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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시대의 왕족. 제2대 유리왕의 태자인 해명 태자 설화
15-10-24 15:18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유리왕 27년(서기8년) 봄 정월에 왕태자 해명은 옛도읍에 있었는데, 힘이 세고 무용(武勇)을 좋아하였으므로, 황룡국의 왕이 그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강한 활을 선물로 주었다. 해명은 그 사신 앞에서 활을 당겨 부러 뜨리며, “내가 힘이 세기 때문이 아니라 활이 강하지 못한 탓이다.”라고 말하였다. 황룡국왕이 이 말을 듣고 부끄럽게 여겼다. 왕은 이것을 듣고 성을 내며 황룡국왕에게,
“해명이 불효하니 (그를) 죽여 줄 것을 청합니다.”라고 말하였다. 3월에 황룡국왕이 사신을 보내 태자와 만나기를 청하였으므로, 태자가 가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지금 이웃 나라가 이유 없이 만나기를 청하니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라고 간하였다. 태자는 “하늘이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데 황룡국왕인들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하고는 마침내 갔다. 황룡국왕이 처음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그를 보고는 감히 해치지 못하고 예를 갖추어 보냈다.
유리왕 28년(서기 9년) 봄 3월에 왕은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말하였다.
"내가 천도(遷都)한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튼튼하게 하려는 것이다. 너는 나를 따르지 않고 힘센 것을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된 도리가 이럴 수 있느냐?"
그리고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 태자가 곧 자살하려고 하자 어느 사람이 말리며 말하였다.
"대왕의 맏아들이 이미 죽어 태자께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는데, 이제 (왕의) 사자가 한 번 온 것으로 자살한다면, 그것이 속임수가 아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태자는 말하였다.
"지난번 황룡국2) 왕이 강한 활을 보냈을 때, 나는 그것이 우리 나라를 가볍게 본 것이 아닌가 하여 활을 당겨 부러뜨려서 보복한 것인데, 뜻밖에 부왕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다. 지금 부왕께서 나를 불효하다고 하여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니 아버지의 명령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여진(礪津)의 동쪽 벌판으로 가서 창을 땅에 꼽고 말을 타고 달려 찔려 죽었다. 그 때 나이가 21세였다. 태자의 예로써 동쪽 들[東原]에 장사지내고 사당을 세우고 그 곳을 불러 창원(槍原)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해명 태자 설화(解明太子說話)>에서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요점 정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갈래 : 설화, 전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성격 : 비극적,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주제 : 해명의 비극적 죽음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의의 : 해명 태자 설화는 자아와 세계가 동일시되던 신화의 시대가 붕괴되고, 인간과 그를 둘러싼 세계(운명)간의 대립이 본격화되는 시대로 옮겨 가는 것을 보여준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출전 : 삼국사기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내용 연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이해와 감상
  이 설화는 이미 이 시대가 영웅의 시대가 아님을 보여 준다. 아버지나 죽은 아들 모두 납득할 만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본질은 신화가 보여 주었던 자아와 세계의 동질성이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이야기 주인공인 아들이 아버지가 부당하게 군림하는 세계의 횡포 때문에 희생당하고 말았다는 전설의 비극성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해명 태자 설화>는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전설 및 민담의 시대로 전환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신화는 일상적인 경험을 넘어선 아득한 옛날의 일이고 특별히 신성한 장소를 무대로 삼지만, 전설은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가 설정되어 있고, 증거물이 존재한다. 신화의 주인공은 보통 사람보다 탁월한 능력을 지닌 신성한 인물인 데 반해, 전설 속의 인물은 대개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된다.(출처 : 중앙교육진흥연구소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심화 자료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해명
  서기 전 12(유리왕 8)∼서기 9(유리왕 28). 고구려시대의 왕족. 제2대 유리왕의 태자이다. 본래 태자였던 도절(都切)이 죽음으로써 서기 4년(유리왕 23)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이 해에 고구려가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할 때 부왕을 따라가지 않고 졸본(卒本)에 남아 있었다. 힘이 세고 용감하였는데, 서기 8년 이웃의 황룡국(黃龍國) 왕이 이를 듣고 힘을 시험하여보려고 강한 활을 보내자, 고구려를 가볍게 보지 못하도록 활을 쉽게 꺾어 황룡국 왕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런 것들이 원인이 되어 유리왕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유리왕은 황룡국으로 하여금 그를 유인, 살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서기 8년 황룡국에 초빙되어 갔으나 오히려 황룡국이 그의 위엄에 눌려 그대로 돌려보냈다. 서기 9년 유리왕이 칼을 내려 자결할 것을 명령하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원동원(礪原東原)으로 가서 달리는 말에서 몸을 날려 미리 땅에 꽂아 둔 창에 찔려 죽었다. 조정에서는 태자의 예로 장례하고 이 곳에 묘(廟)를 세우고 창원(槍原)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황룡국(黃龍國)
   초기 고구려 주변에 있었던 나라. 서기 8년(유리왕 27) 정월에 당시 고구려 왕태자 해명(解明)이 옛 수도인 졸본(卒本)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힘이 세고 무용(武勇)을 좋아하였다. 이웃의 황룡국왕이 이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해명에게 센 활을 주었다.
해명은 황룡국왕이 고구려를 업신여길까 염려하여 그 사자(使者) 앞에서 활을 당겨 꺾어 보이면서 “내 힘이 센 것이 아니라 활 자체가 굳세지 못하다.”고 말하였다. 고구려 유리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황룡국왕에게 말하기를 해명이 자식으로서 불효하니 청컨대 나를 위하여 목을 베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같은 해 3월에 황룡국왕이 사람을 보내어 해명을 청하였다. 해명이 오자 처음에는 죽이려고 꾀하다가 그를 보고서는 감히 해를 가하지 못하고 도리어 예로써 보내 주었다. 이 같은 황룡국왕과 해명태자와의 관계 속에서 고구려 초기의 국가 규모 내지는 능력 뿐만 아니라 대외관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료출처: http://www.seelot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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