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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5대왕 광해군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에 있는 조선 제15대왕 광해군과 그 부인 문화유씨의 묘소. 사적 제363호. 묘는 쌍분이며 곡장, 혼유석, 장명등, 문인석 등이 있다.
사적 제363호. 지정면적 5만 7,742㎡. 광해군은 초기에는 빈민구제와 국방에 주력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인조반정으로 폐위되고 1623년(인조 1) 3월 광해군으로 강봉되었으며, 같은 해 3월 폐비 유씨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이배()되었다.
1641년 7월 이배지에서 죽어 그 곳에 장사지냈다가 1643년 10월에 지금의 묘소로 천장()하였다. 문성군부인 유씨()는 지돈녕부사 자신()의 딸로 1576년에 태어나 1592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 왕비로 진봉()되었다.
1623년 광해군과 함께 폐출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으며 그해 10월 강화도에서 죽어 광주군 적성동에 장사지냈다가 광해군이 죽은 뒤 같은 묘역에 천장하였다. 묘는 쌍분()이며 곡장()ㆍ혼유석()ㆍ장명등()ㆍ문인석() 등이 있다.
광해군 묘비 전면에 ‘(광해군지묘)’, 후면에 ‘ (신사칠월초일일병졸어제주명철조삼일)’이라 새겨져 있다.
 
포인트-강홍립 장군의 비극
강홍립(姜弘立) 장군은 명종 15년(1560) 서울에서 태어나 인조 5년(1627)에 타계했다. 1597년 알성문과로 급제해 벼슬길에 올라 광해군 즉위 다음해에 한성부 부윤(서울부시장격)에 올랐고 1614년 순검사, 1618년 진령군에 봉해졌다.
이해 윤4월, 명나라가 요동을 침범한 후금을 토벌코자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자 도원수(都元帥)에 임명돼 출병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광해군은 출병하는 도원수 강홍립 장군에게 “한 사람이라도 덜 상하게 하고 사태를 보아 국가 이익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투항하라”는 밀지를 내렸다. 1만3000명의 원병을 거느리고 출정한 강장군은 전투에서 패하자 곧바로 후금에 “조선의 출병은 명의 강요에 따른 것으로 후금과 싸울 의사가 없다”며 투항했다.
강장군은 후금에 억류돼 있으면서 그곳 정세를 세세히 광해군에게 보고했다. 광해군은 이를 바탕으로 북방의 국력을 강화했다.
비극은 인조반정으로 시작됐다.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하면서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됐다.

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홍립은 후금을 따라와 강화도에서 화의를 맺는 데 기여해 전란의 확대를 막았다.
이후 국내에 잔류한 강장군은 역신으로 몰려 관직이 삭탈됐고 이를 분노해 화병으로 죽었다는 설과 자결했다는 설 등 최후가 분명치 않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난곡마을은 그가 관직을 삭탈당한 후 난을 키우며 지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가볼만한 유적지-정순왕후 사릉
남양주시 진건읍 광해군묘로 가는 길 입구에 사적 제209호 사릉(思陵)이 있다. 능의 주인공은 `단종애사'의 주인공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 송씨다.
세조 3년(1459) 사육신의 단종 복위 사건이 일어나자 세조는 이를 문제삼아 상왕으로 모신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 강원도 영월로 유배하고 정순왕후도 부인으로 강봉해 궁궐에서 추방했다.

단종이 죽자 동대문 밖 숭인동에 초옥을 지어 `정업원'이라 하고 동망봉에 매일 소복으로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통곡했다고 한다.
숙종 24년(1698) 단종이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로 추봉돼 종묘에 신위가 모셔지고 능호도 사릉이라고 했다.
일반 공개는 하지 않으나 입구에서 볼 수 있다.

먹거리-고모네 원조 콩탕
사릉 일대에는 특별한 음식점이 눈에 띄지 않는다. 사릉에서 진건읍내 쪽으로 갈비와 막국수를 파는 `석화촌'이 가장 큰 음식점이다. 도로변에 자리해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사릉에서 광해군묘 입구에 들어서면 남양주시 일대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적성골 콩탕집이 있다. 경기도 전통음식점 `고모네 원조 콩탕'이 그 집이다. 국산 콩으로 빚어내는 담백하고 알싸한 맛이 바로 `경기도 맛'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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