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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와 출산 의례, 종교적 신성함으로 바라본 생명 탄생
15-07-08 00:26
 
조선시대 산실청(産室廳)은 임신 중인 왕비의 건강을 관리하던 곳으로 출산 예정 서너 달 전쯤에 설치되었다. 대부분 열 달 만에 출산하지만 한두 달 일찍 조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설청은 왕비가 거처하는 중전 부근에 마련되었다. 산실청에는 어의와 의녀, 조정대신이 배속되었다. 어의들은 탕약 조제, 침, 뜸, 진맥 등 한의학의 각 분야에서 당대 최고의 실력자들이었다. 의녀는 여의사였다. 산실청의 책임자는 현임 정승이나 원로대신이 맡았다. 임신 중인 왕비의 건강을 유지하고 좋은 후손을 낳게 하는 일이 왕조 국가에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나랏일이었기에 그랬다. 산실청이 설치되면 어의와 조정대신들은 비상 대기 상태로 일했다. 의녀도 왕비 옆에서 밤낮으로 머물렀다. 왕비의 몸에 약간의 이상이라도 발견되면 의녀는 곧바로 산실청의 어의들에게 알렸다. 최고 실력의 어의들이 즉시 처방을 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왕비의 출산 예정 한두 달 전쯤에는 산실(産室)을 만들었다. 산실은 출산을 위한 방으로서 왕비가 거처하는 중전에 만들었다. 이렇게 일찍 산실을 만드는 이유는 왕비에게 무사 출산의 확신을 주기 위해서였다. 조선시대 왕비의 출산을 위해 수술하거나 마취하는 일은 없었다. 출산에서 산모와 태아의 안전은 거의 전적으로 산모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그러므로 산모가 무사 해산에 대한 확신과 함께 심리적인 안정감을 갖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몇 달 전에 산실을 만들어 산모에게 친숙해지도록 하고, 신생아 역시 몇 달 동안 낯을 익힌 의녀들로 하여금 받게 한 것은 모두 산모로 하여금 심리적 안정감을 갖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산실을 만들 때 산실 북쪽 벽에는 붉은색으로 만든 안산도(安産圖)라는 부적을 붙였다. 이 부적은 산실에 혹시 있을지도 모를 잡귀들을 몰아내기 위한 조치였다. 안산도 아래에는 최생부(催生符)와 차지부(借地符)라는 부적을 붙였다. 최생부는 산모의 무사 출산을 바라는 부적이었고, 차지부는 출산을 위해 산실 공간을 빌리니 하늘과 땅의 신들은 잡귀를 몰아내고 산모와 아이를 보호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산실의 바닥에는 왕비가 출산할 때 쓸 자리를 깔았다. 맨 아래에는 고운 볏짚을 깔고, 그 위에 볏짚으로 만든 빈 가마니를 올렸다. 그 위에 풀로 엮은 돗자리, 양털 방석과 기름종이, 백마 가죽, 고운볏짚을 차례로 깔았다. 해산 자리의 머리 쪽으로는 날다람쥐 가죽을 두고 다리 쪽으로는 비단을 두었다. 백마 가죽, 날다람쥐 가죽은 무사 해산과 건강한 아들을 낳기 바라는 뜻에서 사용했다. 이어서 “산실 공간을 하늘과 땅의 신명에게 빌리니 이곳을 보호해주십시오”라는 내용의 주문을 세 차례 읽었다. 주문이 끝난 뒤에는 왕비가 해산할 때 잡을 말고삐를 매달았다. 천장에는 구리 방울을 달았다. 출산 중 왕비에게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즉시 사람들을 부르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으로 출산 자리에 깔았던 볏짚을 출산 후 내걸기 위하여 산실문 밖에 세 치 길이의 큰 못 세 개를 박았다. 못 위에는 붉은색 실을 걸었는데 이것은 후에 금줄 역할을 하였다.
 
조선 왕실의 산실은 『동의보감』의 처방에 따라 만들었는데, 신비한 비밀 의식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산실은 근본적으로 천지신명의 가호를 받아 무사히 출산하고자 하는 소망에서 만들어졌다. 이를 통해 왕비는 무사 해산을 확신할 수 있었다. 산실이 설치된 이후에는 권초관(捲草官)을 뽑았고 그에 의해 권초제(捲草祭)가 거행되었다. 권초관과 권초제 역시 왕비의 무사 출산을 위한 조치였다. 권초관은 판서급 이상의 고위 관리 가운데서 뽑았는데, 다복한 사람 중에서 골랐다. 아들을 여럿 두고, 부모 형제도 모두 장수하며, 가정이 화목하고 무난하게 출세 길을 달리는 복 많은 사람이 권초관에 뽑혔다. 조선 전기 권초관은 왕비의 출산 당일 소격서(昭格署)에서 옥황상제, 태상노군 같은 도교 신들에게 신생아의 만복을 기원하며 제사를 올렸다. 그것도 하루가 아니라 사흘 동안이나 올렸다. 소격서는 경복궁 옆에 있었는데, 지금의 삼청동 자리였다. 도교에서 신앙하는 3청(淸) 즉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을 모신 삼청전이 그곳에 있었다.
 
