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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 대왕암

토함산 뒤쪽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대종천을 이루고 그 물줄기가 동해로 흘러드는 감포 앞바다. 봉길리해수욕장이 들어선 이곳 해안에 서면 바다 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바다 경치를 돋우는 아담한 바위섬이 눈에 들어온다. 문무왕의 산골처(散骨處) 혹은 수중릉으로 알려진 대왕암이다. 죽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던 문무왕의 납골이 뿌려진 곳이다. 멀리서 보는 대왕암은 평범한 바위섬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바위 한가운데가 못처럼 패어 있고 둘레에 자연암석이 기둥 모양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워진 모습이다. 한 변의 길이가 약 3.5m 되는 못 안에는 거북이 등 모양의 길이 3m, 폭 2.2m의 돌이 얹혀져 있다. 못 안의 물은 돌을 약간 덮을 정도이며, 거센 파도에 아랑곳없이 항상 맑고 잔잔히 흐르도록 되어 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트인 십자형의 수로를 통하여 동쪽으로 들어온 물이 서쪽으로 난 수로의 턱을 천천히 넘어 다시 바다로 흘러나간다. 못 안의 돌 밑에 문무왕의 유골 장치가 있다는 설도 있지만 이는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다. 다만 외곽을 둘러싼 바위 안쪽에 인위적으로 바위를 따낸 흔적이 있는 것으로 그렇게 추정할 따름이다. 만약 이 장치가 유골을 묻은 것이라면 세계에서도 드문 수중릉이 될 것이지만, 이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정권안보에 이용하려 한 부끄러운 일일 뿐이다.
사실 대왕암은 오래전부터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한 납골을 뿌린 산골처로 알려져왔으며, 주변 어부들은 이미 이곳을 신성하게 여겨 근처에도 잘 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대왕암이 문무왕의 수중릉으로 둔갑해 처음 발견된 것처럼 신문에 대서특필된 것이다.

문무왕은 아버지대의 백제 정벌(660년)에 이어 고구려 정벌(668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이후 신라에 대한 당의 야심을 알아채고 그 세력을 몰아내는 전쟁까지 치러냈다. 삼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대업을 마무리하여 명실공히 통일신라의 찬란한 문화시대를 연 문무왕은 평소 이렇게 유언하였다.
“이때까지 우리 강토는 삼국으로 나누어져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제 삼국이 하나로 통합돼 한 나라가 되었으니 민생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 그러나 동해로 침입하여 재물을 노략질하는 왜구가 걱정이다. 내가 죽은 뒤에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킬 터이니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 지내라. 화려한 능묘는 공연한 재물의 낭비이며 인력을 수고롭게 할 뿐 죽은 혼은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숨을 거둔 열흘 뒤에는 불로 태워 장사할 것이요, 초상 치르는 절차는 힘써 검소와 절약을 좇아라(『삼국사기』 문무왕 21년(681)조)

『삼국유사』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신문왕은 681년 7월 7일 즉위하였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를 세웠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 이 절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 바다의 용이 되었는데,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682년에 마쳤다. 금당 계단 아래를 파헤쳐 동쪽에 구멍을 내었으니 용이 들어와 서리게 한 것이었다. 생각컨대 유조로 장골(葬骨)케 한 곳을 대왕암이라 하고 절은 감은사라 하였으며, 그후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라 하였다.”
한편 조선 시대 경주 부윤을 지낸 홍양호의 문집 『이계집』(耳溪集)에는 그가 문무왕릉비의 파편을 습득하게 된 경위와 문무왕의 화장 사실, 그리고 대왕암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1796년경 홍양호가 발견했다는 문무왕릉비 두 편 가운데 한 편과 그보다 작은 파편 하나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그 내용 중에 “나무를 쌓아 장사 지내다(葬以積薪), 뼈를 부숴 바다에 뿌리다(硏骨鯨津)”라는 대목이 있다.
결국 대왕암이 세계 유일의 수중릉이라는 것은 후세 사람의 욕심에서 나온 근거 없는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문무왕의 호국 의지를 담은 대왕암의 본뜻이다.
대왕암은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무왕의 화장과 관련된 유적지로는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지고 있는 능지탑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발견된 ‘사천왕사지문무왕비편’이라는 묵서(墨書)를 근거로 문무왕릉비가 사천왕사에 세워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능지탑과 사천왕사터는 경주 배반동 낭산 기슭에 있다.

