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부르며, 머리에 금빛 고깔을 쓰고, 몸에 방포를 입었다. 맏아들을 청광보살이라 하고, 막내아들을 신광보살이라 하였다. 외출할 때는 항상 백마를 탔는데, 채색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장식하고, 동남동녀들을 시켜 일산과 향과 꽃을 받쳐 들고 앞을 인도하게 하였다. 또 비구 2백여 명을 시켜 범패를 부르면서 뒤따르게 하였다.”- [삼국사기]
그런 궁예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것이 관심법(觀心法)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다. 이 신통력이 그의 말년에 갈수록 포악한 짓을 서슴지 않는 데 쓰였으니, 그가 애써 이룬 공업을 물거품으로 만든 것도 이 관심법이었다.
915년, 궁예의 부인 강씨가, 왕이 옳지 못한 일을 많이 한다 하여 충언을 올렸다. 그러자 궁예는 부인더러,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웬일이냐?”라고 응수하였다. 부인이 어처구니없어 하자, “나는 신통력으로 보고 있다.”라며 뜨거운 불로 쇠공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였다. 미치광이 같은 이런 짓으로 그는 두 아이의 목숨마저 빼앗았다. 미륵이 아니라 패륜의 극치이다.
심지어 궁예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던 왕건(王建)에게도 예의 관심법을 들이댔다. 반역을 모의하였다고 다짜고짜 윽박지르며, “관심법으로 이 일을 말하겠다.”라고 하였다. 왕건을 아끼던 최응이라는 사람이 귓속말로 불복하면 위태롭다고 일러주었다. 그때야 분위기를 알아챈 왕건이 반역을 꾀했다고 하며 무릎 꿇었다. 궁예는 크게 웃으며 정직하다고 칭찬하며, 금은으로 장식한 안장과 고삐까지 내려 주는 것이었다. 눈치 빠른 왕건이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미륵으로 자처하며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선 궁예의 최후는 이 뒤에 바로 이어 온다. 악행의 끝은 민심의 이반을 불렀지만, 기왕 악행을 일삼자면 왕건 또한 살려두어서는 안 되었다. 궁예는 바로 그 왕건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기구한 운명의 영웅
궁예는 신라 진골 귀족 출신으로 보인다.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유력 왕족의 후손임을 내세우려 했던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이고, 실은 진골 가운데서도 몰락하여 지방으로 흩어진 집안의 후손이 아닐까 여겨진다. 집안 못지않게 출생과 성장과정은 더욱 비극적이다. 신라 말의 오이디푸스라 불러도 좋을까. 외가에서 태어난 궁예는 장차 나라에 이롭지 못할 듯하니 기르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일관(日官)의 예언을 듣는다. 데려가서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이 차마 그러지 못하고 아이를 다락 밑으로 던졌는데, 마침 젖 먹이던 종이 아이를 몰래 받아 들다가 잘못하여 손으로 눈을 찔렀다. 그래서 한쪽 눈이 멀었다. 발목에 끈을 묶어 다리에 상처가 난 오이디푸스나 다를 바 없다. 종은 아이를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길렀다. 나이 10여 세가 되어도 장난만 치자 종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 나는 이를 차마 보지 못하여 오늘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그러나 너의 미친 행동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남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화를 벗어나기 힘들 터, 이를 어찌하겠느냐?”
궁예는 길러준 어머니의 곁을 떠나기로 하였다. 고약한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라 코린토스를 떠나는 오이디푸스와 조금은 사정이 다르지만 말이다. 울며 밤길을 걸어 그가 도착한 곳이 세달사. 강릉 태수의 딸에게 홀딱 반해 꿈으로 그 소원을 이루었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헛됨을 깨달았다는 조신(調信)이 일하던 바로 그 절이다. 세달사는 나중에 흥교사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강원도 영월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불렀다.
난세에 꽃핀 궁예의 능력
기구하게 태어난 영웅은 제가 받은 힘으로 난관을 헤치기 마련이다. 궁예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는 일개 승려로 살아갈 사람이 아니었다. [삼국사기]에서는 그를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는 뱃심’이 있었다고 평한다. 그러면서 이런 일화를 소개한다. 어느 날 재를 올리러 가는 길, 까마귀가 점치는 산가지를 물고 와서 궁예의 바릿대에 떨어뜨렸는데, 거기에는 왕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궁예는 아무에게도 이 말을 하지 않고, 적이 자부심을 품고만 살았다. 그에게는 일찍이 이렇게 왕의 꿈이 심어졌다.
다행히(?) 시대는 어지러웠다. 특히 그가 세상에 나갈 마음을 먹은 진성여왕 5년(891) 무렵, 조정에서는 유력한 신하들간에 패가 갈리고 도적은 벌떼처럼 일어났다. 절을 나선 궁예는 처음에 기훤(箕萱)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훤은 오만무례하였다. 이듬해 양길(梁吉)을 찾아갔다. 양길은 그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군사를 주어 동쪽으로 신라의 영토를 공략하게 하였다. 아직 경험과 힘이 모자란 궁예로서는 ‘선배 반란군’에게 한 수 배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궁예가 출중한 솜씨를 발휘하여 우두머리로 올라서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절문을 나선 지 3년 만인 894년, 궁예는 강릉을 거점으로 삼아 무려 3천5백 명 이상의 대군을 편성하였다. 이때 그는 ‘사졸과 함께 고생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라고 [삼국사기]는 전해 준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를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궁예가 미륵보살을 자처하는 시기가 이즈음일 것이라고 말하는 연구자도 있다. 세달사의 분위기나, 신라 말 강릉에 미륵사상을 전하는 진표(眞表) 같은 승려의 끼친 영향이 궁예의 통치술 구축에 일조하였다는 것이다. (조인성, [태봉의 궁예정권], 푸른역사, 2007) 이때의 미륵보살 궁예는 곤궁한 신라 말의 백성에게 그야말로 미륵 같은 존재였다.
