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선덕 여왕 때에 지귀(志鬼)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지귀는 활리역(活里驛) 사람인데, 하루는 서라벌에 나왔다가 지나가는 선덕 여왕을 보았다. 그런데 여왕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그는 단번에 여왕을 사모하게 되었다.
선덕 여왕은 진평왕의 맏딸로, 그 성품이 인자하고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용모가 아름다워서 모든 백성들로부터 칭송(稱頌)과 찬사를 받았다. 그래서 여왕이 한번 행차(行次)를 하면 모든 사람들이 여왕을 보려고 거리를 온통 메웠다. 지귀도 그러한 사람들 틈에서 여왕을 한 번 본 뒤에는 여왕이 너무 아름다워서 혼자 여왕을 사모(思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으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선덕 여왕을 부르다가, 그만 미쳐 버리고 말았다.
"아름다운 여왕이여, 나의 사랑하는 선덕 여왕이여!"
지귀는 거리로 뛰어다니며 이렇게 외쳐댔다. 이를 본 관리들은 지귀가 지껄이는 소리를 여왕이 들을까 봐 걱정이었다. 그래서 관리들은 지귀를 붙잡아다가 매질을 하며 야단을 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여왕이 행차를 하게 되었다. 그 때 어느 골목에서 지귀가 선덕 여왕을 부르면서 나오다가 사람들에게 붙들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떠들썩했다. 이를 본 여왕은 뒤에 있는 관리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미친 사람이 여왕님 앞으로 뛰어나오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붙들려서 그럽니다."
"나한테 온다는데 왜 붙잡았느냐?"
"아뢰옵기 황송합니다만, 저 사람은 지귀라고 하는 미친 사람인데, 여왕님을 사모하고 있다고 합니다."
관리는 큰 죄나 진 사람처럼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고마운 일이로구나!"
여왕은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하고는, 지귀에게 자기를 따라오도록 관리에게 말한 다음, 절을 향하여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한편, 여왕의 명령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러나 지귀는 너무도 기뻐서 춤을 덩실덩실 추며 여왕의 행렬을 뒤따랐다.
선덕 여왕은 절에 이르러 부처에게 기도를 올리었다. 그러는 동안 지귀는 절 앞의 탑 아래에 앉아서 여왕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여왕은 좀체로 나오지 않았다. 지귀는 지루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안타깝고 초조했다. 그러다가 심신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지귀는 그 자리에서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여왕은 기도를 마치고 나오다가 탑 아래에 잠들어 있는 지귀를 보았다. 여왕은 그가 가엾다는 듯이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팔목에 감았던 금팔찌를 뽑아서 지귀의 가슴 위에 놓은 다음 발길을 옮기었다.
여왕이 지나간 뒤에 비로소 잠이 깬 지귀는 가슴 위에 놓인 여왕의 금팔찌를 보고는 놀랐다. 그는 여왕의 금팔찌를 가슴에 꼭 껴안고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러자 그 기쁨은 다시 불씨가 되어 가슴 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는가 싶더니, 이내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가슴 속에 있는 불길은 몸 밖으로 터져 나와 지귀를 어느 새 새빨간 불덩어리로 만들고 말았다. 처음에는 가슴이 타더니 다음에는 머리와 팔다리로 옮아져서 마치 기름이 묻은 솜뭉치처럼 활활 타올랐다. 지귀는 있는 힘을 다하여 탑을 잡고 일어서는데, 불길은 탑으로 옮겨져서 이내 탑도 불기둥에 휩싸였다. 지귀는 꺼져 가는 숨을 내쉬며 멀리 사라지고 있는 여왕을 따라가려고 허위적허위적 걸어가는데, 지귀 몸에 있는 불 기운은 거리에까지 퍼져서 온 거리가 불바다를 이루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지귀는 불귀신으로 변하여 온 세상을 떠돌아디니게 되었다. 사람들은 불귀신을 두려워하게 되었는데, 이 때 선덕 여왕은 불귀신을 쫓는 주문(呪文)을 지어 백성들에게 내놓았다.
지귀는 마음에서 불이 일어 몸을 태우고 화신이 되었네. 푸른 바다 밖 멀리 흘러갔으니,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어다. |
志鬼心中火(지귀심중화) 燒身變火神(소신변화신) 流移滄海外(유이창해외) 不見不相親(불견불상친) |
백성들은 선덕 여왕이 지어 준 주문을 써서 대문에 붙이었다. 그랬더니 비로소 화재를 면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사람들은 불귀신을 물리치는 주문을 쓰게 되었는데, 이는 불귀신이 된 지귀가 선덕 여왕의 뜻만 좇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점 정리
갈래 : 설화(서사), 민담
구성 : 4단 구성
발단 : 지귀의 선덕 여와에 대한 사모
전개 : 선덕 여왕과의 만남과 헤어짐
절정 : 화신으로서의 변모
결말 : 주문에 의한 화재의 예방
문체 : 역어체, 설화체
성격 : 순애(純愛)적, 해원(解寃)적
주제 : 지귀의 사랑과 선덕여왕의 넉넉한 품성, 화신(火神)의 내력
의의 : 우리나라 귀신 지괴설화의 효시이며, 화신의 내력과 그에 따른 풍속을 나타내고 있으며, 지귀의 순수한 사랑과 여왕의 너그러운 품성을 드러낸다.
