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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에서 쫓겨난 폐비 윤씨
15-04-22 07:47

성종은 시문에 능하고, 그림도 잘 그렸다. 그는 술과 사냥도 좋아했다. 그리고 김종직, 서거정 등 학자들을 중용하여 도학 정치를 펼친 왕이었다. 성종의 통치는 태평성대를 노래하게 했다. 하지만 이면에는 퇴폐풍조를 낳기도 했다. 성종 자신도 유흥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이것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어 즐기는 풍조가 만연되었다.
성종은 현대판 카사노바였다. 궁궐에 왕의 여자가 수백 명 기다리고 있으니, 날이면 날마다 궁녀들을 탐했다. 중전 윤씨라고 투기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성종은 갖은 핑계를 대며 중전 윤씨를 멀리했다. 중전 윤씨는 치명적으로 사랑했던 성종이 차츰 미움의 대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윤씨는 본래 왕비로 간택된 여인이 아니었다. 1473년 후궁의 신분으로 궁에 들어와 오직 사랑의 힘으로 왕비에 오른 여인이다. 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 한씨가 1474년 병으로 죽자, 후궁 중에서 성종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던 숙의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녀는 왕비가 된 지 3개월 후에 아들 융을 낳았다. 이가 바로 연산군이다.
행복도 잠시 성종과 윤씨 사이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성종의 바람기였다. 반면 윤씨는 독점욕이 강한 여자여서 둘 사이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성종의 사랑으로 왕비까지 되었으니, 그녀는 왕의 사랑을 어느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윤씨는 성종이 후궁들 처소에 못 가기 위해 온갖 꾀를 내었다. 심지어는 곶감 단지에 비상까지 담겨 있는 것이 발각되어 조정이 뒤집어지기도 했다. 왕이나 후궁들을 독살하려고 했다는 물증이 드러난 것이다.
이 일로 윤씨는 왕비에서 빈(왕의 정1품 후궁)으로 강등될 위기에 빠졌다. 하지만 원자의 어머니라는 이유로 조정 신하들이 만류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성종은 윤씨를 점점 멀리하게 되었고, 윤씨는 점점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윤씨의 생일인데도 성종은 아무런 인사조차 없었다. 성종에 대한 윤씨의 불만은 부풀어올랐다.
기어코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오랜 만에 중전 처소에 들린 성종과 중전 윤씨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더니 성종의 용안에 핏자국이 묻었다. 성종은 중전 처소를 나와 대비전으로 들어갔다. 인수대비가 성종의 안색을 살피다가 용안에 묻은 핏자국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인수대비는 화가 나서 중전을 당당 폐위시키자고 했다.
다음날부터 조정은 물로 백성들까지 중전 윤씨의 폐위 문제로 시끄러웠다. 마침내 윤씨는 1479년 음력 6월 2일 왕비에서 폐위되어 친정인 사가로 쫓겨났다. 바깥세상과도 접촉이 금지되었다. 어린 아들과 생이별을 하게 된 폐비 윤씨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고였다.
그후 3년여의 세월이 야멸차게 흘러갔다. 폐서인이 되었으나 왕이 될 원자의 생모인데, 일반 백성처럼 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상소가 빗발쳤다. 다른 한편에서는 사약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최 내시는 적극적으로 폐비 윤씨의 구명을 위해 나섰다. 최 내시는 윤씨 사가를 몰래 찾아갔다. 그야말로 초가삼간이었다. 윤씨는 소복차림을 하고,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대궐이 있는 방향으로 큰 절을 하고 있었다.
대궐로 돌아온 최 내시가 성종에게 간청했다. 성종은 최 내시 말을 듣고 인수대비에게 윤씨의 근황을 알렸다. 그러나 인수대비는 그 말을 그대로 듣지 않았다. 대비전의 심복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윤씨의 동정을 살펴오라고 분부했다. 그들은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성종에게 허위보고를 했다.
이 말을 들은 최 내시는 기가 막혔다. 자신의 처지도 언제, 어느 때, 누구의 모함을 받아 죽게 될지 모르는 입장이었다. 그날 이후 최 내시는 작정을 하고 앓아누웠다. 성종이 최 내시가 걱정이 되어 최 내시를 대전으로 오라고 했다. 최 내시는 너무 늙고 병이 들어 예전처럼 모시기 힘드니 나가 살도록 윤허를 내려달라고 했다. 성종은 최 내시의 마음속을 헤아리고 있었다. 정 나인의 일도 그렇고, 폐비 윤씨와 관련된 일로 화병을 앓고 있는 거라고 여겼다.
성종은 최 내시에게 비단 여러 필과 땅을 하사했다. 그리고 양주 목사에게 특별교지를 내려 유향소(지방의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 기관. 풍속을 바로잡고 향리를 감찰, 민의를 대변하는 조직이었다. 지금의 지방의회와 비슷했다.) 별감으로 각별히 잘 모시라는 분부를 했다. 이후부터 최 내시는 내관이 아닌 별감으로 부르게 되었다.
최 별감은 본가가 있는 중랑구 묵동 121번지 부근 중리, 즉 간뎃말로 돌아왔다. 최 별감을 제일 반긴 사람은 정 나인이었다. 정 나인은 최 별감의 어머니를 친부모 이상으로 잘 모시고 있었다.
어느 날 양주목사가 최별감을 찾아왔다. 양주목사는 최별감이 양자를 들이는 걸 도와주라는 어명을 받았다고 했다. 최 별감이 승낙하니 양주목사가 급히 청년을 데리고 왔다. 풍채가 반듯하고 용모가 준수한 청년은 어려서부터 능말에 살았는데 이름이 최마돌이라고 했다. 간단한 예를 올리고, 최 별감은 마돌을 양자로 들였다. 마돌은 최 별감을 친아버지처럼 받들고 모셨다.
봉화산 기슭에서 최 별감은 행복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그렇지만 폐비 윤씨가 가끔 마음을 어지럽혔다. 1482년 추석 다음날인 음력 8월 16일 윤씨는 결국 사약을 받아 죽고 말았다. 성종이 죽고 폐비 윤씨의 아들이 연산군으로 즉위했다. 최 별감은 앞으로 불어 닥칠 일들이 염려되었는데, 그의 예측대로 궁궐 안은 피비린내를 적셨다. 이런 과정에서 일찌감치 궁 밖으로 나왔던 최 별감은 피비린내를 맡지 않게 되어 다행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최 별감의 뛰어난 예지를 놀라워했다.
이후부터 늙어 오갈 데 없어진 궁녀들은 정업원이나 자수궁으로 가고, 내시들은 최 별감이 사는 간뎃말로 모여 살게 되었다. 왕은 내시들이 퇴임할 때마다 간뎃말과 그 부근 후동(뒷골)일대의 땅을 하사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봉화산 밑 내시들의 집촌을 내시땅으로 부르게 되었다.
사대부들도 사화를 피해 최 별감이 사는 마을로 숨어들었다. 최 별감은 그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당시 사대부들은 봉화산 소나무 참숯으로 만든 먹을 사용했다. 그들은 마을 이름에 먹자를 붙여야 학문이 발달한다는 비기설에 의해 먹골 또는 먹굴이라고 불렀다. 이런 것들이 현재 서울 중랑구 묵동의 어원이 된다.
 
전승 지역 : 서울 / 중랑구 / 묵동
 
분류 체계 : 구전전통 및 표현 / 구비문학 / 설화
 
자료출처/참고자료
ICHPEDIA
1. 안재식,『조선왕조500년과함께하는설화에게길을묻는다』,2011,중랑문화원,PP4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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