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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읽는 김치이야기
14-09-25 15:32

지금은 김치를 사먹는 집도 많지만 예전 김장은 겨울나기를 위한 필수 행사였다. 김치, 깍두기 없이는 못사는 한국인이기에 김장을 담가 겨울 내내 먹을 김치를 마련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루 섭취하는 야채 중에서 약 3분의 1이 김치나 깍두기라고 한다.

김치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 조상이 먹었던 음식이다. 동양에서는 ‘약식동원(藥食同源)’이라고 음식과 보약은 뿌리가 같다고 여겼다. 오랜 세월 먹어 온 김치 역시 마찬가지다.

명 황제 후궁에 뽑힌 조선처녀 배앓이에 김칫국부터 찾았다

조선 태종 때 명나라 황제의 후궁으로 들어갈 여자를 뽑아 보낸 적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중 태종실록 17년에 황씨(黃氏), 한씨(韓氏) 등 여러 명의 조선처녀를 뽑아 후궁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세종실록 6년에 명나라에 후궁으로 간 조선여자의 후일담이 적혀 있다.

뽑힌 처녀 중에서 황씨가 북경으로 가는 도중 복통이 일어났다. 의원이 여러 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는데, 황씨가 김칫국을 먹고 싶다고 했다.

동행했던 중국 사신이 김칫국이 무엇인지를 묻더니 “사람의 살을 먹고 싶다면 내가 다리를 베어서라도 바치겠으나, 이런 황무지에서 어찌 그런 물건을 얻을 수 있겠냐”며 황당해 했다.

지금도 해외여행을 가서 김치를 찾는 한국인이지만 조선시대 때도 배 아플 때 김칫국을 마시고 싶어 했으니 한국사람들에게 김치는 보약이나 다름 없는 것 같다.

김치는 배추와 무를 주요 재료로 만든다. 그런데 동양의학에선 배추와 무는 약재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 지금은 흔해 빠진 무와 배추지만 옛날에는 귀했던 만큼 약으로 여겼다. 그러니 무와 배추로 담근 김치는 그 자체가 약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무 나오는 계절이면 의사가 망한다”
 
김치, 깍두기를 담글 때 들어가는 필수 재료가 무다. 무는 건강에도 이로운 식품이다. 무가 나오는 계절에는 의사가 망한다는 중국 속담이 있고 한자로 흙에서 나는 인삼(土人蔘)이라고 했다. 본초강목에도 무는 채소 중에서 가장 이로운 야채로 위산 해독에 좋고, 소변을 다스리며 허한 기를 보충한다고 했다.

지금의 인도인 천축(天竺)에서 온 승려가 중국에서 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자주 먹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밀가루 국수에는 열이 많은데 국수를 그렇게 자주 먹고도 건강을 상하지 않느냐며 놀란 것이다. 그러다 국수 국물에 무가 들어있는 것을 보고 “그러면 그렇지”하며 이해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국조보감>을 보면 조선의 정조대왕이 “어릴 때는 밥을 매우 적게 먹었고 아침 저녁으로 무를 먹었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 세손이 아침 저녁으로 무를 먹도록 한 것을 보면 왕실에서도 무가 좋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무는 ‘무후(武侯)의 채소’라는 별명이 있는데 ‘무후’는 제갈공명의 시호다. 뿌리도 먹을 수 있고, 잎사귀도 먹으며 절여 놓으면 사계절 내내 식용이 가능한 무를 군량으로 심어 퍼트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배추, 고려 때는 ‘약용’ 조선은 ‘식용’

배추는 ‘채소의 제왕’이다. 청나라 때 <소식설략>이라는 문헌에 “숭(菘)은 배추(白菜)다. 모든 채소의 왕으로 다른 채소와 비교할 수 없다”고 했다.

