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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 선생이 거주하면서 후학을 가르치던 남간정사 水에 사상을 담다
15-05-10 15:46

조선시대 후기 노론의 거두이며 대유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거주하면서 후학을 가르치던 남간정사(대전광역시 시지정 유형문화재 제4호)가 있습니다.
남간정사는 우암이 초년기에 공부하던 회덕 비래동의 아름다운 산수를 즐겨 선생 80세( 1683)에 지은 건물로, 정조 때 한 차례의 중건과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가장 최근에는 1976년에 수리된 바 있습니다. 완만한 구릉지에 위치하며 동쪽 계곡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물이 연못 앞에서 조그만 낙수(落水)를 이루고, 정사의 대청 밑을 거쳐 흘러드는 다른 물줄기와 연못에서 합쳐집니다.
 이곳에는 원래 홍농서당이 있었으며 우암 생시에는 능인암 등의 강학처가 있었습니다. 선생 사후에는 후학들이 종회사(宗晦祠)를 세우고 주자, 우암, 수암을 배향하였고, 그 후 대원군 때 훼철되었으며, 1936년 사림과 후손이 남간사를 건립하여 우암, 수암, 석곡을 배향하고 제향을 받들어 왔습니다. 현재에는 담으로 둘러싸인 남간정사 전면에는 연못과 기국정이 있으며 남간정사의 후면으로 사당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우암. 그는 누구인가?
 우암 송시열(1607~1689). 그는 한국사상사에 있어 퇴계․율곡 이후의 가장 뛰어난 인물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또, 조선왕조실록에 2847번 등장해 역사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힙니다.
 
 우암은 평생에 걸쳐 '학문의 시조를 朱子'로 삼아 흠모하고 따른 철저한 주자의 門徒로 전해집니다.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道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에도 밝았습니다. 주요 저서에는 《송자대전》 등이 있습니다.
 
남간정사 그리고 우암
  남간정사.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곳일까요?
우선 정사의 개념을 살펴보면, 원래 불교에서 근원된 것으로 정련행자(精練行者)의 옥사(屋舍)라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조선시대 이후 성리학이 발전하면서 사용된 정사랑 정신을 수양하는 곳이며, 또 학문을 가르치려고 베푼 집으로 사인(士人)․관료(官僚)인 유학자들이 심산계곡에 설치해 놓은 건물입니다.
 
 정사가 갖는 복합적인 기능측면에서는,
"선비의 생활공간은 '장수(藏修)'와 '유식(遊息)'의 두 단어로 정의되는데, '장수'는 학문을 통한 수양을 의미하며 '유식'은 즐기며 휴식하는 것이다. '유식'을 통해 '장수'할 수 있는 에너지를 보충하는 것으로 이 둘은 궁극적으로 선비들이 고도의 인격 완성을 위한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정자나 정사는 이를 실현하는 구체적이 건축공간이다"
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건축공간에 '남간'이란 이름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남간'이라는 이름은 주자가 무이구곡을 묘사한 운곡이십육영시(雲谷二十六詠詩) 중에서 제2시 '남간(南澗)'이란 시의 뜻을 취한 것입니다. 
 그럼, '남간'이라고 당호를 정한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주자의 무이구곡을 묘사한 운곡이십육영(雲谷二十六詠) 중에서 '남간(南澗)' 시의 뜻을 취해 당호를 지은 만큼, '남간'이라는 당호는 우암이 빼어난 '환경'과 '맑은 시냇물'을 필요충분으로한 '남간정사'를 통해 무이구곡을 재현하고자 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간정사의 水
 남간정사에서 나타나는 특징적 요소로는 물 처리 기법이 독특하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독특한 점은 우암의 자연관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며 더 나아가 그의 사상이 구체화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남간정사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물 처리 기법은 대청 밑으로 계곡수가 흘러 '인공과 자연이 상호관입'되는 것입니다. 인공요소인 건축물이 자연요소인 지형과 계류에 절묘하게 조합됨으로서 시각적, 청각적 효과를 얻음은 물론 의미론적인 요소로도 작용합니다.
「송자대전」에 실린 그의 시와 글들을 보면, 시․청각적 효과는 물을 통해 '유식(遊息)'을 추구한다는 점을, 물의 의미론적 요소로는 '장수(藏修)'를 삼고 있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즉, 우암이 평생 추구해온 '천리를 밝혀 인심을 바로 잡는다(明天理 正人心)'라는 '直'을 실천하는데 있어 그 사표 혹은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매개체로 '물'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난히 덥던 여름. 새로 조성된 공원입구 왼쪽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던 남간정사의 배롱나무와 시원한 그늘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자연을 매개체로 하여 자신의 사상을 구체화한 우암 송시열 선생의 지혜와 선생의 사상을 고스란히 담아낸 공간은 그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잔잔한 여운을 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제2기 문화재청 대학생 블로그기자단 이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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