은 더 평탄하다고 하는데요,
사정상 확인을 하지 못하여서 아쉬웠습니다. 풍납토성의 중앙 구간에는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던
경당지구가 역사공원으로 조성되어있다고 하니 다음에 다시 방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답사가 짧아 아쉽기는 했지만, 이번 취재를 통해 풍납토성의 이모저모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생활공간과 맞닿아 있다 보니 쓰레기를 버리시는 분이나 토성 내부에서 개와 함께 산책 하는 등 조금 아쉬운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요, 우리 모두 조금만 더 경각심을 가지고 우리 문화재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고문헌>
권오영, 『첫번의 붓질, 한번의 입맞춤』, 진인진(2009)
이기환,조유전, 『한국사 미스터리』, 황금부엉이(2004)
“풍납토성에서 백제시대 집자리, 유물등 대량 발견”.연합뉴스.1997
“풍납토성은 백제 초기 왕성”,경향신문,1999.9.13,26면
“<3가지 악재가 겹친 풍납토성 파괴> ”, 연합뉴스, 2000
“왜곡된 백제사가 풍납토성 가치 훼손” ,세계일보,2013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
국립문화재연구소 홈페이지 (http://www.nrich.go.kr/)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홈페이지(http://www.chpri.org)
제5기 문화재청 대학생 블로그기자단 한수연 기자 (maiss_@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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