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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와 서연진강의(書筵進講儀), 지식보다 예절을 중시한 왕세자 교육
15-07-07 22:56

 
조선시대에는 왕세자 교육을 위해 시설과 선생님들에게 아낌없이 투자했다. 왕세자를 위한 교육시설 투자는 이른바 동궁 건물에 대한 투자였다. 교육 환경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동궁은 기숙 시설을 갖춘 학교였다. 동궁의 중심 공간은 왕세자가 생활하는 기숙사 그리고 공부하는 교실이었다. 이 중심 공간 바깥쪽에 선생님들이 근무하는 교무실과 도서관이 있었다. 예컨대 창덕궁에서 동궁으로 이용된 저승전, 낙선당, 시민당, 춘방 같은 건물을 볼 때 저승전은 기숙사, 낙선당과 시민당은 교실, 춘방은 교무실과 도서관에 해당되었다. 동궁 안에 기숙 시설이 있었으므로 왕세자는 동궁 안에서 먹고 자는 것을 해결했다. 동궁의 기숙 시설 바로 옆에는 교실이 있었다. 그러므로 왕세자는 먹고 자고 또 학교에 가는 데 들어가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아울러 교육에 필요한 도서관을 함께 만들어 필요한 책을 수시로 찾아볼 수 있게 했다. 이 같은 동궁의 건물 구조는 왕세자를 효율적으로 교육시키기 위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왕세자 교육의 핵심 투자는 역시 선생님들에 대한 투자였다. 실력과 인품이 뛰어난 선생님들을 확보하려면 그에 합당한 처우를 보장하고 자긍심도 갖게 해야 했다. 조선시대 왕세자의 선생님들이 그랬다.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 최고의 인재들과 당대 최고의 권력자들이 왕세자의 선생님이었다. 왕세자의 선생님들은 시강원(侍講院)이라는 곳에서 근무했는데, 시강원은 달리 춘방(春坊)이라 불리기도 했다. 시강원의 선생님들은 전임 선생님과 겸임 선생님의 두 종류로 나뉘었다. 겸임 선생님은 양반 관료의 수뇌들이었다. 영의정이 겸임하는 사(師) 한 명, 좌의정이나 우의정이 겸임하는 부(傅)한 명, 종1품의 찬성이 겸임하는 이사(二師) 한 명, 정2품이 겸임하는 좌빈객(左賓客) 한 명과 우빈객(右賓客) 한 명, 종2품이 겸임하는 좌부빈객(左副賓客) 한 명과 우부빈객(右副賓客) 한 명이 겸임 선생님들이었다. 지금으로 보면 이들은 국무총리, 부총리, 각부 장관에 해당하는 고위 관료들이었다.
 
 
양반 관료의 수뇌들을 왕세자의 겸임 선생님에 임명한 까닭은 현장의 경험과 목소리를 왕세자 교육에 반영하기 위해서였다. 유교 경전과 역사책만으로 이루어지는 왕세자 교육은 자칫 이론으로만 흐를 수 있었다. 이를 막으려면 현장에서 실무를 맡고 있는 노성한 경험자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필요했다. 왕세자의 겸임 선생님들이 바로 그런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겸임 선생님들은 각각의 업무가 있으므로 한 달에 두세 번밖에 시간을 내지 못했다. 이에 따라 왕세자 교육의 대부분은 전임 선생님들이 맡았다. 시강원의 전임 선생님들은 종3품의 보덕(輔德) 한 명, 정4품의 필선(弼善) 한 명, 정5품의 문학(文學) 한 명, 정6품의 사서(司書) 한 명, 정7품의 설서(設書) 한 명 등 모두 다섯 명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추천을 받아 임명되는 정3품의 찬선(贊善) 한명, 정4품의 진선(進善) 한 명이 추가되었다. 이들 전임 선생님은 기본적으로 문과에 합격한 실력자들이었다. 게다가 가문도 좋고 30대에서 40대 정도의 젊은 나이였다. 겸임 선생님이 노성한 경험자들임에 비해 이들 전임 선생님은 대체로 이상에 불타는 원칙주의자들이었다. 왕세자에게 이론과 실제 그리고 이상과 현실을 균형 있게 교육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마련된 것이 바로 겸임 선생님과 전임 선생님의 제도였던 것이다.