내용 연구
칭송 : 칭찬하여 일컬음
행차 : 웃어른이 길 가는 것을 높이어 이르는 말
사모 : 정을 들이고 애틋하게 몹시 생각하며 그리워함.
이해와 감상
지귀 설화(志鬼說話)는, 즉 심화요탑(心火繞塔)이라는 제목으로 수이전에 실렸다가 대동운부군옥에 전재되어 전하는 설화로, 화재 예방을 위한 풍속을 사랑과 연관시켜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선덕 여왕이 주문(呪文)을 지어 불귀신(不神)의 원한을 달래어 물리치게 된 연유를 담은 풀이 기능의 설화 문학이다. 한(恨)을 소재로 하는 전통은 우리 문학사에서 신라 시대를 비롯하여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오늘에까지 이어져 왔다. 여기에는 주술성(呪術性)을 동반한 풀이 기능이 곁들여져 나타나고 있다. 불과 사랑을 관련지어 사랑의 의미를 높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심화 자료
선덕 여왕과 관련된 설화
제 27대 덕만의 시호는 선덕 여왕이요, 성은 김씨요,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 6년 임진(632)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16년 동안, 미리 기미를 안 것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붉은빛과 자주빛과 흰빛의 세 가지 빛으로 모란을 그려서 그 씨 3승(升)과 함께 보냈다. 왕은 이 그림의 꽃을 보더니 말하기를,
"이 꽃은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
하고 뜰에 심으라고 명령했다. 거기에서 꽃이 피고 지는 것을 기다려 보니, 과연 그 마로가 같았다.
둘째는, 영묘시(靈廟詩)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에 개구리가 많이 모여들어 3,4일 동안 울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상히 여겨 왕에게 물으니, 왕은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 등에게 명하였다. 정한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속히 서교(西郊)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을 찾아가면 반드시 적(賊)의 군사가 있을 것이니, 이들을 쳐서 죽이라 했다. 두 각간이 명령을 받고 각각 군사 천 명씩을 거느리고 서교(西郊)로 가 보니, 부산(釜山) 밑에 과연 여근곡(女根谷)이라는 곳이 있고, 백제 군사 5백 명이 거기에 숨어 있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였다. 또 그 뒤에서 군사 1천 3백 명이 왔으나 또한 쳐서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셋째는, 왕이 아무런 병도 없을 떄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 죽을 것이니, 도리천( 利天) 속에 장사지내라."
했다. 신하들은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어 어디냐고 물으니, 왕은 말하기를,
"낭산(狼山) 남쪽이다."
했다. 그 날이 되어 왕이 과연 죽으므로 산하들은 낭산(狼山) 남쪽에 장사지냈다. 그 뒤 10여 년이 되어 문무(文武) 대왕(大王)이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왕의 무덤 아래에 세웠는데, 불경에 말하기를,
"사천왕사(四天王寺) 위에 도리천( 利天)이 있다."
했으니, 이것으로 비로소 대왕(大王)의 신령스럽고 성(聖)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
삼국유사 권1, 선덕왕 지기 삼사조
한풀이 문학과 주술(呪術)성
'지귀설화', 즉 '심화요탑'은 선덕여왕이 주문을 지어 불귀신의 원한을 달래어 물리치게 된 연유를 지닌 해원(解寃)기능의 설화문학이다. 한을 소재로 하는 전통은 우리 문학사에서 신라 시대를 비롯하여 고려와 조선조 시대를 거치면서 오늘에까지 이어져 왔으며, 여기에는 주술성을 동반한 풀이 기능이 곁들여져 나타나고 있다. 신라 향가의 '혜성가', '도설가', '처용가', 등에 보인 풀이 기능은 '성조푸리, 바리데기' 등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심화요탑설화(心火繞塔說話)
선덕여왕을 사모하다가 죽어서 화귀(火鬼)가 된 지귀(志鬼)의 사랑을 그린 설화. 신이담(神異譚)에 속한다. 처음에 ≪수이전 殊異傳≫에 수록되었으나, ≪수이전≫이 소실됨에 따라 권문해(權文海)의 ≪대동운부군옥≫ 권20에만 전하고 있다.
