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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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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6대조 임금인 단종은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결국은 죽임을 당한다
15-10-23 19:36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단종이 영월에 물러나 있다가 승하하신 후에 영월 부사가 되는 사람은 갑자기 죽으니, 사람들이 다 두려워하며 피하여 영월은 드디어 황폐한 고을이 되고 말았다.
 이 때, 한 조관이 스스로 그 부사가 되기를 요망하였다. 그가 영월 부사로 부임하는 날 밤에 그는 좌우를 물리치고 홀로 촛불을 밝히고 앉아 있었는데, 밤이 깊었을 때 갑자기 임금이 행차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 오더니, 한 임금이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고 들어와서 대청에 앉았다.
 부사가 황공하게 여겨 즉시 뜰 아래 내려서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니, 임금(단종)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공생에게 목을 매인 바 되었는데, 그 활줄이 아직도 내 목에 매어져 아픔을 참지 못하겠구나, 내 본관(부사)을 보고 풀어 달라 하려고 여기에 이르면 그들은 기백이 부족하여 나를 보자마자 모두 갑자기 겁을 먹고 죽어 버리는구나. 오직 너만이 그렇지 않으니 그 용기가 가상하구나." 하였다. 부사는 비로소 이 분이 상왕(단종)의 신령임을 알고, 땅에 엎드려 흐느끼며 말하기를,
"신은 옥체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서 감히 명령을 따르지 못하겠나이다." 하니
단종은 교시하여 말하기를,
"이전에 호장을 지낸 엄흥도 혼자 그곳을 알고 있으니, 그에게 물으면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니라."하고, 드디어는 수레를 돌렸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그 관속들이 대청 아래 모여 서로 미루며 곧바로 올라오지를 못했다. 이 때 부사가 창을 밀어 젖히면서 묻기를,
"너희들은 무슨 일로 이리 어지러우냐?" 하니
 관속들이 다 놀라 엎드려서 죄를 청하였다. 부사가 묻기를, " 이 고을에 전에 호장을 지낸 엄흥도라는 사람이 있느냐?"하니, 관속은 말하기를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밤이 깊었을 때 부사가 은밀히 사람을 시켜 엄흥도를 불러, 그와 함께 방에 들어왔다. 부사는 곧 그에게 상왕의 옥체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으니, 엄흥도는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했다.
"소인은 전에 호장으로 있었습니다. 당시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가지고 왔을 때, 상왕께서는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시고 대청 위에 앉아 계셨는데, 왕방연이 몸둘 곳을 몰라 감히 사약을 올리지 못하고 뜰 아래 엎드려 있으니, 상왕께서 말씀하시기를 할 때 옆에 있던 한 공생이 활끈을 가지고 억지로 상왕의 목에 매고 창틈으로 잡아 당겨서 갑자기 돌아가시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공생은 그 자리에서 발꿈치를 다 돌리지도 못한 채 일곱 구멍으로 피를 쏟고 죽었습니다. 그러자 상왕을 모시던 궁녀들은 다 스스로 몸을 청렴포 바위 아래로 던져 죽었습니다. 이 곳을 낙화암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때 고을 사람들은 화가 그들에게 미칠까 두려워서 다투어 옥체를 강물 속에 던지니, 물결을 따라 밑으로 밑으로 떠내려 갔습니다. 소인은 그 날 밤에 몰래 그 시체를 업어다 읍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받들어 모셨으나, 활줄은 미처 풀지를 못하였습니다."
 부사가 곧 엄흥도와 함께 몰래 그 곳에 도착하여 관을 열고 살피니, 상왕의 옥체는 마치 살아 있는 것과 같고, 활줄이 과연 그 목에 매어져 있었다. 즉시 그것을 풀어 버리고 수의를 갖추어 무덤을 고치고 장사를 지냈는데, 지금의 장릉이 바로 그것이다.
 이 날 밤, 단종이 다시 전과 같이 대청 위에 오셔서 분부를 내려 말하기를,
 "비로소 활줄을 제거한 다음부터 목이 아프지 않구나. 너와 엄흥도는 남 몰래 좋은 일을 하였으니, 마땅히 후한 보답을 받으리라."하고, 드디어는 수레를 돌려 되돌아 가셨다. 이로부터 영월 고을의 원님이 된 사람은 평안히 지내게 되었다.
