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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에 사이에 있는 죽령고개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에 사이에 있는 고개. 높이 689m. 일명 죽령재, 대재라고도 한다. 신라 제8대 아달라이사금 5년(158)에 길을 열었다. 소백산맥의 도솔봉과 북쪽의 연화봉과의 안부에 위치한다. 높이 689m. 일명 죽령재·대재라고도 한다. 신라 제8대 아달라이사금 5년(158)에 길을 열었다. 소백산맥의 도솔봉(兜率峰, 1,314m)과 북쪽의 연화봉(蓮花峰, 1,394m)과의 안부(鞍部)에 위치한다.
동쪽 사면은 내성강(乃城江)의 지류인 서천(西川)의 상류 계곡으로 통하고, 서쪽 사면은 남한강의 지류인 죽령천(竹嶺川)의 상류 하곡과 이어진다. 도로도 이들 하곡을 따라 개통이 되나, 동쪽은 사면의 경사가 급하고 많은 침식곡이 발달하여 희방사(喜方寺) 계곡 입구부터 고갯마루까지는 굴곡이 심한 길이다.
또한 고갯마루에서 서쪽의 보국사(輔國寺)까지는 비교적 완사면으로 내려가나 곡저(谷底)의 당동리까지는 다소 굴곡이 심한 내리막길이다. 이와 같이 비록 험한 고갯길이었으나 예로부터 영남 지방과 호서 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1941년 죽령 밑으로 4,500m의 죽령터널을 뚫어 중앙선이 개통되었고, 터널의 동쪽에 희방사역, 서쪽에 죽령역이 개설되었다.
죽령역에서 곡저까지는 급경사이므로 철도는 원형의 ‘또아리굴’을 파서 360° 회전하며 하강한다. 이와 같은 두 개의 큰 터널 외에도 양사면을 통과하는 철로는 많은 굴을 통과하고 있다. 철도의 개통으로 죽령 북쪽 단양군 일대의 지하자원이 급속히 개발되기 시작하였고, 특히 시멘트공장과 석회분말공장이 건설됨에 따라 죽령의 구실이 더욱 커졌다.

동쪽 풍기에는 풍기인삼이 유명하며, 희방사역에서 하차하여 북쪽으로 약 3㎞ 계곡을 올라가면 희방폭포와 희방사에 이르고 아름다운 풍경을 접할 수 있다. 서쪽 사면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여 산지의 높은 곳까지 개간되었고, 고갯마루 근처에도 계단식 뽕나무밭이 조성되어 산림이 울창한 동쪽 사면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죽령은 삼국 시대 이래로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조선 시대에는 죽령사(竹嶺祠)라는 산신사당이 있었다. 지금도 용부원리 계곡에 산신당이 있고, 터널 입구 부근에 제2단양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죽령폭포가 있다. 옛날 어느 도승이 이 고개가 너무 힘들어서 짚고 가던 대지팡이를 꽂은 것이 살아났다 하여 죽령이라 하였다 한다.

큰 산은 홀로 있어도 위엄이 있게 마련이다. 그 위엄은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산 너머 미지의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무한한 동경을 낳게 한다. 아무리 산이 높고 험해도 사람들은 그 미지의 세계를 확인하기 위해 길을 낸다. 길은 그래서 인류가 만든 문명의 이정표다.
백두대간이 남북으로 내달리다가 지나치다 싶어 방향을 동서로 트는 곳이 태백산이다. 태백산에서 소백산을 지나 속리산까지는 거의 횡단산맥이다. 북에서 남으로 내달리기는 쉬워도 동에서 서로 횡단하려면 기를 축적해야 한다. 기를 모으고 숨을 고르는 고개 중의 하나가 해발 689m의 죽령(竹嶺)이다.