시강원의 선생님들은 품계로 구별될 뿐 특정한 전공과목이 따로 없었다. 그러므로 시강원의 선생님들은 모든 과목을 가르칠 수 있었다. 선생님들은 순번을 정해 번갈아가면서 유교 경전과 역사를 가르쳤다. 보통은 경전과 역사를 같이 교육했는데, 경전은 철학적 이론이라는 측면에서, 역사는 구체적인 사례와 실증이라는 측면에서 이용했다. 유교 경전과 역사를 가르치다가 해당 과목이 끝나면 다음 과목으로 넘어갔다. 이때 왕세자에게 어떤 과목을 가르칠지는 왕과 시강원의 선생님들이 의논해 결정했다. 사서삼경과 같은 책은 한 번 교육이 끝났어도 또다시 교육시키곤 했다. 유교 교양을 습득하는 데 필요한 경전과 역사는 되풀이해서 교육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교과 과정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왕세자는 특별하게 시한을 정하는 일이 없었다. 즉 어떤 책을 어느 기간에 끝낸다고 하는 예상이 불가능했다. 그것은 다음 교과서로 어느 책이 선정될지도 알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책을 끝내는 데 들어가는 시간도 전적으로 그 책의 분량과 왕세자의 학습능력에 달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왕세자가 교육받는 책의 종류와 그 책을 교육받는 데 들어가는 시간은 왕세자마다 차이가 났다.

그런데 시강원에 겸임 선생님과 전임 선생님이 있었기에 왕세자가 받는 수업 역시 겸임 선생님에게 받는 수업과 전임 선생님에게 받는 수업이 있었다. 왕세자는 전임 선생님에게 하루 세 차례 수업을 받았다. 반면 겸임 선생님에게는 한 달에 두세 차례 정도의 수업을 받았다. 왕세자가 선생님들에게서 받는 수업을 통칭하여 서연(書筵)이라고 불렀는데, 특히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겸임 선생님과 전임 선생님을 모두 모시고 공부하는 것을 회강(會講)이라고 하였다. 왕세자가 되면 성균관에서 입학례를 거행한 후 시강원 선생님들로부터 교육 즉 서연을 받았다. 서연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왕세자와 선생님들이 교실에서 만나야 했다. 그 교실은 왕세자가 생활하는 건물과 선생님들이 근무하는 교무실 중간쯤에 있었다. 교실에서 왕세자와 선생님들이 만나 수업하는 모든 절차는 서연진강의(書筵進講儀)에 따라 거행되었다. 이에 의하면 왕세자가 공부할 의자는 교실의 동쪽 벽 아래에 서쪽을 향하도록 설치했다. 반면 선생님들이 앉을 의자는 교실 서쪽 벽 아래에 동쪽을 향하도록 설치했다. 좌석 배치가 끝나면 왕세자가 평상복 차림으로 먼저 교실에 들어가 기다렸다. 선생님들이 대문 밖에 다 모이면 왕세자는 교실에서 나와 동쪽 계단을 통해 내려와 서쪽을 향해섰다. 선생님들이 대문 안으로 들어와 교실로 들어가면 왕세자는 선생님들을 따라 교실로 들어갔다. 선생님들이 제자리에 가서 서면 왕세자는 두 번 절을 올렸고 선생님들은 답배했다.

수업할 때 왕세자와 선생님들은 방의 동쪽과 서쪽 의자에 마주 앉아 수업했다. 수업할 부분을 선생님이 먼저 읽고 왕세자가 따라 읽는 방법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이어서 선생님들이 방금 읽은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선생님들의 설명 이후, 왕세자가 질문할 것이 있으면 묻고 선생님들이 대답했다. 묻고 답하는 시간이 끝나면 수업한 내용을 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어 외우게 했다.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들이 먼저 방에서 나갔다. 왕세자는 뒤따라 나온 뒤 동쪽 계단 아래에 서서 선생님들이 대문 밖으로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이처럼 왕세자의 교육은 예절로 시작해서 예절로 끝났다. 왕세자로 하여금 이렇게 복잡한 예절을 수업 때마다 실천하도록 한 이유는 예절을 통해 왕세자의 행동을 바르게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책을 통한 문자 교육만이 아니라 선생님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예절 하나하나가 모두 교육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왕세자의 서연진강의(書筵進講儀)는 바른 예절에서 바른 행동이 나오고 나아가 바른 마음도 나온다고 생각했던 우리 조상들의 교육철학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출처:한국문화재재단  글˚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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