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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에 세계가 열광하다
15-05-10 15:05

 1. 글로써 당나라를 감동시킨 신라의 최치원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道)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해서 변통하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에 순응해 성공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러 패하는 법이다.”
    
당나라에서 황소의 난을 일으킨 황소의 군대를 토벌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당시 당나라의 과거시험에 합격한 신라인 최치원이었다. 
최치원은 이른바 조기 유학생으로 18살의 나이에 당나라의 과거시험에 합격한 엘리트였다.
외국인이지만 당나라에서 관리로 있었던 당시 보여주었던 그의 비범성 때문에 아직도 중국에서는 최치원과 관련된 설화가 존재하고 있다.
    
설화 중에서 강제결혼을 피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매의 묘를 보고 슬퍼하며 위로의 시를 바쳤는데, 이에 감동한 두 소녀가 밤에 최치원을 찾아가 하룻밤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다양하게 재해석되어 중국의 작품속에 남아있다.
당나라에서 많은 일을 하던 최치원은 신라인이라는 뿌리를 잊지 않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신라를 위해 일을 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당시 신라의 신분제도 하에서 최치원은 6두품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그는 그의 조국인 신라에서 남은 생을 은둔하며 저술활동에서 전념하였다.
   
200710월 중국의 양주에서는 한국만큼이나 최치원의 글을 존경하는 중국인들인들이 최치원 기념관 을 개관하였다.
그만큼 최치원의 글이 중국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2. 여성의 슬픔을 노래한 여인 허난설헌과 이옥봉
유교를 신봉하던 조선은 여성에 대해 그다지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조선시대에서 글을 통해 당당히 이름이 등장한 여성이 있었다7
 
허난설헌의 가문은 학문에 대해 열린 가풍을 가졌기 때문에 딸과 아들을 동등하게 대접하고 모두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자유로운 가풍에서 생활하던 허난설헌은 15살의 나이로 결혼을 하였지만 시댁에서는 며느리가 글을 쓰고, 책을 읽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남편 역시 자신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부인을 버겁게 생각하여 부인의 곁에 있지 않았다.
   
이런 아픔 속에서 그녀는 2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묵묵히 작품을 남겨왔다.
그녀의 동생 허균이 누나가 쓴 작품을 모아 난설헌집을 만들었는데 난설헌집은 명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1711년 일본에서도 번역되어 많은 인기를 끌었다.
   
요사이 안부를 묻노니 어찌 지내시나요?
창가에 달님이 오시면 가슴속 한이 넘쳐납니다
꿈속의 내 몸, 발자국을 남기게 했다면
그대의 집 앞,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테지요
 
이옥봉(15세기 후반, 생몰연대미상) 역시 너무도 비범했던 그녀의 재능 때문에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녀의 남편 조원은 당시 최고의 문장가라 불리는 사람이었지만 부인의 재능을 품기에는 한없이 작은남자였다.
결국 이옥봉은 친정으로 돌아가 평생을 외로움과 그리움에 괴로워하다가 자신이 쓴 작품을 몸에 품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시신은 명나라에서 발견되었고, 그녀와 함께 발견된 아름다운 글들은 명나라에서 출간되어 명나라의 대표적인 시들을 수록한 시선집에도 올라올 만큼 명나라 문인들의 큰 화제가 되었다. 
조선시대 문학에서 규방문학이 자리 잡은 것은 가장 괴로웠을 그 시기를 작품으로 승화시킨 두 여인의 기여가 컸을것이다.
  
3. 한국의 패션이 세계의 아이템이 되다.(절풍건과 초림동모자) 
고구려는 동아시아를 호령할 만큼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강대국으로 아시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당시 당나라는 고구려와 적대국이었음에도 많은 고구려의 문화를 받아들였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많은 화제가 된 것은 고구려의 모자인 절풍건이었다.
 
절풍건은 고구려를 상징할 만큼 남녀노소가 모두 이용한 모자였고, 고구려의 강력한 힘을 상징하였다. 그래서 강하게 보이고 싶은 수많은 당나라인 들에게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1939615일 프랑스 파리의 패션 트렌트를 장악한 것은 다름 아닌 한국의 초립동 모자였다.
당시 한국의 무용수 최승희는 동양에 냉소적인 프랑스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 가장 한국적인 무용을 선보였다.
 
 
무용을 관람한 비평가들과 예술가들은 이례적인 호평을 하며 동양에서 온 무용수를 칭송하였는데 공연당시 초립동 춤을 추었을 때 쓴 초립동 모자는 파리지앵 여성이라면 반드시 착용해야 할 만큼 파리의 패션 트랜드를 이끌었다. 
이러한 많은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의 한류는 앞서 이루어진 수많은 한류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세계가 한류에 대해 열광하는 것은 단지 현대의 일만은 아니며, 우리의 지난 역사를 생각해 볼때 그럴만한 저력과 힘이 있었음을 인식하는 것은 앞으로의 또다른 한류를 준비하는데 중요한 바탕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역사스페셜5-미스터리 인물들의 숨겨진이야기(KBS 역사스페셜)
세기를 넘나든 조선의 사랑(권형정 지음)       
제3기 문화재청 대학생 블로그기자단 신지호 기자(dicop25@naver.com @coffee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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