권초관은 옥황상제와 태상노군 앞에 온갖 제물을 차려놓고 사흘간 치성을 드렸다. 치성은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리는 것이었는데, 이를 초제(醮祭)라고 했다. 제물 앞에는 신생아가 입을 옷가지를 놓고 치성을 드렸다. 신생아가 아들이면 오색 비단, 모자, 두루마기 옷감, 홀, 신발, 띠를 놓았으며 딸일 때는 비녀, 치마, 신발을 놓았다. 사흘 후 한밤중에 권초관은 왕비가 출산한 산실로 갔다. 산실 문 밖에 도착한 권초관은 가지고 온 옷가지들을 탁자에 올려놓고 분향재배했는데, 이것이 권초제였다. 권초제 이후 옷가지들은 신생아의 건강과 만복을 보호하기 위한 옷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소격서는 임진왜란 이후 유학자들의 비판을 받고 사라졌다. 유교를 신봉하던 양반들은 도교의 신들을 모시는 소격서가 국가 기관으로 존재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하였다. 소격서가 폐지됨으로써 왕비의 출산 의례에도 약간의 변화가 나타났다. 우선 소격서에 모신 도교의 신들앞에서 거행하던 초제가 없어졌다.
 
하지만 임진왜란 뒤에도 권초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는데, 다음과 같이 거행되었다. 왕비가 출산한 지 7일 째 되는 아침에 권초관은 산실로 갔다. 산실 문 밖에는 큰 탁자를 마련하고 그 위에 쌀, 은, 실, 비단을 놓았다. 쌀은 10말씩 든 자루 10포였다. 쌀이 10가마였으니 무척 많은 양이라 할 수 있다. 은은 100량, 실은 10근, 비단은 10필이었다. 권초관은 이 상을 향해 두 번 절을 올렸다. 탁자 위의 쌀, 은, 실은 신생아의 부귀영화와 무병장수를 상징했다. 신생아의 미래를 위해 천지신명에게 이런 제물을 바치고 기원했던 것이다.
 
 
권초관은 두 번 절을 한 후에 산실문 위에 걸려 있는 산 자리를 걷어서 함에 넣었는데, 이것이 권초(捲草)였다. 권초관은 산 자리가 든 함을 상 위에 올려놓고 다시 두 번 절을 올린 후, 자루에 넣어 붉은 보자기로 싸고 겉에 자신의 관직과 성명을 기록했다. 이는 의장을 갖추어 권초각(捲草閣)으로 옮겨 보관했다. 출산 후 3일 또는 7일째에는 태를 정결한 물로 씻는 세태(洗胎)라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출산 때 받아 두었던 태는 백자 항아리에 넣어 보관했는데, 세태는 산실의 뒤란에서 태를 물로 백 번에 걸쳐 씻은 다음 또다시 향기로운 술로 한 번 더 씻는 의식이었다. 씻은 태는 작은 항아리에 넣고 이것을 다시 동전 하나를 넣은 커다란 백자 항아리에 담았다. 이것이 이른바 태항아리였다. 태를 넣고 나면 입구를 끈으로 묶어 밀봉하고 세태한 날짜와 책임자, 태 주인공의 이름을 종이에 적어서 붙여 두었다. 출산 후 7일이 지나면 길일을 골라 안태사(安胎使)가 태항아리를 옮겨 태실에 안장했다. 태를 넣은 이중의 항아리를 둥그런 돌 상자에 넣고, 태의 주인공과 안태한 날짜를 쓴 지석을 석실에 같이 넣어 봉안했다. 석실 위에는 부도처럼 생긴 석물을 설치하였고, 이 석물을 보호하기 위해 석실 주변에 난간을 두르고 앞에는 비석을 세웠다. 세태와 안태 역시 신생아의 만복을 절대자에게 기원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처럼 조선 왕실에서 신생아의 미래를 절대자에게 기원했던 것은 생명 탄생을 종교적 신성함으로 바라본 결과였다. 그러므로 세상에 갓 태어난 신생아의 몸과 마음이 잘 자라기를 기원하는 것은 새 생명에 대한 외경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출처: 한국문화재재단 글˚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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