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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토성 선화공주와 서동이야기
15-04-07 09:45

사적 제92호 익산토성은 해발 125m의 오금산 정상에서 남쪽 골짜기를 안고 좌우 두 봉우리를 연결하여 축조한 포곡식 산성이다. 금마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가다가 우측 쌍릉雙陵 옆길로 접근한다.

서동이 마를 캐고 선화공주에게 줄 금 다섯 말을 얻은 산이라 해서 오금산이라는데 산성을 오금산성이라 하고, 고구려 멸망 후 신라에 귀의한 후 금마저金馬渚에 머물면서 보덕왕報德王에 봉해진 안승安勝과 관련 있다 하여 보덕성이라 칭해지기도 한다. 일부 고古기록에 근거, 유래된 것이지만 발굴조사 결과 무리인 것으로 파악됐다. 대신 성내에서 다수 출토되는 유물들로 미뤄 백제 말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한다.

가장 낮은 남쪽 골짜기를 중심으로 동북, 서북, 서남의 세 봉우리를 700m 가량 둘러 쌓았으며 성 내부는 30도 정도 경사에 성의 전체적 평면도는 남벽을 밑변으로 나머지 부분은 약간 남쪽으로 기운 반달형을 이룬다. 성벽 대부분은 토성으로 구성됐지만 남쪽 계곡 근처 30~40m는 석축을 기초로 하고 상부는 토축을 하여 이 부분은 후대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석축부는 상당히 규모가 크게 가공한 10여 단 석축으로 계곡을 막아 이룬 남벽을 이뤘다. 토축의 폭은 대체로 하부 6m, 상부 3m 가량이다. 최저지대인 남벽 중앙부에는 수구를 설치하여 성안에서 유출되는 물을 계곡 아래로 배출했을 것으로 보인다. 남벽 중앙부에서 급격히 상승하는 서봉쪽 중간부에 토루를 절단하고 너비 4~5m의 문지를 두었으며 문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문지 양쪽에 4~5m 두께의 4, 5단 가량의 석축이 있고, 남벽에서 동편으로 경사를 이루며 상승하는 성벽도 토축으로 다듬어졌으나 서봉과 동봉에서 북봉에 이르기까지는 토축 흔적만 2~3m씩 남았을 뿐 대부분 잡초 속에 묻혔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토루는 고구 1, 2단의 기단석基壇石을 설치하고 그 위에 토축한 것으로 돼 있다. 기단석 밖에 회곽도廻郭道를 둔 부분도 있다.



삼문지 외 특별한 시설은 보이지 않으나 동, 서, 북봉의 평탄지에 대지臺址 내지 건물지가 약간 있었을 듯하다. 현재 삼태기 안처럼 아늑한 성내에는 대나무가 무성하여 우물이나 건물지 등의 모습은 찾기 어렵다. 그 부분의 낮고 습기가 있는 곳을 보고서는 우물터가 아닌가 하는데 거기서 나오는 물은 남벽의 하층 수구를 통해 밖으로 배출된다. 발굴 당시 성내 계곡의 서편 사면에서 아가리가 넓고 바닥이 좁아 주머니처럼 된 저장시설, 석축의 원형구덩이가 발견됐다 한다.

오금산은 워낙 주변이 평야지여서 멀리서 바라보면 녹색 접시를 엎어놓은 듯한 부드러운 산세로 짓푸른 하늘과의 경계에서 부드럽게 흘러가는 선처럼 선명하고 아름답다.

그 품안에 다소곳이 자리한 성안이 어머니의 품안처럼 고즈넉하고 아늑하다. 성 진입로 어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쌍릉도 이 성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며, 오금산 동남쪽 능선 끝자락에 자리한 서동못과 바로 옆 나무 우거진 곳이 맛동이(서동)의 생가터란다.

이 연못 속에서 서동의 어머니와 용 사이 로맨스, 서동과 선화공주의 발소리도 아련히 들려오는 듯하다. 벽공과 녹색 오금산을 배경으로 못 속에 다소곳이 앉은 청초한 연꽃이 보고 싶다. 아마 연못가 밭은 공주를 꼬여내는 데 쓰던 마밭薯田이 아니었을까. 여인을 얻고자 소원을 담고 정성껏 마를 씻던 곳은 이 연못가이었으리라. 망태기 하나 메고 금을 캐러 가던 오금산이 먼발치서 가만히 굽어보는 속에서.


선화공주님은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해 놓고

밤마다 임의 품에 안겨 간대요.


아마 박자를 맞추기 위해 ‘얼레리 꼴레리’쯤 조흥구를 붙여 주면 더욱 좋으리라. 마를 얻어먹은 경주의 꼬맹이들은 멋도 모르고 신이 나서 동네방네 뛰어다녔다. 마침내 오랜 뒤에 그 노래는 진평왕의 귀에도 들어가고…. 아마 요즘 같으면 ‘스토킹’으로 취급돼 곤욕을 치뤘겠지만 어쨌든 목적을 달성하려던 서동의 집념만은 알아줄 만하다. 예쁜 아내를 얻어 가지고 어머니 앞에 의기양양 돌아온 맛동이의 모습이 재미있게 떠오른다.

그런 의지의 인물이었기에 가히 마지막 백제를 일으킬 야망을 품었음 직하다. 후계자 하나 세우는 데도, 천도하자는 데도 악마구리같이 대들던 신하들도 보기 싫고 늙은 맛동이는 이래저래 죽어서나마 이 땅으로 돌아와 편히 지내는지.

여기서 이야기 되는 마薯는 이웃에 있는 저토성이 현지명으로는 돗토성임을 볼 때 소위 민간에서 부르는 돼지감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다.

비록 최근(2009. 1) 미륵사지 석탑과정에서 발견된 창건 내력(무왕의 아내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는)의 금판 발굴로 혼란스러워지기는 했지만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전해 오는 이 낭만적인 이야기는 설화로서 이 지역에 앞으로도 오래도록 살아 있을 것이다.

출처 : 문화재청홈페이지 글·사진·조영연 대전시 서구 갈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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