포인트-이견대
대종천이 동해로 들어가는 입구 왼편, 감포읍으로 가는 국도변에 이견대(利見臺)가 있다.
한국의 정자·누각들이 대부분 경비초소의 자리에 위치하듯 이견대 자리도 동해를 한눈에 감시하고 또 대종천을 따라 경주로 들어가는 외적을 놓치지 않고 지킬 수 있는 곳이다. 당연히 이런 자리는 예나 지금이나 국방 차원에서 무게를 둘 만한 곳이다.
이와 더불어 이견대는 아들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나는 자리다. 부자는 이곳에서 생사를 초월해 만나 국가경영의 지혜를 나눈다. 이견대라는 이름도 여기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이견'이란 `주역'의 중천건괘 5효를 설명하는 효사에 나오는 말이다. 이 효에는 `비룡재천(飛龍在天) 이견대인(利見大人)'의 뜻이 담겨 있다.
즉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봄이 이로우리라'는 것. 돌아가신 문무대왕이나 그의 아들 신문왕 두 사람이 비룡에 해당한다. 그러나 아들 신문왕에게는 아버지 문무왕이 대인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돌아가신 문무왕이 용이 되어 이견대에 나타났다고 한다. 이후 신문왕은 용(아버지)을 만나기 위해 이견대에 정자를 지었다.

가볼 만한 유적지-감은사지
경주의 동해 입구인 감포에 왜구를 막기 위한 세 가지 보물이 있다. 첫째가 대왕암, 둘째가 이견대, 셋째가 감은사다.
감은사는 문무왕이 살았을 때 왜구를 진압코자 짓기 시작했다. 문무왕이 돌아가자 그의 아들 신문왕이 뒤를 이어 호국 사찰로 완공했다(682년).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절의 금당은 신문왕이 돌아가신 아버지 문무왕이 용이 되어 드나들 수 있게 설계됐다고 한다. 이는 발굴 조사 결과 사실로 확인됐다. 지금의 감은사 앞에 있는 연못은 과거 바닷물이 드나들던 곳으로 확인됐고 이 연못과 금당은 일직선으로 배치됐다. 금당 자리에는 돌다리 형식의 긴 장대석이 자리해 그 아래로 바다와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동서 2기의 삼층탑은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탑상이다. 웅장한 규모와 절제된 미가 신앙의 대상으로서 숭고함과 이를 조성한 장인의 걸출한 기상을 나타내고 있다. 1960년 서쪽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삼층 탑신에서 창건 당시 넣은 청동제 사리기·사각의 함이 발견돼 국보로 지정됐다.

먹거리-활어회
바닷가에서 특별한 음식을 찾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생명의 근원인 바다가 키워내는 무궁무진한 생명체인 어패류를 두고 달리 구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대왕암과 인접한 해안도로를 따라 횟집이 줄을 서 있고 이견대 아래에도 새로 지은 횟집 단지가 조성돼 있다. 도다리·광어·전복 등 싱싱한 자연산 회를 즐길 수 있다.

은은하고 비린내 나는 포구의 맛을 느끼려면 감포항으로 가면 된다. 뱃기름 냄새와 경상도 아낙네들의 사투리가 뒤섞인 감포항 저자의 횟집들은 값도 싸고 반찬도 전라도식으로 많이 나온다. 감포항 횟집은 멀리 대구에서도 찾아오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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