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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대첩

대첩이라는 말은 흔히 ‘큰 승리’를 뜻하는 말로 전투에서 크게 이겼거나 적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을 경우 사용한다. 임진왜란 당시 3대 대첩이 좋은 예다. 그 중 진주대첩은 두 개의 대첩으로 나뉘는데, 1차 진주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성대첩이며, 2차 진주대첩은 의기 논개의 죽음으로 알려진 싸움이다.
1차 진주대첩은 선조 25년인 1592년 10월 5일, 왜군 약 3만 명이 수천 죽제(竹梯 :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공격, 진주목사 김시민이 지휘한 3800명의 조선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전투다. 김시민 장군은 진주성민들의 필사적인 단결과 곽재우·최강·이달 등 각처 의병들의 열렬한 성원에 고무돼 죽기를 각오하고 진주성을 지키기로 결심한 후 만반의 전투 준비를 갖췄다.
왜군은 신식무기인 조총을 주무기로 3개 부대로 나눠 공격을 감행했다. 김시민 장군은 적군의 화력을 최대한 소모시키고자 일정한 거리에 올 때까지 대적하지 않고 성 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위장했다. 또 직접 성내를 순회하면서 임전태세를 점검하고 음식을 제공하는 등 장병 위에 군림하기보다 자신도 병사와 같이 동고동락하면서 솔선수범했다.
이처럼 장군의 몸을 아끼지 않는 노력에 감복한 군사·진주성민들은 혼연일체가 돼 죽기를 무릅쓰고 싸우게 됐다. 장군은 소수 병력으로 대병을 맞아 싸우면서 필승하기 위해 조선군의 신식무기를 적절히 활용했으며 성민들의 돌·기와·짚단 등 투척, 성 밖 의병들의 산발적 공격 등 다양한 전술을 구사했다.
결국 1차 진주성전투는 의병들의 적극적인 성원에 힘입은 김시민 장군의 탁월한 용병술·전략술, 그리고 진주성 내의 모든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돼 죽기를 각오하고 결사 항전한 결과 3만 명의 왜병 중 2만여 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대승을 거뒀다.
2차 진주대첩에서는 조선군이 패했지만 일본 군사들도 처참하게 무너졌다. 1차 진주대첩에서의 참패를 만회하고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고니시 유키나가, 그리고 우키타 히데이에 등에게 복수전을 하도록 특별명령을 내렸다. 왜군은 6월 15일부터 작전을 개시, 18일까지 함안과 반성·의령을 점령하고, 19일 3만7000명의 병력으로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2차 진주대첩은 6월 22일부터 본격 전개됐으며 왜군은 귀갑차 등 특수한 병기로 파상공격을 거듭했다. 일진 일퇴의 치열한 공방 끝에 거의 모든 장병이 죽고 29일 진주성은 함락됐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 벌어진 전투 가운데 최대의 격전으로 꼽히는데, 비록 싸움에는 패했으나 왜군도 막대한 손상을 입었다.
진주대첩은 호남지역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시도를 좌절시켜 국내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호서를 온전히 보전하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의주까지 피란간 선조 임금을 비롯한 대소신료 및 조선 군사와 의병들에게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워 줬다. 또 왜군으로 하여금 남방에 강력한 조선군이 있어 전역을 확대하지 못하게 하고 조선군을 더 이상 깔보지 못하게 했다.
현재 진주에서는 매년 10월 진주성을 끼고 도는 푸른 남강을 배경으로 진주 유등축제가 열린다. 진주 남강 유등은 진주대첩 당시 김시민 장군의 전술도구로 이용되기도 했고, 진주성 밖과 안의 소식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이용됐다.
이후 1593년 6월 왜군에 의해 진주성이 적의 손에 떨어지는 통한의 ‘계사순의(癸巳殉義)’가 있고 난 뒤부터 오직 한마음, 지극한 정성으로 나라와 겨레를 보전하고 태산보다 큰 목숨을 바쳐 의롭게 순절한 7만 병사와 진주성민의 숭고한 얼과 넋을 기리는 행사로 이어져 오늘의 진주개천예술제 유등놀이로 자리잡았다.
임진왜란, 6·25 등 우리나라가 국난에 처했을 때마다 경남지역에서는 민·관·군이 하나가 돼 애국심과 향토수호의지를 몸소 보여 왔다. 이렇듯 숭고한 민·관·군 통합 방위의지는 오늘날 백전 백승의 신념을 가진 ‘진짜 사나이’들이 있는 육군39사단을 통해 그 정신이 계승되고 있다. 
                                                                                            출처 : 국방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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