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래
가물치
가지
간재미
갈근
갈치
감자
감태
감초
감홍로주
강활
강황
게장
고구마
고등어
고본
고사리
고슴도치
고추
고추장
곤쟁이
골풀
곰취
곱돌
과루인
곶감
과메기
곽향
광어
구기자
구리
국수
국화차
굴비
금불초
기장
김치
꼬막
꼴뚜기
꽃게
꿀풀
나물
나전칠기
낙죽장도
낙지
냉이
노루
녹두
녹용
녹차
농어
뇌록
누치
느룹나무
느타리버섯
다시마
다람쥐
다래
다슬기
닥나무
단감
단목
달래
담비
담쟁이
당귀
대게
대구
대나무
대발
대추
더덕
더덕주
도라지
도루묵
도마뱀
도미
도자기
돈육
돈차
돌미역
돔배기
동래파전
동백기름
동충하초
돚자리
돼지
된장
두꺼비
두릅
두충
딸기
들기름
마늘
마뿌리
만화석
막걸리
망둥어
매생이
매실
맥문동
맨드라미
머루
머루주
메밀차
멸치
명란젓
명설차
명태
모과
모란
모래무지
모시
모자
목기
목화
무명
무우
문배주
문어
미나리
미역
민속주
민어
밀랍
박하
방풍
백랍
백련잎차
백렴
백미
백반
백부자
백조어
백하수오
백합
밴댕이
뱅어
벼루
병어
법주
보골지
보리
복령
복분자
복숭아
복어
부들
부자
부채
부추
붉나무
붕어
비빔밥
비자
뽕나무
사과
사슴
산나물
산삼
삼림욕
산수유
살구
삼릉
삼배
삼치
상합
상황버섯
새우
새우젓
생강
석결명
석곡
석류
석영
석이버섯
석청
석창포
소금
소라
소주
속새
송어
송이버섯
송화가루
수달
수박
수정
숙주
순채
숭어
승검초
식해
안동포
안식향
앵두
야콘
야콘잎차
약쑥
양귀비
어란
어리굴젓
어육장
엄나무
연밥
연어
연엽주
열목어
염전
엽삭젓
오가피
오미자
오곡
오골계
오정주
오죽
오징어
옥돔
옥로주
옹기
옻칠
왕골
용문석
우무
우황
울금
웅어
위어
유기
유자
유자차
유황
육포
은어
은행
이강주
이스라지
익모초
인삼
인삼주
잉어
자단향
자두
자라
자라돔
자연동
자하젓
작설차
작약
장군풀
장아찌
전모
전복
전어
전어젓
전통주
젓갈
젓새우
정어리
조개
조기
조홍시
좁쌀
종어
종이
주꾸미
죽렴장
죽로차
죽순
죽순채
죽염멸치
죽엽청주
죽피
죽합
준치
중국차
지라돔
지치
질경이
찐빵
참가사리
참게
참기름
참죽나물
참외
찹쌀
창출
천궁
천남성
천문동
청각
청국장
청란석
청목향
청자
초콜릿
초피나무
초하주
추성주
취나물
치자
칠선주
콩잎
토마토
토끼
토사자
토주
토파즈
토하젓
파전
패랭이
편두
포도
포도주
표고버섯
표범
하늘타리
학슬
한과
한라봉
한우
한지
해구신
해달
해삼
해파리
해홍나물
향나무
호도
호로파
호두
홍삼
홍삼절편
홍시
홍어
홍주
홍합
화개차
화문석
황기
황률
황벽나무
황어
황옥
황진이주
황태
회양목
후박
후추
흑돼지
흑염소
흑한우
로그인 l 회원가입

