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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의 대관령옛길

재미있는 유래가 전해지는 아흔아홉 굽이
대관령 고개에서 해오름의 방향, 동쪽 산하를 바라보는 모습은 이렇게 아름답다. 아득히 먼 옛날 대관령을 넘던 신사임당은 이 고갯마루에 올라 산 아래로 멀리 보이는 고향마을의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향집의 노모를 떠올리고는 애틋한 마음에 젖어든다. 고향 강릉을 떠나 서울로 가는 신사임당이 대관령을 넘으며 지은 ‘사친시’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慈親鶴髮在臨瀛
외로이 서울 길로 가는 이 마음 身向長安獨去情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回首北村時一望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白雲飛下暮山靑

대관령은 큰 고개大嶺다. 한계령, 미시령, 진부령과 함께 백두대간을 넘는 4대령 중의 하나다. 오늘날 강원도의 영동과 영서지방을 연결하는 길 중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고갯길이다. 아흔아홉 굽이라는 대관령 고갯길은 굽이진 골짜기를 돌고 돌아 오른다. 굽이가 많은 대관령에는 재미있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강릉의 한 선비가 과거 길에 오르면서 곶감 한 접(100개)을 지고 대관령을 올랐는데, 굽이 하나를 돌 때마다 곶감 하나씩을 빼먹으며 고갯길을 올랐다는 것이다. 그가 정상에 도달하고 보니 곶감이 달랑 한 개만 남게 되어 대관령이 아흔아홉 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대관령 고갯길이 굽이가 하도 많아 생긴 전설로 생각된다.

대관령을 넘는 길은 오늘날 세 가지나 된다. 첫째는 골짜기를 따라 단거리로 개설되어 있는 가장 오래된 대관령 옛길이며, 둘째 길은 차량을 위한 신작로로 개설된 도로가 1975년 영동고속도로의 개통과 함께 확장된 구 도로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대관령을 관통하는 7개의 터널구간을 통해 영동과 영서를 단번에 연결해 버린 새로 난 고속도로다. 대관령을 넘는 방법이 차량으로 바뀌면서 대관령 옛길은 일찍이 폐도가 되었다. 그러나 차량이 통행하는 도로가 별도의 노선으로 개설되면서 도보로 올라야만 하는 옛길은 다행히 옛 모습 그대로 남게 되었다.

울고 넘는 고개, 대관령 옛길
대관령은 삼국시대부터 사서에 관련된 지명이 기록된 곳으로, 영동사람들에게는 내륙으로 통하는 관문의 역할을 한 고갯길이다. 대관령 옛길은 고려시대 이래 주요 교통로의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이 길을 이용한 수많은 민중의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대관령의 명칭에 관한 유래로는 지역에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진다. 예로부터 대관령은 고개가 워낙 험해서 오르내릴 때 ‘대굴대굴 크게 구르는 고개’라는 뜻의 대굴령에서 음을 빌려 대관령이 되었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또 다른 유래로는 영동지방으로 통과하는 ‘큰 관문에 있는 고개’라는 의미에서 대관령이라는 명칭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관령을 넘는 것은 차량을 이용하기 때문에 별일도 아니지만 옛날에는 매우 힘든 고행길이어서 그야말로 울고 넘는 고개로 이름난 길이었다. 대관령은 ‘고개가 하도 높고 하늘이 낮아서 고개 위가 겨우 석자’라는 말이 전해지는 큰 고개다.

대관령은 신라시대에는 대령大嶺, 고려시대에는 대현大峴, 굴령堀嶺이라 했으며, 조선시대 『태종실록』에는 대령산大嶺山이라 하고 있다. 1530년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대관령이라는 명칭이 나타난다. 이 문헌에는 “대관령은 강릉부 서쪽 45리에 있으며, 이 주州의 진산이다. 여진女眞 지역인 장백산에서 산맥이 구불구불 비틀비틀 남쪽으로 뻗어 내리면서 동해의 가장자리를 차지한 것이 몇 곳인지 모르나, 이 영嶺이 가장 높다. 산허리에 옆으로 뻗은 길이 아흔 아홉 굽이인데, 서쪽으로 서울과 통하는 큰 길이 있다. 부의 치소에서 50리 거리이며 대령이라 부르기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대관령 옛길은 「해동지도」, 「조선지도」, 「1872년 지방지도」, 「청구도」, 「대동여지도」 등 여러 고지도에 표기되어 있다. 대관령은 강릉의 진산이기도 한 곳이다. 강릉지역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던 국사성황당이 위치한 곳으로서, 대관령 옛길은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강릉단오제’와 깊은 관련이 있는 길이기도 하다. 대관령은 영산靈山, 신산神山으로 많은 전설과 민속이 전하고 있다. 신령스러운 장소인 대관령에서는 해마다 음력 4월 15일에 ‘대관령산신제’와 ‘국사성황제’가 열린다.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을 산신으로, 강릉출신으로 신라 말 고려 초의 고승인 범일을 국사성황신으로 모시고 있다.

