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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악기 이야기 600년, 조선 궁중 악기의 전통
15-07-08 11:35

유교(儒敎)를 기본 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예(禮)와 악(樂)으로써 임금과 신하, 백성들이 자연과 더불어 이치에 맞게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다. 예(禮)를 엄격히 하여 만물을 구별하고 화평한 악(樂)을 통하여 만물을 조화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덕치(德治)를 꾀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 사회는 음악의 역할과 기능을 매우 중요하게 인식했으며 음악의 사상과 실제를 제대로 표현해낼 수 있는 악기의 제작에도 자연스레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조 초기에는 주로 중국 명나라에서 들여온 악기를 궁중의례에서 사용했는데, 자주적 문화 의식이 강했던 세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우리 정서와 풍토에 맞는 악기들을 제작하게 되었다. 즉 1425년(세종 7년)에는 ‘악기도감(樂器都鑑)’ 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가야금(伽倻琴)·거문고(玄琴)·향비파(鄕琵琶) 등 우리나라 악기뿐만 아니라 금(琴)·슬(瑟)·대쟁(大箏)·아쟁(牙箏)·당비파(唐琵琶) 등 중국계 악기를 제작하여 여러 국가 제사와 궁중 연향에 사용했다. 국가 제사와 궁중 연향에서 가장 중요했던 악기는 피아노와 같이 기준음을 정해주는 역할을 했던 편종과 편경이다. 궁중음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편종·편경은 중국의 궁중에서 사용하는 것을 그대로 들여온 것이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악기를 만들어도 불협화음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세종은 장영실과 같은 과학자와 박연과 같은 음악이론가 등을 참여시켜 편종과 편경의 국산 제작 프로젝트를 실시한다. 국산 편종과 편경을 만들기 위하여 제일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음 조율의 기준이 되는 율관(律管)을 만드는 것이었다. 마침 율관 제작의 기준 단위가 되는 기장이라는 곡식의 낱알인 거서(秬黍)가 황해도 해주 지방에서 발견되어 우리나라 기장을 기준으로 한 율관을 만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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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중국보다도 더 좋은 음질을 가지고 있는 경석(磬石)이 남양(오늘날 화성시)에서 발견되어 1427년(세종 9년) 이를 채취하여 총 528매의 편경을 만들어 사용했다. 편경은 한 틀에 16개의 경을 매다니 528개면 모두 33개 틀의 편경이 만들어진 셈이다. 요즈음 편경 한 틀 제작 값이 어림잡아 4000만 원 정도이니 33개 틀이면 약 13억 원 정도의 대규모 예산이 소요된 셈이었다. 이와 같이 세종조에 이루어진 방대한 편경의 제작은 궁중음악문화의 기틀을 바로 세우기 위한 백년지대계의 첫 단추를 끼우는 일이었다. 또, 세종 11년(1429년)에는 주종소(鑄鐘所)를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편종의 역대 제도에 대하여 연구하고 조회와 제향에 사용되는 종을 만들고자 했다. 중국에서 만든 기존 편종은 황종(黃鐘)에서 응종(應鐘)까지의 12개 종이나 황종(黃鐘)에서 청협종(淸夾鐘)까지의 16개 종을 각각 크기로써 음정을 구별했는데 조선 세종 때부터 종의 크기는 그대로 두고 두께로서 음정을 구별했다. 오늘날 연주되고 있는 편종은 두께의 좁고 넓음에 따라 음정이 달라지는 후박법(厚薄法)의 제도를 이어받은 것이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은 조선 궁중에서는 사라진 악기들을 대체하기 위하여 지방 관아에 장고·비파·가야금·아쟁·해금 등을 만들어 올려 보내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681년(숙종 7년)에 ‘악기주성청(樂器鑄成廳)’을 설치하여 편종, 방향과 같은 쇠붙이로 된 악기를 만들게 했다. 이듬해인 1682년(숙종 8년)에는 ‘악기조성청(樂器造成廳)’을 두어 종묘제례와 같은 제향에 쓰이는 악기를 만들게 했다. ‘악기조성청’에서는 악기는 물론이고 악공의 관복(冠服)이나 수반되는 의물(儀物)까지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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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기조성청’의 상세한 제작 내용 등은 『인정전악기조성청의궤(仁政殿樂器造成廳儀軌)』(1745년), 『경모궁악기조성청의궤(景慕宮樂器造成廳儀軌)』(1777년), 『사직악기조성청의궤(社稷樂器造成廳儀軌)』(1804년)와 같은 조선왕실 의궤(儀軌)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이와 같은 악기 제작과 관련한 의궤의 앞부분에는 악기 제작을 담당한 관리 및 장인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다음으로 ‘악기조성청’에서 왕에게 올린 보고서인 계사(啓辭)가 있고, 악기를 제작하는 데 소요된 물품을 각 악기별로 제시한 품목(稟目)이 뒤를 따른다. 이어서 ‘악기조성청’과 관련 기관 간에 주고받은 공문서인 이문(移文), 내관(來關), 감결(甘結)과 악기와 관복 제작에 참여한 공장(工匠)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다음에는 의궤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이 나오고, 마지막으로 실제 악기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소요된 물품을 재정리한 별공작등록(別工作謄錄)으로 마무리된다. 이를 종합해보면 ‘악기조성청’의 관리들은 국가 전례를 담당하는 예조(禮曹)와 음악·무용을 담당하는 장악원(掌樂院) 소속의 관원(官員)들이 겸임했고, 악기를 직접 제작하는 별공작(別工作)은 선공감(繕工監)의 관리가 참여했다. 또, 호조(戶曹), 병조(兵曹)의 소속 관청의 인력과 물품을 지원받기도 했다. ‘악기조성청’은 궁중음악기관인 장악원(掌樂院) 내에 설치되었고 악기를 만드는 장인은 궁가(宮家)나 군문(軍門)에 소속된 사람들 중에서 선발했다. 악기의 제작 재료는 고양 군수·인천 부사·파주 목사 등 지방관들에게 배당하여 올려 보내도록 했다. 또, 옥을 깎는 기술을 가진 옥장(玉匠), 조각에 소질이 있는 조각장(彫刻匠) 등 총 43개 분야에 148명의 장인이 참여하여 경모궁제례에 필요한 악기 및 관복, 그 밖의 의물 등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향에 사용된 악기들 이외에 연향에 사용된 악기들 또한 각종 진연(進宴)·진찬(進饌)·진작(進爵)의괴(儀軌)에 보인다. 의궤에 기록된 자세한 악기 그림과 꼼꼼한 제작 기록은 오늘날까지도 악기 제작의 실용적 모범답안이 되고 있다.
유럽의 클래식 음악에 사용되는 악기들은 음량을 확대하거나 음역을 넓히는 등 주로 악기의 기능을 우선시하여 발달되어왔기 때문에 수백 년 전의 원 모습을 간직한 악기가 매우 드물다.
  
조선 궁중의 각종 제례와 연향에 사용되는 악기들은 아름답게 울리는 소리보다 악기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가 더욱 중요시되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조선조 세종 이후 궁중에서는 옛 제도에 따라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기본 모양을 준수하고 각종 상서로운 문양과 궁중의 권위에 맞는 색채 등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최선으로 여겼다. 세종조 이후 제도화된 각종 궁중악기들이 오늘날까지 약 600여 년 동안 온전히 이어지게 된 것은 단순 음악 기능에만 머무르지 않고 내면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격조와 품격의 심미안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한국문화재재단
글˚주재근 (국립국악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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