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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에 선 공자당이 변한 지천서원

김세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성종 4년인 1473년에 태어나, 중종 28년인 1533년에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공석, 호는 십청헌(十淸軒), 지비옹이라 했다. 벼슬을 그만 둔 김세필은 이곳 말머리에 입향하여 공자당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한 것이 시초가 되어 지천서원이 창건되었다고 한다.
 
서원은 비탈에 세웠는데, 아마 이 공자당은 십청헌이 정자로 삼아 후학들을 양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서원과는 앉은 자리부터가 다르다. 돌계단 위에는 노송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고, 좌측으로는 솟을대문이 서 있는데 앞에는 경모문(景慕門)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안으로는 1936년에 건립한 사우가 자리한다.
 
충북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 팔성리 고가를 지나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지천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홍살문이 향교나 서원의 대문 앞에 자리하는데 비해, 이 지천서원은 홍살문을 지나 사우까지 꽤 떨어져 있다. 홍살문 좌측으로는 비들이 줄지어 서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서원 앞에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심청헌 김세필이 세운 공자당
  
우측으로는 작은 일각문이 서 있고, 그 뒤편에 공자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 공자당은 그 형태가 '공(工 )'자와 같이 생겼다고 하나, 문이 잠겨 있어 안을 확인할 수가 없다. 공자당이 서원으로서의 기능을 갖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 영조 10년인 1740년이라고 하니, 심청헌이 세상을 떠난 지 20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앞에서 보면 평범한 공자당
 
낮은 울타리 안에 자리한 공자당. 비탈진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정면 네 칸으로 꾸며진 공자당은 양편에 방을 놓고, 가운데 두 칸의 마루 대청이 있다. 대청의 뒷벽에는 중수기 등이 걸려있는데, 멀어서 확인을 할 수가 없다. 공자당의 우측 벽 밑으로는 한데 아궁이가 나 있어 이곳에서 불을 때고 겨울에도 이용을 한 듯하다. 아궁이 위 벽이 시커멓게 그을린 것으로 보아, 요즈음에도 불을 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천서원은 정조 24년인 1800년에 중건하였으며, 대원군 때인 1868년에 내린 서원 철폐령으로 헐리기도 했다. 그 후 1893년에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오다, 1898년 공자당을 중건했다.

8현을 모신 사우
 
지천서원의 사우에는 십청헌 김세필을 비롯해 모두 8분을 모시고 있다. 동문선에 시문이 실린 고려 말기의 문신인 상촌 김자수는, 고려 말기에 안동에 은거하다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마다하고 자결을 하였다. 충민공 김저는 중종 7년인 1512에 태어나, 명종 2년인 1547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저는 흉년이 들자 암행어사로 경상도에 파견이 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큰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시문에 능한 눌재 박상. 『눌재집』을 남긴 박상은 이행과 함께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이 외에도 남곡 김의, 추곡 김정현, 학주 김흥욱, 성남 김종현 등을 제향하고 있다. 좁은 터에 자리를 한 때문인지 공자당과 담으로 구분을 한 사우. 일반 서원과는 달리 단 두 채뿐인 전각이 자리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늙은 소나무에서 잎들이 떨어진다. 몇 곳을 돌아다니느라 발도 손도 꽁꽁 얼었지만, 이렇게 운치있는 서원 하나를 만나면 그런 추위도 잊고 만다. 사람들은 그렇게 날 추울 때 다니는 것을 보고, '날이나 풀리면 다니라'고 하지만, 틈만 나면 다녀와야 직성이 풀린다. 아마 역마살이 끼어도 단단히 끼었나보다. 작은 서원 하나를 주변을 맴돌며 떠나지 못함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서운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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