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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도전장포새우젓 1.jpg
 
 
국새나 어보는 장인 혼자서 만들지 않는다
15-07-06 16:42

2010년 10월. 대한민국의 4대 국새(國璽) 때문에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제작을 주관한 제작자가 국가에서 제공한 금을 횡령하고 전통기술이 없으며, 국새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당시 많은 국민들이 왜 국새에 관심을 보였을까? 그것은 국새가 국가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왕을 곧 국가로 여겼던 조선왕조에서도 왕권의 상징물은 국새를 비롯한 왕의 도장인데, 이것들은 대보(大寶)·국인(國印)·어보(御寶)·새보(璽寶)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통칭 보인(寶印)이라고 부르는 도장 중 왕과 왕비의 것은 보(寶), 왕세자 이하의 것은 인(印)으로 구분한다. 이렇게 조선에서 도장이 왕권을 상징한다는 것은 왕의 즉위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선왕이 돌아가시고 세자가 왕이 되었음을 만백성에게 알리는 의식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새로 즉위한 왕(嗣王)이 국가를 상징하는 도장을 물려받는 순간이다.

전통시대에 도장은 바로 그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왕의 도장도 마찬가지였다. 어보는 왕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었기에 왕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예컨대 왕비나 세자를 책봉하거나, 국가적인 명령을 내리거나, 외국과의 외교문서를 내리는 중요한 순간, 왕은 자신의 문서임을 도장을 찍어 증명하였다. 이처럼 왕의 도장은 왕실의 각종 행사 때마다 왕을 왕답게 하는 의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의식행차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행렬의 앞에 별도의 가마에 봉송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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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왕권을 상징하는 도장(寶印)은 누가 어떻게 만들까? 왕이나 왕비의 책봉이나 존호 및 시호 등 의례 때 사용할 보인을 제작하고자 왕실에서는 가례도감·존숭존호도감·책례도감·국장도감·부묘도감 등의 임시관청을 세우고 수십 명의 장인을 동원한 국가적 프로젝트로 추진하였다. 그중 1876(고종 13) 11월 16일부터 12월 16일까지 임시로 세운 보인소에서는 <조선왕보>·<대조선국주상지보>·<조선국왕지인조선국왕지인> 등 총 11과의 보인을 만들거나 수보하였으며, 그 전말은 《보인소의궤》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명목상 책임자는 행이조판서와 행호조판서였고, 실제 총괄은 낭청 2인이, 보인의 자문이나 감독은 별간역 5인이 담당하였고, 실무적인 업무 처리를 위해 계사·서리·서사·고직·사환·사령 등을 조직하였다. 장인은 화사를 비롯하여 보장·두석장·금장·은장·옥각수·소로장·담편장·병풍장·목수·소목장·조각장·야장·쇄자장·마조장·마광장·칠장·호갑장·과피장·다회장·입사장·안자장·매듭장 등 22종 76명 장인을 동원했다. 그들을 도울 모조역이나 육조역도 배정하였다.