대관령 옛길은 겨우 한두 명이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 길이었다. 조선 중종 때 강원도관찰사인 고형산高荊山이 비좁고 험한 길을 넓게 닦았다고 한다. 길이 넓혀졌기 때문에 한양으로 가는 길은 매우 편해졌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가 주문진에 상륙하여 한양으로 진군했는데, 조정에서는 대관령 길이 넓혀지는 바람에 한양이 조기에 함락되었다는 논란이 일었다. 그리하여 인조는 대로하였으며, 죽은 고형산은 묘가 파헤쳐져 부관참시 되었다고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옛길, 느림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다
대관령 옛길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대관령면 사이에 위치한 고갯길이다. 고갯마루의 정상은 해발고도 832m이며, 동쪽 사면으로는 남대천이 발원된다. 도보로 고개를 넘던 시절에 이용되던 대관령 옛길은 성산면 어흘리로 들어가면 계곡으로 형성된 하천을 따라 이어진다. 이 길은 원울이재를 지나 계속된다. 원울이재는 아래제맹이(하제민원)와 웃제맹이(상제민원) 사이에 있는 고개다. 원울이재는 강릉으로 부임한 고을 원님이 두 번 울었다고 하는 고개다. 첫 번째는 강릉으로 부임하는 길에 한양에서 머나먼 길을 지나 험한 고갯길을 내려 온 원님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울고, 두 번째는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원님이 강릉의 후한 인정에 감동해서 다시 울고 넘었다는 전설을 가진 고개다.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으로 지정된 대관령 옛길은 옛날에 가마골로 불리던 어흘리 마을의 주택들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을 지나면서 시작된다. 상류로 계속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 나란히 우측으로 난 옛길을 약 30여 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통나무로 벽체를 하고 볏짚으로 지붕을 이은 주막집에 다다른다. 예전에 주막이 있었던 터에 재현된 ‘ㄱ’자형의 주막집은 흙 마당이 친근한 느낌을 준다. 마당 한 옆으로 놓인 물레방아와 자연석으로 만든 수조는 매우 정겹다. 그 옛날의 주막집에서는 허기진 길손들이 주린 배를 따뜻한 국밥 한 그릇으로 채우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본다. 주막을 지나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건너 굽은 산길을 따라 계속 오르면 신사임당의 ‘사친시’가 쓰인 안내판이 위치한 곳에 이른다.

이곳에서 다시 가파른 흙길을 따라 한 참을 오르면 반정半程에 다다르게 된다. 강릉 사람들은 이 반정을 반쟁이라고 한다. 고갯길의 절반 정도에 위치한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지명이다. 반정은 터널이 개통되기 전에 이용되었던 영동고속도로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옛길은 고속도로를 가로 질러 계속된다. 이곳에서부터는 더욱 지형이 가파르기 때문에 옛길은 갈지자 형태로 크게 굽이져 오르며 쉼터를 지나 계속 오르면 국사성황당까지 연결된다. 현재 백두대간에는 여러 개소의 옛길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 현재 명승으로 지정된 옛길은 6개소에 불과하다. 명승으로 지정된 옛길 중에서도 대관령 옛길은 옛길을 대표할 만한 가장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 전통 옛길이라 할 수 있다.

옛길은 현대의 문명세계를 잠시 잊게 하는 장소다. 옛길을 걷는 것은 지나간 역사 속 느림의 세계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옛길은 점점 빨라져만 가는, 속도에 함몰되어 버린 오늘날 현대인의 삶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스스로가 어떠한 정체성을 지닌 존재인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여유의 공간이다. 옛길을 걸을 때는 잠시 동안이라도 수도승이나 구도자가 되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옛날 보부상들이 봇짐을 지고 힘겹게 걸어가던 흙길, 과거 길에 오른 선비가 청운의 꿈을 안고 오르던 돌 뿌리 가득한 옛길을 느림의 미학을 음미하며 천천히 걸어 보는 것은 문명의 수레바퀴에 얽히고설켜 있는 현대인들에게 매우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출처 : 문화재청홈페이지   글·사진·김학범 한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사진·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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