 세상에 알려지기를, 이 때 부사는 낙촌 박충원의 할아버지라고 하는데, 그는 명종 때 이조 판서를 지내고 문형의 자리를 맡았다. 그가 장릉에 제사 지낼 때, 제문에 말하기를,
 "왕실의 맏아드님이요, 어린 나이로서 한 조각 천산 기슭에 만고의 원혼이 되시었네."라고 하였고, 참판 조하망의 자규루 시에는 말하기를, "옛날부터 영월에는 세 번 사양한 곳이 있다더니, 지금도 저 강 위에는 구의산이 솟아 있네."라고 하였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요점 정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연대 : 조선 세조 이후 추정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작자 : 미상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성격 : 전기적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갈래 : 설화, 전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주제 : 억울하게 죽은 단종의 신원(伸寃)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출전 : 금계필담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내용 연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조관 : 조정의 내직에 있던 관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익선관 : 임금이 정무를 볼 때 쓰던 관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곤룡포 : 임금이 입던 정복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공생 : 향교의 심부름꾼, 교생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호장 : 수령 밑의 아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상왕 : 왕위를 물려주고 살아 있는 전왕, 태상왕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금부도사 : 의금부에서 일을 보던 도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수의 : 염습할 때 시체에 입히던 옷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문형 : 대제학의 별칭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이해와 감상
 조선조 6대조 임금인 단종은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결국은 죽임을 당한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은 만큼 자연히 거기에 얽힌 전설이 없을 리 없다. 위의 이야기는 원귀신원설화로 단종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영월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가진다는 점에서 설화 중에서도 '전설'로 보아야 할 것이고, 정통성이 없는 정권에 대한 간접적 경계의 의미가 있으며,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천벌을 받고 죽는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청자들로 하여금 죄와 벌을 생각하게 만드는 교훈이 담긴 전설이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심화 자료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단종
 1441(세종 23)1457(세조 3). 조선 제6대 왕. 재위 14521455.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홍위(弘暐). 아버지는 문종이며,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權氏)이다.
비는 여산부원군(礪山府元君)
송현수(宋玹壽
)의 딸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宋氏)이다. 1448년(세종 30) 8세 때 의정부의 청으로 왕세손에 책봉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왕세자 책봉이 있던 해, 문종은 왕세자를 위해 처음으로 서연을 열고 사(師)
·빈(賓)들과 상견례를 하였다. 이 때 문종은 좌빈객 이개(李塏)와 우사경 유성원(柳誠源)에게 왕세자의 지도를 간곡히 부탁하였다. 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경복궁 천추전(千秋殿)에서 죽자 그 뒤를 이어 근정전(勤政殿
)에서 즉위하였다.
즉위에 즈음해 나이가 어려 정치하는 일에 어두우니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서로 의논하여 시행할 것과, 승정원은 왕명 출납을 맡고 있으므로 신하들의 사사로운 일은 보고하지 말도록 교서를 내렸다.
문종의 고명을 받은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이 측근에서 보좌하였다. 또한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신숙주(申叔舟)·이개·
유성원 등은 지난날 집현전에서 세종으로부터 보호를 부탁받았으므로 측근에서 협찬하였다.
이 해 윤9월
논어를 강론할 때, 왕이 사무사(思無邪)라는 문구의 뜻을 물었다. 이에 박팽년은 생각에 간사함이 없고 마음이 바름을 이른 것이며, 마음이 바르게 되면 일마다 바르게 되는 것
이라 대답하였다. 10월 박팽년을 집현전부제학으로 삼았는데, 그의 학문이 정밀, 심오해 경연에서 강의할 때마다 깨달은 바가 많았으므로, 특별히 통정대부에 가자시켜 임명했던 것이다.
이 해 고려의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신숭겸(申崇謙)과 유금필(庾黔弼)·서희(徐熙)·강감찬(姜邯贊)·윤관(尹瓘)·김부식(金富軾)·조충(趙沖)·김취려(金就礪)·김방경(金方慶)·안우(安祐)·김득배(金得培)·이방실(李芳實)·정몽주(鄭夢周
) 등을 왕씨(王氏) 묘정(廟庭)에 종사(從祀)하도록 하였다.
1453년(단종 1) 4월 경회루에 나가서 유생들을 친히 시험 보이고, 또 모화관에 가서 무과를 베풀었는데 권언(權
) 등 40명이 뽑혔다.
