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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도전장포새우젓 1.jpg
 
 
조선여인의 머리단장
15-07-07 18:58

예로부터 머리단장은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수식(首飾)은 얼굴과 가장 가까운 부분으로 눈에 가장 먼저 띄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머리를 꾸미는 장신구의 성격을 뛰어넘어 상징성과 실용성, 아름다움을 두루 갖춰 시대를 반영하는 미의 산물로 여겨졌다. 또한 유교적 규범을 지키던 조선시대에는 예교에 벗어나지 않으면서 치장할 수 있던 머리장 신구가 유일한 장식이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인들의 섬세하고 여유로운 미의식은 머리장신구를 통해 자신의 미를 표현하였다. 한편 머리장식이 발달하면서 조선시대의 다채로운 장신구의 특성을 이루었고 머리모양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기본 머리모양은 기혼녀의 얹은머리, 쪽진머리, 미혼녀는 땋은머리였다. 이외에 예장용 머리모양에는 큰머리, 어여머리, 대수(大首), 첩지머리, 새앙머리 등이 있었다.
이 중 얹은머리는 고대사회부터 이어져 왔으며 조선 중기에 이르면 가체(加髢)가 성행하게 된다. 당시 가체는 비정상적으로 크고 무거워 사치의 근원으로 작용하게 되었고, 이러한 폐단을 없애고자 영조 32년(1756) 가체 금지령이 내려진다. 금지령의 내용은 쪽진머리를 장려하고 가체의 대용으로 족두리를 사용하게 한 것이다.
 
 
 
이는 정조 재위 중에는 완전히 실시되지 못하였고 순조 중엽에 가서야 이루어지게 된다. 하지만 쪽진머리에 가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쪽이 뒤통수에 있던 것이 점차 내려와 말엽에는 저고리 위에 있게 되었으며, 그 후 개화기에 이르면 다시 머리 뒷부분으로 올라가 지금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머리장신구에는 비녀, 빗치개, 뒤꽂이, 첩지, 떨잠, 댕기등이 있다. 비녀는 조선여인의 표상이자 다채로운 조형 양식을 보여주는 훌륭한 공예품으로 머리를 수발(修髮)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나 장식의 역할도 겸하였다. 얹은머리에도 비녀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쪽진머리가 장려되면서 비녀의 사용도 일반화되었고 가체에 치중하던 사치풍조는 다시 비녀로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비녀는 계절과 옷의 색깔에 따라 색채와 의장을 조화시키며 그 모양이 다양해졌다. 당시 존비 상하의 차별이 심하였던 만큼 상류층과 서민층에서 사용하던 비녀의 종류와 재료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전 계층이 필수적으로 착용하던 장신구이기도 하다.
  
쪽진머리 뒤에 덧꽂는   비녀 이외의 수식품인 뒤꽂이는 실용성을 겸하여 기능과 모양이 독특하였다. 머리에 꽂히는 첨부와 첨부 위에 여러 형태로 만들어 붙이는 장식부가 있는데, 사용자의 신분과 재력에 따라 달리 사용하였다고 한다. 첩지와 떨잠의 경우는 상류층 혹은 궁중에서 그 사용이 제한되었다. 첩지는 영조 때 발제 개혁 이후 생겨난 특수한 수식품의 하나로 주로 궁중에서 사용하였다. 떨잠은 왕비를 비롯한 상류층에서 큰머리나 어여머리의 중심과 양편에 하나씩 꽂았던 장식품으로 갖가지 기교를 다한 아름다운 수식 중 하나이다. 댕기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주로 미혼녀들이 사용하였고, 연령 또는 용도에 따라 다양한 쓰임이 있었다. 머리쓰개는 적관, 화관, 족두리를 비롯하여 머리에 쓰는 것과 너울, 쓰개치마 등 얼굴을 가리기 위한 것까지 포함한다. 이렇게 ‘옛 여인의 장신구’를 짚어보며 알 수 있듯 우리 고유의 미는 세계 어느 곳의 미와 비교하여도 결코 모자라지 않으며, 그 시절 여인들의 미적 수준에 감탄하게 된다. 앞으로 우리 문화를 지키고 이끌어갈 젊은이들에게 좀 더 깊이 있는 후속 연구가 이루어지길 기대하며, 또한 이를 밑거름으로 온전하게 보전하고 더 발전적으로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작은 바람이다.
 
족두리
족두리는 본래 몽고에서 양반 부녀자가 외출할 때 쓰던 모자로 고려 후기에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궁중에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의식 때 대례복인 원삼이나 활옷에 갖추어 쓰던 관의 하나이다. 처음에는 궁중양식이었으며 말기에는 일반 상민이나 천민에 퍼져 혼례복과 함께 착용하였다. 일반적인 형태로 비단 여섯 쪽을 이어 꿰매고 안에 솜을 넣어 겉에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민족두리, 상부나 중앙에 칠보나 옥, 밀화 등을 장식한 꾸밈족두리, 초상 때 사용한 흰족두리 등으로 구분된다.

화관
가장 화려한 여성의 예복용 관모로 신라 문무왕 때 전래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 크기가 작아져 머리에 쓰던 관모라기보다는 미적 장식품으로 얹는 수식이 되었다. 가체금지령 이후 화관과 족두리의 사용을 장려하면서 일반화되었고, 오색 구슬로 꽃모양을 두르고 떨나비를 달았으며 활옷이나 당의를 입을 때 썼다.

빗치개
빗치개는 단순히 실용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되어 조형적인 형태는 비교적 단순하며, 표면에 음각의 장식을 하여 사용하였다. 가르마를 탈 때뿐 아니라 빗에 낀 때를 뺄 때에도 자주 사용하였고, 기름병 안에 넣어 기름을 찍어 바르는 데에도 사용하였다. 재료인 백동(白銅)은 합금의 비율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나 은과 비슷한 색깔을 지닌 금속으로 조선시대 생활용기 소재로 서민들에게 널리 사용되었다.

뒤꽂이
뒤꽂이는 쪽진머리 뒤에 꽂는 비녀 이외의 수식품으로서 장식성과 함께 실용성을 겸하였다. 머리에 꽂았을 때 보이는 부분을 장식부라고 하며 꽂히는 부분을 첩부라고 하는데, 장식부에 있는 문양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 뒤꽂이의 크기와 소재로 사용자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으며, 가체가 금지되면서 더욱 발달하였다. 단순히 장식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일반 뒤꽂이와는 달리 장식성과 함께 실용성을 겸비한 뒤꽂이로 빗치개 뒤꽂이, 귀이개 뒤꽂이, 말뚝 뒤꽂이 등이 있다. 주로 은이나 동으로 몸체를 만들고 국화나 나비, 천도, 연꽃, 봉황 등을 장식하여 치장의 효과를 높였다. 또한 옥, 비취, 산호, 파란 등의 재료를 사용해서 화려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뒤꽂이는 비녀와 함께 가체금지령 이후 발달한 장식품으로서 금속공예의 미를 한껏 응용한 장식품으로 각광을 받았다. 
               출처: 한국문화재재단 글˚김명희 (보나장신구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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