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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도전장포새우젓 1.jpg
 
 
옛그림 물가 풍경, 남자들의 시선(視線)
15-07-07 18:43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년경)와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1758~?)의 풍속화엔 일상이 담겨 있다. 그림을 감상하며 일상을 읽어내노라면 그 재미가 적잖이 쏠쏠하다. 단원의 대표적인 풍속화라고 하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풍속도첩』(보물527호, 18세기 후반)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 화집에 실린 25점의 풍속화는 주로 18세기 일반 서민들의 소소한 일상을 정겹게 그려낸 작품들이다. 그 유명한 <씨름>, <무동(舞童)>, <서당>, <대장간> 등 우리 눈에 익숙한 작품들이 모두 여기 수록되어 있다. 단원은 주변의 배경을 생략한 채 백성들의 일상의 모습과 움직임을 간략하지만 특징적으로 잘 표현했다. 혜원의 풍속화는 단원과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간송미술관 소장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국보 153호, 18세기 말~19세기 초)에 실린 30점을 보면, 한량과 기생들의 사랑 놀음을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양반들의 유흥 문화와 애정 관계를 은밀한 에로티시즘으로 표출한 것이다. 단원이 서민들의 애환을 건강하면서도 해학적으로 표현했다면 이에 반해 혜원은 한량(閑良)과 기생들의 유희 또는 사랑을 풍부한 배경 묘사와 함께 보여주었다. 단원과 달리 풍경이나 건물 등을 배경으로 적극 끌어들임으로써 양반들의 유희 문화를 역동적으로 묘사했다. 단원과 혜원의 풍속화가 꽤 있지만 서로 비교해 감상할 만한 작품을 꼽아보라면 서슴없이 단원의 <빨래터>와 혜원의 <단오풍정(端午風情)>을 들고 싶다. 사뭇 달라 보이지만 눈여겨보면 무언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공통점은 바로 훔쳐보기, 남정네의 훔쳐보기다. <빨래터>는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을 그린 작품이다. 한 여인은 바위에 앉아 아기를 옆에 앉혀두고 머리를 다듬고 있다. 아랫도리를 벗은 채 엄마에게 붙어 있는 아기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다. 나머지 세 여인은 빨래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여인들은 치마와 속바지를 걷어 올려 허벅지 속살을 훤히 드러내놓고 있다. 누군가는 돌판 위에서 방망이로 탁탁 빨래를 두드리고, 누군가는 빨래를 짜고 있다. 빨래하는 여성들의 얼굴 표정은 한결같이 즐거워 보인다. 
 
눈길을 끄는 것은 여인들이 드러내놓은 허벅지가 아닐 수 없다. 누군가보면 부끄러울 법도 한데 옛날엔 그랬나 보다. 이렇게 허벅지를 드러낸 것은 치마와 속바지를 걷어 올리지 않으면 옷이 다 젖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속살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런데 아뿔싸! 바위 뒤에 숨어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몰래 여인들의 움직임을 훔쳐보고 있는 선비가 눈에 들어온다. 선비들이 점잖지 못하게…. 하지만 이런 훔쳐보기도 남정네들 삶의 한 풍속이 아니었을까. 이번엔 혜원의 <단오풍정>을 보자. 단오를 맞아 멋지게 차려 입은 여성들이 한껏 멋을 내고 나들이를 갔다. 노랑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은 여성은 그네에 오르고 있다. 그 위쪽, 쪽빛 치마를 입은 여성은 머리를 매만지며 창포물에 머리 감을 준비를 하고 그 옆의 여인은 고개를 들어 멋진 포즈로 풍광을 감상한다. 아래쪽 네 명의 여성은 상체를 드러내고 물맞이를 하고 있다. 예로부터 단오가 되면 여성들은 그네타기, 창포물로 머리감기, 물맞이 등을 즐겼다.
 
 물맞이는 물가에서 목욕을 하거나 폭포물을 맞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그 행색으로 보아 모두 기녀다. 그런데 기녀라고 해도 그렇지, 가슴을 너무나 훤히 드러냈다. 그래서였을까. 바위 뒤에 숨어 여인들의 목욕 장면을 훔쳐보고 있는 사내 두 명이 보인다. 동안(童顔)에 머리를 박박 깎은 것으로 보아 동자승(童子僧) 같다. 사내라고 말하기에도 어린놈들이다. 재미있다. 에로틱한 분위기를 은밀하면서도 절묘하게 표현한 혜원의 예술적 감각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작품의 공통점과 매력은 훔쳐보기에 있다. 훔쳐보는 남정네들을 등장시킴으로써 화폭에 변화와 생동감, 긴장감을 부여한다. 나아가 보는 사람들의 호기심까지 자극한다. 그래서인지 보면 볼수록 더욱 재미있는 그림이다. 그림을 보노라니 조선시대 물가의 풍경이 새삼 흥미롭다. 요즘 이런 풍경을 찾아내기란 정말 어렵다. 물가에서 빨래하는 일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무더위 한 철이 아니면 마을 물가에서 물놀이를 하는 사람도 드물다. 희미한 추억이다. 물가 얘기를 하는 김에 이번엔 단원의 풍속화 <우물가>를 감상해보자. 우물은 거의 사라졌지만 옛날엔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떠 마시고 우물물로 빨래도 했다.
 
그래서 우물가에는 늘 여성들이 많이 모였다.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세상사의 정보를 공유하는 그런 곳이었다. 여인이 많이 모이는 곳에 남자가 빠질 수 없다. 우물 바로 옆에 아낙네 두 명이 있고 길을 가던 한 남자가 멈춰 서서 두레박으로 물을 얻어먹고 있다. 그런데 저 남자, 옷을 풀어헤쳐 가슴과 배꼽을 훤히 드러낸 채 물을 마시고 있는 것 아닌가? 여성들에게 자신의 남성미를 자랑하면서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 마음이 역력하다. 얼굴엔 자신만만함이 가득하다. 하지만 여인들의 표정은 다르다. 두 여성 모두 쑥스러운 듯 남성으로부터 시선을 피하고 있다. 두레박줄을 잡아주고 있는 여성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물을 긷고 있는 여성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물동이를 이고 뒤따라오던 아낙네는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얌전히 물이나 얻어 마실 것이지 쓸데없이 객기를 부리고 있느냐, 이런 표정이다. 허허, 아낙네에게 점수를 따고 싶어 하는 한 남자의 과장된 몸짓! 물가도 그렇고 우물가도 그렇고, 물가(우물가)에 내놓은 남자들이 모두 어린애 같기만 하다. 옛날엔 정말 그랬던 것일까? 그럼, 지금은 어떠한가? 생각할수록 재미있다.
 
               출처: 한국문화재재단  글˚이광표 (동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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