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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도전장포새우젓 1.jpg
 
 
살아숨쉬는 고궁문화 궁중의 독특한 풍습과 놀이
15-07-07 23:38

조선시대 궁의 주인은 왕이었다. 왕에게 궁은 공적 일터였고 사적 쉼터이자 가정이었다. 왕의 일을 보좌하고 또 왕의 쉼과 가정을 보좌하기 위해 수 천 명의 사람들이 궁에서 일했다. 궁에 살던 그들 역시 사람이었기에 궁중에도 풍습과 놀이가 있었다. 다만 궁의 주인이 왕이기에 궁중에는 사가와는 다른 독특한 풍습과 놀이가 존재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로 궁중의 풍습과 놀이는 왕의 개성과 직접 관련되었다. 왕이 궁을 공적 일터로 보게 되면 궁중의 풍습과 놀이는 공적 성격이 강해졌다. 반면 왕이 궁을 사적 쉼터로 본다면 궁중의 풍습과 놀이는 사적 성격이 강해졌다. 이런 사례를 연산군에게서 찾을 수 있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장악원 기생들을 크게 증원했다. 연산군은 갑자년 10월에 장악원 기생을 기왕의 150명에서 300명으로, 또 12월에는 1천 명으로 증원했다. 연산군은 장악원 기생 중에서 흥청(興淸)을 입궁시켜 궁에서 생활하도록 했다. 이렇게 입궁한 장악원 흥청은 최초 3백 명에서 시작하여 후에는 2천여 명에 이르렀다. 수천 명의 흥청이 입궁하면서 궁은 연산군의 놀이터처럼 변해갔다. 연산군은 궁 안에서 말 그대로 흥청망청 놀며 즐겼다. 나아가 창덕궁 후원에 서총대라고 하는 대규모 행락시설을 건설하려고 했는데, 서총대는 지금의 창덕궁 후원 영화당 앞에 펼쳐있는 넓은 공간이었다.
만약 연산군의 구상대로 서총대가 완성되었다면 그것은 대단한 장관이었을 것이다. 열 길 높이로 쌓아올린 거대한 서총대 앞으로는 탁 트인 광경이 펼쳐지고, 서총대 뒤편으로는 녹음으로 우거진 산이 솟아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서총대 앞쪽의 거대한 연못에 떠있는 섬과 배들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을 것이다. 이 서총대에서 연산군은 흥청들과 마음껏 즐기려 했던것이다.
 
그러나 서총대는 완성되지 못했다. 공사가 시작된 지 1년여 만에 중종반정이 발발함으로써 연산군은 왕위에서 쫓겨났다. 반정명분의 하나가 바로 서총대 공사였기에, 반정 후에 서총대는 파괴되었다. 석축은 해체되었고 연못 공사는 중지되었다. 그렇게 생긴 공터는 서총대 대신 춘당대라고 불렸으며, 연못은 춘당지라고 불렸다. 중종반정 이후로 조선 왕들은 춘당대에서 과거 시험을 시행하곤 했다. 조선 왕들은 연산군이 후원에 거대한 행락시설을 건설하다가 쫓겨난 사실을 반면교사로 삼아 바로 그 자
리를 일터로 바꾸었던 것이다. 나아가 궁은 왕의 사적인 놀이터가 아니라 공적인 일터라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조선시대 왕은 유교 국가이자 농업 국가인 조선의 통치자였다. 이런 왕의 성격이 궁중의 풍습과 놀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궁중의 풍습 중에서는 연말연시의 풍습이 중요했는데, 특히 섣달그믐인 제석(除夕) 때의 풍습이 연말의 대표적인 풍습이었다. 제석 날 낮에 왕은 왕비, 종친, 궁중 관료, 외국인 등과 함께 나례(儺禮), 처용놀이, 잡희(雜戱) 등 다양한 놀이를 구경하였고 밤에는 대규모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불꽃놀이는 1년간 쌓인 잡귀를 모두 몰아내고 새해에는 만복을 맞이하겠다는 주술적 의미와 여진이나 일본 등의 주변 민족에게 무력을 과시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불꽃놀이가 끝난 후에는 종정도(從政圖), 작성도(作聖圖) 등의 주사위놀이나 격구를 하며 밤을 새웠는데, 왕은 주사위 놀이를 하면서 돈을 내걸어 분위기를 돋우기도 하였다.
 
나례란 궁중과 한양 각처에 귀신을 잡아먹는 사자들을 보내 잡귀를 쫓는 가면놀이였다. 나례 후에는 처용놀이 또는 잡희라는가면놀이를 공연하였다. 처용놀이는 처용의 탈을 쓰고 귀신을 쫓는 놀이였다. 잡희는 일종의 마당극으로 사설과 노래, 연기를 함께 하였으며, 편전의 월대 위에서 공연하였다. 배우들은 시세를 풍자하는 가면과 복장을 하고, 춤과 함께 사설을 늘어놓았다. 사설은 대부분 양반 관료의 비리와 부패를 풍자하는 내용으로, 관람자들은 잡희를 보면서 재미를 느낄 뿐 아니라 백성들의 여론 또한 알 수 있었다. 섣달그믐의 하이라이트는 대궐 후원에서 시행하는 불꽃놀이였다. 불꽃놀이를 위해서는 폭죽을 만들고 이를 쏘아 올리는 포대도 설치해야 했다. 당시로써는 화약과 포대 모두가 첨단 무기였으므로 불꽃놀이는 병조와 군기시(軍器寺)의 전문가들이 준비하였다.