태백산·소백산이 어느 도시와 연계된 이름이 없듯이 죽령 또한 경북·충북의 경계지대에 위치해 관형사 없이 `죽령'으로 홀로 서 있다. 이는 죽령에서 힘을 얻어 월악산·속리산을 이어주는 `문경 새재'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죽령은 계립령(鷄立嶺)과 함께 `삼국사기'에 그 이름이 처음부터 등장하는 큰 고개다. 계립령은 지금 `하늘재'로 불리는 새재 동편에 있는 작은 고개다. 계립령·죽령 남쪽에 내리는 비는 모두 지금의 영남을 아우르는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낙동강 동편이 신라 땅이다. 신라는 건국 후 낙동강 너머로 진출을 꾀했고 다시 낙동강의 시원지인 백두대간의 소백산·월악산 너머 북쪽 땅에 눈을 돌렸다.
역사가에 따라서는 신라 원주민이 동서로 뻗어 있는 백두대간을 넘어 경주로 들어갔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옳다면 신라 아달라왕 3년(156)에 개척한 계립령이나 5년(158)에 개척한 죽령은 그들 선조들이 넘어온 길을 회복한 셈이 된다.

아무튼 죽령 개척은 신라 역사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다. 신라가 건국 초기부터 북방에 관심을 두었고 구체적으로 지금의 죽령·새재 근처에 길을 냈다는 것은 향후 삼국의 역사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잠시 역사의 전개를 뒤로하고 `죽령'이라는 이름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삼국사기'에 단 한 줄로 표기된 아달라왕의 죽령 개척 기록은 `동국여지승람'에 한결 상세히 나타난다. 이에 따르면 아달라왕의 명을 받아 죽죽(竹竹)이 길을 개척하고 이곳에서 순사(殉死)하자 그를 기리는 사당을 고갯마루에 짓고 죽죽사(竹竹祠)라고 했다 한다. 이어 죽령도 그의 이름에서 비롯됐다고 전한다.
훨씬 후대의 이야기가 `삼국유사'에도 전한다. 신라 효소왕(재위 692~702) 때 화랑 죽지랑의 탄생설화가 그것이다. 술종공이 기병 3000명을 거느리고 삭주도독으로 부임하던 중 죽령고개에서 길을 닦는 한 거사를 만났고 그 거사가 죽어 술종공의 아들 죽지로 태어났다는 이야기다. 그가 전생에 닦은 고갯길을 그의 이름을 따 죽령이라고 했다 한다.
다른 한편 죽령은 우리나라에서 대나무가 자생하는 북방한계선이기도 하다. 대나무가 자라는 마지막 고개라는 점에서 죽령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일찍이 신라가 죽령을 개척했지만 죽령 이북은 광개토대왕 이후 고구려가 지배했다. 진흥왕 때(550년께) 비로소 죽령을 넘어 단양의 적성산성을 탈취하고 남한강을 따라 지금의 북한산·함흥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이에 맞서 40년 뒤 고구려의 온달장군이 실지회복의 웅지를 품고 이웃한 영춘까지 내려오지만 끝내 기운 전세를 만회하지 못했다. 이처럼 죽령 일대는 마치 한강처럼 삼국의 요충지로 밀고 밀리는 전장이 됐다.
삼한이 통일된 후 죽령은 더 이상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받지 못했다. 영남으로 통하는 길목은 새재가 차지했다.
개성이나 서울로 과거보러 가는 사람들도 새재를 즐겨 이용했다. 속설에 추풍령을 넘어 과거보러 가면 추풍낙엽처럼 시험에 떨어지고 죽령 또한 대나무에 미끄러지듯 떨어진다고 해 새재가 선비들의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조 중기 예언가 남사고의 말처럼 죽령은 소백산·태백산과 함께 인재가 넘나드는 고개로 주목받았다.