임자도전장포새우젓 1.jpg
 
 
조선의 왕세자교육 영조가 편찬한 제왕학 교재
15-07-07 18:38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 태어난 영조는 숙종의 넷째 아들이었다. 영조는 5세에 연잉군으로 봉해졌고, 11세에 진사 서종제의 따님인 정성왕후와 가례를 올렸다. 영조 부부는 8년 후에 궁궐을 나와 창의동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숙종이 사망하자 영조의 형님인 경종이 국왕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를 이을 후사가 태어나지 않자 영조는 28세에 다시 궁궐 안으로 들어와 왕세제로 책봉되었고, 3년 후 경종이 사망하자 국왕이 되었다. 영조는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에 어릴 때 학문을 연마한 기간이 매우 짧았다. 영조는 8세에 『효경』을 배우기 시작하여 『동몽선습』, 『소학』, 『대학』을 익혔다. 그러나 창의동에 살림을 차리면서 학업은 중단되었다. 왕세제로 책봉되면서 영조는 학문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영조는 시강원 관리에게 유교 경전과 중국의 역사서인 『통감강목』을 배웠고, 국왕이 된 이후에는 경연을 계속하며 학문 연마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릴 때 학문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영조는 자신의 후손들은 일찍부터 학문에 몰두하여 훌륭한 국왕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했다. 영조가 제왕학의 교재에 해당하는 서적을 많이 편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영조는 1741년에 『어제대훈』을 편찬한 것에서 시작하여 『어제상훈』, 『어제자성편』, 『어제심감』, 『어제정훈』 같은 서적들을 연이어 편찬했다. 이들은 모두 사도세자를 가르치기 위한 제왕학 교재였다. 『어제자성편(御製自省編)』은 영조가 1746년에 유교 경전과 역사서에서 개인의 수양과 국가의 정치에 유익한 항목을 간추려 편집한 책이다. 책의 서문과 발문은 영조가 직접 지었고, 본문은 내편과 외편으로 구분되어 있다. 내편과 외편의 처음에는 영조가 지은 시가 한 수씩 있는데, 내편에서는 심(心, 마음), 외편에서는 기(幾, 기미)를 주제로 했다. 내편은 개인의 수양이 중심으로 마음을 잘 다스려 착한 본성을 배양하고 부당한 욕심을 막기를 바랐고, 외편은 국가의 정치를 위주로 하여 기미를 잘 살펴 현명한 신하를 등용하기를 기대했다. 영조가 『어제자성편』에서 주로 인용한 자료는 경전과 역사서였다. 영조는 특히 『소학』의 실천을 강조하여 『대학』 공부의 근본은 『소학』에 있으며, 자신은 오랫동안 『소학』을 읽었지만 실제 생활에서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영조는 『주례』에 나타난 주나라의 제도를 주목했고, 『대학연의보』의 기록을 근거로 친경(親耕) 제도를 부활시키기도 했다. 또한 그는 역사서를 읽다가 훌륭한 인물들의 행적이 나오면 자기 행동에 하나씩 비춰보면서 점검한다고 했고, 송나라의 역사가 조선과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다. 영조가 가장 강조한 것은 조선 왕실의 가법(家法)이고, 모범이 되는 국왕으로는 세종과 숙종을 꼽았다. 영조는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성인(聖人)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라 했고, 숙종은 하늘을 공경하여 천명의 움직임을 살피고 백성을 사랑하여 민심의 동향을 잘 살폈다고 했다.
 
 
 
 
영조가 『어제자성편』의 서문과 발문을 작성한 날은 1746년 2월 17일로서, 이날은 바로 세종의 기일이기도 하다. 영조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일도 이야기했다. 그는 가을철에 능행을 할 때마다 행사를 마칠 때까지 군대와 백성들이 다치지 않을까 걱정했고, 인재를 등용할 때는 용모와 언어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었다고 했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 역사를 잘 알아야한 다면서 자신이 개성을 방문했을 때 고려 충신들을 표창한 일을 소개했다. 영조는 대간의 직언에 화가 나서 하마터면 그를 죽일 뻔했다가 측근의 만류로 그만둔 일이 있음을 고백했다. 자신의 실수를 솔직하게 알려 후손들의 경계로 삼기 위해서였다. 영조는 자신이 학습한 경전과 역사서, 세종과 숙종을 비롯한 선왕들의 행적, 자신의 정치와 경험을 재료로 하여 『어제자성편』을 편찬했다. 이는 장차 국왕이 될 사도세자에게 공식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 국왕의 일상생활이나 개인적 느낌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직후에 영조는 세자를 경연 자리로 불렀고, 경연관에게 『어제자성편』의 장구를 하나씩 읽게 하고 이를 강조하는 훈계를 했다. 세자가 이 책을 습득하여 실천하기를 기대하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영조의 기대는 깨지고 말았다. 사도세자가 사망하고 정조가 후계자가 되자 영조는 손자의 교육에 관심을 기울였다. 1775년에 영조는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행하라고 하면서, 시강관에게 『어제자성편』을 가져와 읽게 하고, 정조에게 자신이 작성한 발문을 받아쓰라고 명령했다.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사업을 알고 자신의 마음을 후세 사람들에게 알리라는 당부였다. 이를 보면 『어제자성편』은 영조에서 사도세자를 거쳐 정조에 이르는 삼대에 걸쳐 제왕학 교재로 활용된 책이었다.                  출처: 한국문화재재단   글˚김문식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크기변환_13333.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