온성과 함흥 두 고을에 성을 쌓고, 나난(羅暖)
·무산(茂山)의 두 성보(城堡)를 설치하였다. 악학제조 박연(朴堧)이 세종의 어제악보 御製樂譜를 인쇄, 반포하기를 청하자, 허락하였다. 왕이 대신 황보 인·김종서·정분(鄭) 등에게 자문해 박중림(朴仲林
)을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한편,
양성지(梁誠之)에게 조선도도 朝鮮都圖≫·≪팔도각도 八道各圖를 편찬하게 하였다. 1454년 정월에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맞이 해 왕비로 삼았다. 이 달에 집현전직제학 양성지가 황극치평도 皇極治平圖를 찬진하고, 3월 춘추관에서 세종실록
을 찬진하였다.
그 해 5월 좌승지 박팽년이 경연에서 왕에게 안일과 태만을 경계하도록 진언하였다. 왕이 대궐 안에서 자주 활쏘기를 구경하면서 경연을 여러 차례 정지시켰기 때문이었다.
8월에는 각 도의 관찰사에게 유시해
효자(孝子)·순손(順孫)·의부(義夫)·
절부(節婦)와 공평, 청렴하고 현저히 공적이 있는 수령을 상세히 기록해 알리도록 했는데, 이는 그들을 발탁, 등용하여 권장하기 위해서였다.
보루각(報漏閣)을 수리하고 고려사를 인쇄, 반포하였다. 12월 각 도 관찰사에게 유시해, 둔전(屯田
) 설치 계획을 수립해 알리도록 하였다.

〔폐위 과정〕
1453년 10월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빼앗고자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 측근들의 계책에 따라 좌의정 김종서를 그의 집에서 죽이1고, 영의정 황보 인,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판서 민신(閔伸), 우찬성 이양(李穰) 등을 대궐로 불러와서 죽였다. 그들의 죄명은 숙부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추대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다.
일의 시비를 가리기도 전에 정권은 수양대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요구에 따라 수양대군을 영의정으로 삼아 군국의 중대한 일을 모두 위임시켜 처리하게 하였다. 또, 당시 거사에 참가한 사람들을
정난공신(靖難功臣
)으로 인정하여 모두 공신 칭호를 주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지칭한 난리의 장본인인 안평대군과 그 아들 우직(友直)을 조신들의 주청에 따라 강화 교동현(喬桐縣)에 이치(移置)했다가 안평대군은 사사되고 우직은 진도로 옮겨 안치되었다. 이 일련의 조처는 집권자인 수양대군의 주변 인물들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서 왕의 의사는 무시되었다.
이 해 하위지를 좌사간, 성삼문을 우사간, 이개를 집의, 유응부를 평안도도절제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실권을 잡게 된 수양대군은 지방에도 자기 세력을 심기 위해 지방관을 교체시키던 중,
이징옥(李澄玉
)의 난을 겪기도 하였다.
1455년 윤6월 수양대군이 조정의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금성대군(錦城大君) 이하 여러 종친·
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각 지방에 유배시키기를 요구하자,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따랐다.
이러한 주변 정세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단종은 마침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
)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겨 살았다.

〔복위 사건〕]
1456년(세조 2) 6월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났다. 복위 사건의 주동 인물은 지난날 집현전학사 출신인 몇몇 문신과 성승(成勝)과 유응부(兪應孚) 등 무신들이었다.
이들은 세종과 문종에게 특별한 은혜를 입었으며, 또 원손(元孫 : 端宗)을 보호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때문에 어린 상왕을 복위시키는 것이야말로, 곧 국가에 대한 충성이며 선비의 의무라 생각하였다.
이들은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에 초대해 연회하는 날, 그 자리에서 세조를 죽이고 측근 세력도 제거한 뒤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획이 실행되기도 전에 동모자인 김질(金
)의 고발로 결국 실패하고, 이 사건의 주동 인물 중 많은 사람이 사형을 받게 되었다.
단종은 이 사건이 있은 뒤 더욱 불안을 느끼고 있었는데, 조신 가운데 상왕도 이 사건에 관련되었으므로 서울에서 내쫓자는 주청이 있었다.
이에 1457년 6월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영월에서 유폐 생활을 하는 동안, 매일같이 관풍매죽루(觀風梅竹樓)에 올라 시를 지어 울적한 회포를 달래기도 하였다.
이 해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노산군의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었다. 이에 다시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되었다가 10월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다.
1681년(숙종 7)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 전 현감
신규(申奎)의 상소에 의해 복위가 결정되었다.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으로,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
)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成宗實錄, 仁宗實錄, 宣祖實錄, 肅宗實錄,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莊陵誌, 璿源系譜.(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료출처: http://www.seelot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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