죽령 북쪽 단양에서는 해동 역학의 시조인 우탁 선생과 삼봉 정도전이 태어났고 고개 남쪽은 퇴계 이황의 고향이다. 죽령 양쪽에 십승지가 모여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퇴계 선생과 그의 문인들이 넘나들던 죽령도 이제는 중앙고속도로에 옛 영화를 넘겨주었다. 새로운 길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있다. 죽령 옛길은 잡초에 묻혀가고 30리 굽이굽이 돌아가던 국도는 죽령 터널에 길을 양보했다.
다만 고갯마루의 주막만은 아직도 길손을 받고 있다. 국도를 넘나드는 여유, 고갯마루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얻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사람들이 잊을까 죽령은 두려워하고 있다.

포인트-적성산성과 신라碑
풍기에서 달려온 길을 뒤돌아보면 멀리 죽령과 소백산의 연봉들이 구름처럼 하늘 위에 떠 있다. 신비감을 자아내는 산자락을 따라 내려오면 좌측으로 단양읍에 이르는 충주호의 물길이 반긴다.
다시 발길을 돌려 올라갈 제천 방향을 바라보면 거대한 다리가 용의 몸체처럼 꿈틀거린다. 한눈에 심상치 않은 지세임을 느끼게 된다.
단양 휴게소 건물 뒤편에 우뚝 선 산이 적성산이고 이 산 꼭지를 따라 돌로 성을 쌓았다. 사적지로 지정된 적성산성이다. 성의 길이는 923m에 이른다. 대부분 붕괴됐지만 삼국시대 석축의 축성술을 살펴볼 수 있는 정도의 유적은 남아 있다.
1978년 단국대 학술조사단이 이곳에서 유명한 신라비를 발견했다. 국보로 지정된 신라비는 진흥왕이 이곳을 개척하고 공로자들을 포상한 내용이 비문에 담겨 있다. 석비의 건립 연대는 진흥왕 6~11년(545~550)으로 추정된다. 적성산성은 신라가 죽령을 넘어 남한강 변에서 고구려와 강역을 다투던 역사의 무대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가볼 만한 유적지-단성 충혼탑
단양에서 충주로 나가는 국도 변, 중앙고속도로 고가도로 아래 단성면이 있다. 면사무소에서 적성산성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에 충주호로 수몰된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수몰이주기념관이 건립돼 있다. 기념관과 마주한 언덕 위에 충혼탑이 세워져 있다.
6·25전쟁 때 단양은 한국군 8사단이 개전초기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방어진지를 구축, 전투를 벌인 곳이다.
제천에서 후퇴한 8사단은 단양에 도착 즉시 남한강을 따라 서북방으로 21연대를 배치하고 10연대를 예비대로 단양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8사단은 매포지역에 전방지휘소를 마련한 북한군 8사단을 기습공격, 북한군 100여 명을 사살하고 포 10문·트럭 3대를 폭파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미 공군 F-51 2개 편대의 항공지원을 받아 북한군의 공격 기도를 사전에 봉쇄했지만 북한군의 야간공세로 21연대가 큰 피해를 입었다. 8사단은 풍기에 이르는 퇴로가 차단될 우려가 있어 죽령 부근으로 철수해 단양지역 전투는 일단 막을 내렸다.
충혼탑은 단양지구 전투에서 산화한 지역 청년방위대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먹거리-왕대나무밥
단양 일대는 충주호와 연결돼 있어 곳곳에서 민물고기 매운탕을 주로하는 음식점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메기 매운탕이 일품.
그런가 하면 죽령 아래 대강면 소재지에서 사인암으로 들어가는 네거리에 자리한 `장씨본가'는 일반적인 충청도 음식과 다른 독특한 먹거리를 개발, 수년 전부터 명성(?)을 얻고 있다. 왕대나무밥이 그것. 불고기가 함께 나오는 왕대나무밥은 대나무 진액이 그대로 묻어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
최근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도락산 일대의 한식집도 찾을 만한 곳이다. 이곳 `도락산가든'은 염소·토종닭·오리를 방목, 자연산임을 자랑하는 데다 직접 재배한 무공해 야채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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