또, ≪삼국유사≫ 권4 이혜동진(二惠同塵)조에도 관련 설화가 일부 보이는데 단순한 영묘사(靈廟寺) 화재 사건에 관련된 기사에만 그치고 있어 설화의 전모는 알 수 없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신라시대에 지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선덕여왕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여 고민한 나머지 몸이 점점 여위어 갔다. 하루는 여왕이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지귀를 불렀다. 지귀는 절간 탑 밑에서 여왕을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다. 여왕이 돌아가는 길에 그에게 다가가서 자신의 팔찌를 빼어 놓고 왕궁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 깨어난 지귀는 팔찌를 발견하고 자신이 잠든 사이에 여왕이 다녀갔음을 알고 사모의 정이 더욱 불타올라 마침내 화귀로 변해 버렸다. 설화가 끝나는 부분에 왕이 술사(術士)에게 명하여 주사(呪詞)를 짓게 하였는데, 주사의 내용은 “지귀가 마음에 불이 나 몸을 태우고 화신이 되었네. 멀리 바다 밖에 내쫓아 가까이하지 않으리.”였다.
그 당시 풍속에 이 주사를 문벽에 붙여 화재를 막았다는 설명이 덧붙여 있다. 이 설화는 그 배경이 신라로 되어 있고 선덕여왕이라는 실제 인물이 나오는 등 다분히 풍토화되어 있으나 그 근원은 불전설화에 두고 있다. 즉, 용수(龍樹)의 ≪대지도론 大智度論≫ 권14와 중국의 불교설화집인 석도세(釋道世)의 ≪법원주림 法苑珠林≫ 권21에 실려 있는 〈술파가설화 術波伽說話〉가 그것이다. 그 내용은, 어부 술파가가 왕녀의 미모에 반해 식음을 전폐하자 왕녀가 만나자고 한다.
천사(天祠)에서 왕녀를 기다리던 술파가가 잠이 들었는데 왕녀는 그에게 목걸이를 빼어 놓고 간다. 잠이 깨어 그 사실을 안 술파가는 몸에서 불이 나 타 죽고 만다는 것이다.
〈술파가설화〉는 다양한 사건, 긴 분량, 술파가 어머니와 왕녀 아버지의 등장, 천신의 구실 등 〈심화요탑설화〉보다 풍부한 내용과 합리적인 사건 진행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것은 ≪대동운부군옥≫이 백과사전적 문헌이기 때문에 수록하는 과정에서 기본적인 줄거리만 간추린 탓이며, ≪수이전≫에 수록되었을 본래의 설화는 훨씬 더 부연된 내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수록 문헌의 성립 연대로 보아 〈심화요탑설화〉는 〈술파가설화〉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듯하다. 〈술파가설화〉가 수록되어 있는 ≪대지도론≫이 이미 신라에 수입되어 경흥(憬興)과 대현(大賢)의 저서에 인용되고 있으므로 불경의 대중화 과정에서 〈술파가설화〉가 민간에 유출되어 구전되었고, 그 동안에 신라적 배경과 내용, 인물로 변개되어 〈심화요탑설화〉가 이루어지고 이것이 ≪수이전≫에 문헌설화로 수록되게 된 것이다.
두 설화는 이처럼 선후 영향 관계를 맺으면서 설화적 주지(主旨)의 수용에 입장을 달리하고 있다. 근원설화가 되는 〈술파가설화〉는 여자가 이성적 판단을 못 하고 감정에 휘말려 음심(淫心)에 빠지는 것을 종교적 입장에서 경계하는 내용이다.
그러기에 왕녀와 술파가와의 만남에 있어 천신이 술파가를 잠들게 함으로써 불가능하게 한 것이다. 〈심화요탑설화〉의 경우도 설화적 귀결은 그렇게 되어 있으나 종교적 의취가 탈색되면서 실제의 현실과 역사적 사실에 결부되어 다분히 풍토화되어 있다.
설화적 내용에서 선덕여왕의 미모와 신라 남성들의 자유분방한 애정 표현, 그리고 실제로 선덕여왕이 행차하던 영묘사와 그 절의 화재 사건은 역사적 사실과 일치된다. 또 설화의 끝 부분에 부가된 민속적 기사도 사실과 부합된다.
지귀가 타 죽어 화신(火神)이 되고 주사를 지어 문 벽에 붙임으로써 화재를 막았다는 것은 화신의 유래를 말하는 민속적 신앙의 표현이며, 주사는 주문(呪文)·주부(呪符) 등과 함께 민간 신앙의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설화를 연기설화(緣起說話)·영험설화(靈驗說話)로 보기도 한다.
이 설화는 국내에서 유화(類話)가 없는 독특한 것으로 종교적인 불교설화가 신라 시대에 토착화하면서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 결부되고, 이것이 다시 민간신앙에 연결되면서 민간설화로 토착된 것이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大東韻府群玉, 大智度論, 法苑珠林, 新羅殊異傳小攷(崔康賢, 국어국문학 25·26, 국어국문학회, 1962·1963), 心火繞塔說話攷(印權煥, 국어국문학 41, 국어국문학회, 1968), 志鬼說話小考(黃浿江, 新羅佛敎說話硏究, 一志社, 1975).
자료출처: http://www.seelotu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