세력이 커지자 태백산맥을 넘어 철원으로 그 거점을 옮겼다. 게다가 거기서 천군만마와도 같이 왕건이라는 뛰어난 부하를 얻었다. 본디 개성 출신인 왕건은 철원으로 와 896년부터 궁예의 휘하에서 혁혁한 전공을 올렸다. 왕건에 대한 호감 때문이었을까, 궁예는 개성이야말로 한강 북쪽의 이름난 고을이며 산수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도읍을 개성으로 옮겼다.
궁예의 거침없는 기세 앞에 불편해진 이가 양길이었다. 제 밑에서 싸움질을 배운 피라미가 이제는 자신을 향해 칼날을 곧추세우고 있음을 알았다. 양길은 궁예의 힘을 꺾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수를 친 것은 도리어 궁예였다. 양길에게 이기고 궁예는 가슴 가득 느꺼운 감정에 몸을 떨었다. 키워준 어머니의 타박을 받고 절로 떠나던 초라한 시절의 자신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왕이었다. 드디어 901년, 왕을 자칭하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미륵보살로 자처한 궁예의 말로
“도솔천의 미륵보살은 석가모니를 이어 중생을 구하러 세상에 올 것이다. 석가모니 열반 후 56억 7천만 년이 되는 때이다. 사람들을 저 위의 세상으로 데리고 올라갈 때, 그는 미륵불이 되어 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미륵 상생신앙이라 한다. 그런가 하면 미륵 하생신앙이 있다. 세상이 너무 어지러워 도탄에 빠진 중생이 56억 7천만 년을 기다릴 수 없어지면, 미륵보살더러 어서 오라 탄원한다. 미륵보살은 그 간청을 저버리지 못하고 이 세상으로 내려온다. 혼란한 시기, 스스로 미륵이라 부르며 나타나는 이들은 대체로 이 신앙에 바탕을 둔 것이다. 우리 역사상 미륵을 자처한 두드러진 예로 궁예를 들 수 있다. 901년에 개성에서 후고구려를 연 바로 그이다.(네이버캐스트)
궁예부인과 왕건의 사통 설화
궁예왕은 자신이 오래 살려고만 신경을 쓰고 가족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궁예왕은 왕비와 같이 잠을 자본 적이 별로 없었다. 왕비는 매일 독수공방을 하고, 궁예왕은 따로 젊은 처녀의 젖가슴만 보면서 밤을 보냈다.
왕건은 궁예가 가장 총애하는 신하였으므로 궁예 대신 궁궐을 돌아다니면서 일을 보았다. 그래서 왕건의 권력이 날로 커갔다. 그래서 실제로는 궁예보다 권력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왕건의 편에 서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왕건은 궁궐을 돌아다니다가 왕비하고 눈이 맞게 되었다. 둘은 눈이 맞자 같이 잠을 자게 되었다. 왕건은 그 이후 왕비와 잠을 자고 싶으면 찾아갔다. 이것도 모르고 궁예는 매일 쓸데없이 앉아서 처녀들 젖가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하루는 궁예가 대낮에 궁궐 순찰을 돌게 되었다. 순찰 중에 왕건과 왕비가 함께 자는 현장을 보게 되었다. 궁예는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신하와 자신의 부인이 사통을 한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왕건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왕건은 자신의 사통이 들키자 군사를 풀어서 궁예왕을 죽이고자 하였다.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미 많은 군사가 왕건의 수하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궁예왕은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군사들을 이끌고, 지금의 토성리(土城里)로 왔다. 토성리에서는 왕건의 군사들을 막기 위해 궁예왕은 흙으로 토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토성도 금방 왕건의 군사에게 점령당했다.
궁예는 다시 군사들을 이끌고 울음산으로 후퇴를 했다. 울음산에서 다시 퇴각을 해서 삼방이라는 곳에 당도했다. 그래서 궁예가 여기가 어디냐고 자신을 따라 온 몇 안 되는 군사들에게 물었더니 삼방이라는 곳이라 했다. 궁예가 생각하니 자신의 궁궐에서 많이 떨어진 곳이 아니었다.
그때 갑자기 그곳에 있던 백성들이 궁예를 알아보았다. 궁예가 워낙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짰으므로 백성들의 원성이 대단했다. 백성들은 궁예왕인 것을 확인하고는 다짜고짜로 몰려들어서 궁예왕을 때려죽이고자 하였다. 백성들이 양쪽 산 위에서 돌을 굴리기 시작했다. 양쪽에서 돌을 굴리니 오갈 데가 없었고, 궁예왕은 결국 돌덩이에 깔려 죽었다.
중요성과 보호방법 제안
철원지방에는 왕건과 궁예의 탄생 및 도선(道詵)사상과 관련되는 설화가 많다. 궁예의 '궁예부인과 왕건의 사통' 설화도 그 중 하나로서 이들 관련 설화들을 하나로 묶어 스토리텔링 소재로 활용함으로써 보존과 지역 활성화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봄직하다.
전승 지역 : 강원 / 철원군 / 기타
자료출처/참고자료
ICHPEDIA
1. 이학주,『철원농촌체험관광해설사스토리텔링북』,철원군농업기술센터,2012,pp,216-217.
2.강원대학교박물관ㆍ강원도철원군,『鐵原郡의歷史와文化遺蹟』,1995,pp.370-3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