채소가 드물던 옛날, 배추는 무와 함께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소중한 야채였다. 6세기 무렵 제나라의 문혜태자가 한림원 학자에게 가장 맛있는 채소를 물었더니 “초봄 부추, 늦가을 배추”라고 했으니 당시에도 가을 채소 중에는 배추를 으뜸으로 꼽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배추가 고려시대 때 등장한다. 고려시대 의학서인 <향약구급방>에 배추가 나오는데 당시에는 식용이 아니라 약용 채소였다. 배추를 식용으로 본격 재배한 시기는 고려 말 조선 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때 예조에서 배추는 4월부터 5월까지 경기도 각 고을에서 진상한다는 보고가 있다. 조선 초기인 세종 때 경기도 인근에서 배추를 재배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용재총화를 보면 특히 왕십리에서 배추를 많이 재배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조선 초기의 배추는 요즘 배추와는 다르다. 속이 꽉 들어찬 요즘 배추는 1850년 이후 품종이 개량되면서 요즘과 같은 배추가 등장한다.

20세기 초 등장한 궁중요리, 배추김치

김치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먹었던 고유의 전통음식이다. 그러나 당시 김치는 무를 소금이나 된장에 절인 장아찌 같은 형태였고, 조선시대부터 배추가 등장하면서 배추김치도 나왔지만 요즘처럼 배추 속에 양념을 넣고 만드는 김장 김치는 아니었다.

요즘과 같은 통배추 김치가 등장한 시기는 따지고 보면 역사가 그리 깊지 않다. 1850년 속이 들어찬 통 배추가 등장했으니까 20세기 초반부터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임진왜란 무렵 고추가 들어왔으니까 고춧가루를 사용한 김치도 19세기 중반 무렵이다.

1827년에 나온 <임원십육지>에는 산초와 함께 고추를 넣은 김치를 먹으니 봄이 온 듯하다고 적혀있다. 이 무렵 고추가 산초 대신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통 고추나 고춧잎 등을 썼고 고춧가루가 쓰인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현재 우리가 먹는 김치는 궁중에서 먹던 김치가 전파된 것이다. 궁중에서 값비싼 재료를 사용해 배추 속을 버무린 화려하고 고급스런 김치가 민간으로 전파된 것이다. 1924년 조선일보를 보면 김치로는 대궐 안 김치가 으뜸이고 궐내에 출입하는 여러 대관의 것이 다음인데, 민유식, 윤덕영, 박영효 대감 집 김치가 맛이 좋다고 했다.

정조 딸이 ‘개발’한 서민음식 ‘깍두기’

배추 김치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깍두기인데 깍두기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먼저 정조의 딸인 숙선옹주가 처음으로 무를 썬 깍두기를 만들어 임금님께 바쳤다는 것이다. 홍선표의 <조선요리학>에 수록되어 있는데 깍두기를 처음 드신 정조가 “대단히 칭찬하시고 잡수신 일로부터 여염집까지 전파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요리학>은 1940년에 쓰여진 요리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을 언급한 것으로 보일 뿐, 정설로 받아 들이기는 쉽지 않다.

문제는 깍두기라는 단어가 1920년대 이전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춘향전에 깍두기라는 음식이 나오는데 판소리 춘향전이 완성될 무렵인 영조 정조 때에도 있었는지 아니면 현대에 들어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대부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은 음식이었기에 문헌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식품 학자들은 그래서 깍두기를 사대부들은 먹지 않았던 하층민들의 음식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서민의 음식인 깍두기를 숙선옹주가 궁중에 맞게 변형해 만들었다가 다시 일반으로 퍼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춘향전>에도 이몽룡이 변사또의 잔치에 참석해 “개다리 소반에 담은 콩나물, 깍두기, 막걸리 한 사발 놓은 상을 발길로 걷어 차 던지며…”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거지 취급을 받은 이몽룡에게 내온 상에 깍두기가 놓여 있는 점에 비춰 보면 양반의 음식은 아니었던 것 같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154호(08.11.24일자)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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