이렇게 보인을 제작하는데 장인의 종별이 다종다양하고 숫자가 많은 까닭은 상징성이 강한 보인과 함께 그것을 보호할 함궤까지 제작하기 때문이다. 보인과 그것을 묶는 끈(纓子), 그것을 감싸고 보호할 솜보자기(襦袱)와 겹보자기(裌袱), 그것을 담을 보통(寶筒)과 보록(寶盝) 및 인주를 넣는 주통(朱筒) 그리고 모든 것을 담을 호갑(護匣)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을 제작하고자 각 분야마다 당대 최고의 솜씨를 자랑하는 장인들이 한데 모여 ‘분업적 협업체계’를 갖추었다. 예컨대 금보(金印)의 경우 서사관(書寫官)이 글씨를 쓰면 이것을 사자관(寫字官)이 베끼고, 화원이 어보 형태의 본을 그리면 이를 토대로 금보장이 제작하는 것이다. 이때 옥보(玉印 )의 경우 옥을 캐오는 옥장이 있으며, 그것에 전문(篆文)을 새기는 보전각장·보전장·옥각수·옥인각수 등과, 완성된 옥보를 담는 함궤는 보통장·인통장·보인통장·보록장 및 호갑장 등이 있었다. 금보와 옥보를 제작할 때 동원되는 장인의 종별이 각각 다른 이유는 양자를 제작할 때 금보는 주조의 비중이 높고, 옥보는 조각의 비중이 높은 때문이다. 이처럼 보인과 같이 왕권을 상징하는 의물은 한 명의 뛰어난 장인 혼자서 솜씨를 발휘하여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여러 종류의 장인이 협동작업으로 제
작하는데, 대한민국 4대 국새를 혼자 제작하려했으니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한편 권설도감에서 보인을 제작한 장인의 종별과 처지는 시기별로 달라졌다. 보장(寶匠)의 경우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계속 등장하는 반면, 인장(印匠)은 1753년부터 보장에서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장인들은 만드는 재료에 따라 옥을 다루는 장인과 금은을 다루는 장인으로 구분되어 금보장·은보장·옥보장으로, 인장 또한 금인장·은인장·옥인장으로 전문화되었다. 17세기 초반에는 장인 조직이 안정되지 않아 한 명의 장인이 장기간 동원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7세기 말부터 오랜 기간 동원되었던 장인이 박한길(朴汗吉, 1670〜1681)이었다. 당시 박성건(朴成建, 1684〜1702)은 17년간 5번의 도감에 동원되었는데, 1691년에는 관상감(觀象監) 소속이었다. 한편 훈련도감 소속이었던 박상운(朴尙云,1691〜1705)과 이홍성(李弘成, 1731〜1740)도 징발되었다. 이들 장인은 17세기 말부터 18세기까지는 내수사나 상의원에 소속된 관장(官匠)이거나 훈련도감과 같은 군문(軍門)에 소속되었다.

훈련도감에 속한 박태정(朴泰亭, 1739〜1772)은 33년간 보장과 인장으로 활동하였는데, 1772년에는 사적 생산에 종사하는 사장(私匠)이었다. 상의원 소속의 진재기(陳再起)도 활동하였다. 한편 18세기에는 보인장들이 장인 가문을 형성하였는데 표씨 집안이 대표적이다. 표시재(表時才)·표성채(表聖采)·표덕운(表德運)·표명득(表命得) 등이 1721년부터 1802년까지 연속으로 도감역을 졌다. 19세기에 들어서는 금보장·금인장으로도 병기되었다. 김삼득(金三得,1837〜1853)·전흥석(全興石, 1845〜1878)·전흥길 (全興吉, 1878〜1898)의 경우 금은으로 도장을 만드는 일을 하였다. 당시에도 금은보를 제작하는 장인인 전흥석과 전흥길은 장인 가문을 형성하였다. 한말에는 보장 이원식(李元植, 1904〜1907)이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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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조선시대 내내 국가의 상징물로 제작된 어보는 왕이나 왕비의 사후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 신주와 함께 모셔지게 된다. 종묘의 신실에는 보장(寶欌)을 갖추고 그 속에는 왕이나 왕비가 책봉을 받거나 시호나 존호를 올릴 때마다 제작하였던 도장을 안치하였다. 그중 316점의 어보(御寶)를 비롯하여 각종 보자기와 함궤 등 관련 유물 3,361점이 종묘에서 1994년 궁중유물전시관에 이관되었다. 2005년 이후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현존하고 있으나 국민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2010년 국새사건으로 일시적으로 관심을 끌었다가, 작년 11월 6·25 전쟁 때 미군이 덕수궁에서 훔쳐간 대한제국의 국새를 비롯한 9점의 인장이 올해 고국으로 귀환한다고 하여 이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이에 우리 주권의 상징인 국새와 왕실의 도장 중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73점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오도록 국민적 여망을 모았으면 한다. 아울러 이것을 제작
할 당시 오로지 국가적 상징물을 만들겠다는 일념 하나로 왕조정부 관계자와 여러 전문가 및 장인이 협력하였던 제작시스템이 오늘에도 되살려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출처: 한국문화재재단    글 장경희(한서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교수, 문화재청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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