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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성

우리나라 제2의 도시인 부산은 동래성에 읍치를 둔 고을로 풍요로운 땅을 일컫는 이름이다. 이곳 부산의 뿌리이며 역사와 충절의 고장 동래에서는 매년 10월이면 동래읍성 역사축제가 펼쳐진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동래성 전투를 재현하는 역사체험으로,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맞서 싸웠던 선조들의 투혼과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
동래성 전투는 1592년 임진년 음력 4월 14일 왜군이 부산진을 함락시키고 다음날인 15일 주력군을 이끌고 동래성 앞에 도착해 벌인 싸움이다. 당시 왜군의 침입과 부산진 패배 소식을 들은 동래부사 송상현은 동래와 주변 고을의 군사를 소집하고 왜군의 공격에 대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왜군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진구 양정동 일대에 진을 치고 부산진성에서와 같이 길을 빌려 달라는 제안을 하는데 동래성 남문 밖에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는 팻말을 세웠다. 이에 송부사는 ‘죽기는 쉽고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는 팻말을 세워 보였다. 송부사의 팻말을 보자 왜군은 공격을 시작해 동래성을 세 방면으로 공격해 들어갔으며, 조선군과 왜군 모두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두 시간가량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조선군은 왜구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으나 신식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공격에 조선의 방패막은 쉽게 뚫릴 수밖에 없었다. 왜군은 동래성 남문쪽을 집중 공격했고, 조선군은 남문쪽으로 집중돼 치열한 항전을 펼치고 있었으나 정작 왜군이 돌파한 곳은 남문이 아니라 동문인 인생문 쪽이었다. 왜군은 남문을 주로 공격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수비가 취약한 동문을 돌파한 것이었다.
왜군들이 성 안으로 난입하면서 치열한 백병전이 성 안 곳곳에서 전개됐다. 동래부의 군사들과 주민들은 부산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치열하게 항전했으나 왜군의 기세에 차츰 밀리게 됐다. 생의 마지막이 임박했음을 느낀 송부사는 단정하게 조복을 입고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한 다음 부채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孤成月暈(아성월훈) 고립된 성을 적이 달무리처럼 에워쌌고 大鎭不救(대진불구) 진을 구할 길이 없사옵니다 君臣義重(군신의중) 군신 간의 의가 중하여 여기서 죽게 되니 父子恩輕(부자은경) 부모님의 은혜를 소홀히 하는 불효를 용서하소서
끝내 송부사는 왜군의 칼에 전사했으며 송부사의 인품을 잘 알던 왜장은 그의 죽음에 감복해 시신을 거둬 동문 밖에 장사지내 주었다고 전해진다. 동래성은 허물어진 부산진성과 달리 일부분이 남아 있는데 일제 강점기에 시가지 정비라는 명목으로 남문과 서문·동문 등을 헐어버렸지만 현재 북문과 동문·북장대·서장대·동장대가 복원된 상태다.
이 중 동문인 인생문(人生門)은 임진왜란 때 이곳 인생문을 통해 피란갔던 사람은 모두 목숨을 건졌다는 유래가 전해지며, 혹은 이 고개가 죽은 자가 나가는 유일한 문이었다는 설과 당시 성내에는 무덤 터를 둘 수 없어 동래성 내에서 지금의 명장동에 있었던 공동묘지 터로 나가는 유일한 문이었기 때문에 인생무상이라는 말에서 인생문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올 6월에는 부산 지하철 3호선 공사구간의 철제 빔 아래로 동래읍성 전투 당시의 유물이 무더기로 출토돼 처절한 전장의 모습이 발굴되기도 했다.비록 패전으로 끝났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책임지역을 지켜내려는 송부사의 충성심과 동래부 군사들·부민들의 저항정신은 오늘날 부산·울산·양산지역을 방어하는 육군53사단에 계승되고 있다.
[이 게시물은 master님에 의해 2015-04-07 14:43:41 블로그광장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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