1. 득중정어사도의 불꽃놀이, 『화성능행도』 부분, 2.격구도 『무예도보통지』, 3.원호(圓壺)와 방호(方壺) 『삼례도집(三禮圖集)』

연말 풍습에 이어 연시 풍습으로는 정월 대보름이 중요했다. 조선시대에 정월 대보름은 설날, 추석과 더불어 3대 명절로 쳤다. 민간에서는 대보름날에 부럼을 깨고 더위를 팔았고, 보름달이 떠오르면, 달을 보면서 소원을 빌고 쥐불놀이를 하였다. 이날 궁궐 후원에서는 승정원이 주관하는 내농작(內農作) 행사가 거행되었다. 내농작은 『시경』의 ‘빈풍칠월(豳風七月)’ 편을 대본으로 하였는데, ‘빈풍칠월’에는 새와 짐승, 밭갈이하는 지아비, 들밥을 나르는 지어미, 누에치는 여자, 베 짜는 할멈 등이 등장했다. 왕은 좌우로 편을 나누어 어느 쪽이 더 정교하게 이들의 모양을 만드는지 경쟁시킨 후 이기는 쪽에 상을 내렸다. 내농작은 왕과 궁중 관료들에게 일 년 농사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행사였다.
농업에 관련된 또 다른 궁중 풍습으로는 기우제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수년씩 계속되는 가뭄 피해 때문에 비를 기원하는 각종 기우제를 지냈다. 궁중 기우제는 경복궁의 경회루, 또는 창덕궁의 후원 등에서 거행했는데, 도롱뇽을 단지에 담아 놓고 아이들로 하여금 나무로 두드리면서 비를 내리면 풀어 주겠다고 합창을 하게 하였다. 이를 ‘석척기우제(蜥蜴祈雨祭)’라고 하는데, 도롱뇽을 비바람을 일으키는 용의 일종으로 간주한 결과였다.

한편 조선 초기만 해도 왕의 놀이는 몹시 활동적이었다. 태조 이성계나 태종 이방원의 경우 틈만 나면 매사냥을 즐겼다. 그러나 왕이 매사냥을 자주 다니는 것은 좋지 않다는 비난이 일어나 점차 줄어들었다. 그 대신 왕의 놀이는 격구와 투호 및 활쏘기에 집중되었다. 이 중에서 조선 초기 왕들이 즐긴 대표적인 놀이는 격구였다. 격구(擊毬)란 말 그대로 골프채와 비슷한 봉으로 공을 치는 놀이었다. 그래서 격구는 타구(打毬) 또는 봉희(棒戲)라고도 하였다. 세조는 “우리 선왕 때부터 겨울이면 격구를 하였고, 여름이면 투호를 하였으며, 봄과 가을에는 격구를 하였고 아울러 활쏘기를 하였다.”라고 언급했다. 조선 초기 왕들은 여름을 제외한 봄, 가을 그리고 겨울에 격구를 즐겼다. 그 이유는 조선 왕조의 개국시조 태조 이성계가 격구의 명인으로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조선 초기 기록에 의하면, 격구에 쓰이는 봉의 모양은 숟가락과 같은데, 아랫부분의 크기는 손바닥만 하였으며 이 부분의 재료는 물소 가죽이었다. 또한, 봉의 자루 부분은 두터운 대나무를 합쳐서 만들었다. 공은 나무로 만들었는데, 마노를 쓰기도 하였으며 크기는 달걀만 했다. 공을 넣는 구멍은 주발만 하게 팠는데, 이곳을 와아(窩兒)라고 하였다. 치는 방법은 서서 치기도 하고, 무릎을 꿇고 치기도 하는 등 다양했다. 그러나 성리학이 확산되면서 격구는 점점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성리학자들이 놀이와 무예를 부정적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격구는 왕의 놀이로써는 점차 쇠퇴했다. 그 대신 투호가 권장되었다. 투호는 화살을 항아리 모양의 호(壺) 안에 던져 넣는 놀이였다. 호에는 둥근 항아리 모양의 원호(圓壺)와 네모항아리 모양의 방호(方壺)가 있었는데, 투호는 『예기(禮記)』에도 실려 있는 매우 유교적인 놀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 들어 투호는 왕실에서뿐만 아니라 양반가에서도 유행하는 상류층의 놀이가 되었다.

『예기』에 의하면 투호는 잔치에서 주인과 손님이 기예를 겨루던 예법이었다. 투호 준비를 마치면 주인이 손님에게 “저에게 구부러진 화살과 못생긴 호가 있으니 청컨대 그것으로써 손님을 즐겁게 해드리고자 합니다.”라고 청한다. 손님은 “선생에게 맛있는 술과 좋은 안주가 있어서 제가 이미 대접을 받았는데, 또 거듭 즐겁게 해 주시겠다고 하시니 감히 사양하겠습니다.”라고 사양한다. 주인이 다시 “구부러진 화살이요 못생긴호이니 사양하실 것이 못되어 감히 굳이 청합니다.”라고 한다. 손님 역시 “저는 이미 대접을 받았는데도 또 거듭 즐겁게 해 주시겠다고 하시니 감히 굳이 사양하겠습니다.”라고 다시 사양한다. 그러면 주인이 세 번째로 요청하고 그때야 손님이 허락한다. 이처럼 투호는 예법을 중시하는 유교적 놀이었다. 조선 건국 이후 격구 대신 투호가 왕의 놀이로 권장되는 것은 그만큼 왕 역시도 유교화 되어 가는 것임을 의미했으며 궁중의 풍습과 놀이 역시 공적 성격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했다.
               - 출처: 한국문화재재단 글 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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