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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요리사는 남자였다
14-09-25 17:12

조선시대 지극히 존엄한 존재였던 임금의 안녕과 건강은 한 국가의 운명과 직결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임금의 안녕과 건강의 근본은 음식, 즉 수라였다. 임금의 건강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수라, 과연 임금의 음식은 누가 만들었을까?
일반적인 궁녀와 나인, 상궁들이 만들었을 거라는 인식과 달리 조선 수라간의 주역은 바로 남자들이었다. 왕의 요리사 남자, 그들은 과연 누구였으며 왜 왕의 음식은 남자들이 만들어야 했을까.
 
궁궐의 특급 통제구역, ‘수라간’을 파헤치다
 
 
안순환1.jpg
 
 
▲ (녹동서원 편·1931) 147쪽에 실린 안순환
1605년, 선조가 마련한 연회를 그린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 이 그림의 두 번째 그림 ‘조찬소’에는 다소 낯선 모습이 등장한다. 그림 속 부엌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모두 남성인 것이다. 드라마의 소재로 등장하면서 한류의 주역이 되기도 했던 공간, 수라간. 하지만 그 실제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확연히 달랐다. 왕의 밥상 이 만들어지는 곳, 수라간의 비밀이 조찬소 그림에 숨겨져 있다.
 
 
칼을 든 남자
선조 38년인 1605년, 임진왜란이 끝난 지 겨우 6년째 도성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다. 조선은 7년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이에 나라 안에서의 잔치도 엄격히 제한되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선조 임금의 특별한 허락으로 잔치가 벌어진 것. 잔치는 ‘이거’라는 한성우윤이 형조참판에 임명되면서 비롯됐으며, 당시 이거의 노모가 101세로 생존해 있었다.
 
선조는 혹독한 전란 속에서도 백수를 넘긴 이거의 노모 채씨 나이 이야기를 듣고 매우 흡족해 했고, 당장 그의 아들 이거를 형조참판으로 승진시켰다. 전란을 꿋꿋이 버틴 100세 노인에 대한 예우였던 것이다. 여기에 선조의 정치적 계산도 숨어 있었을 것이다. 비록 나라가 전란을 당해 조정이 의주까지 피신하는 등 엄청난 피해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100세를 넘긴 노인이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 자신의 치적으로 삼으려 했을 수도 있다.
 
이거가 형조참판이 되자 당시 팔순이 넘은 노모를 모시던 벼슬아치들이 계를 꾸렸고, 13명의 벼슬아치들이 모여 어른을 받드는 계라는 뜻에서 ‘봉로계(奉老契)’를 만들었다. 이들이 노모를 모시고 잔치를 열겠다고 하자 선조는 특별히 풍악까지 허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묘조제재경수연도’는 이날 잔치의 모습을 다섯 폭으로 나누어 그린 기록화이다.
 
▲손님을 맞는 대문 안팎의 정경에서부터 ▲음식을 만드는 임시 부엌 ▲계원들이 회동하는 광경 ▲대부인에게 예를 올리는 모습 ▲주인공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연회 장면을 담았다. 그중 눈길을 끄는 그림은 임시 부엌인 조찬소가 등장하는 그림. 그런데 그림에 보면 칼을 들고 분주하게 요리를 하고 있는 주인공이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남자였다.
 
가마솥에 요리를 하는 등장인물도 남자이며, 항아리에서 국자로 술을 뜨고 있는 인물로 남자다. 즉, 여자가 음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요리를 하고 있었으며, 조선시대 요리사는 남자였던 것이다.
 
 
왕의 요리사는 ‘숙수’라 불리는 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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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찬소 그림에 그려진 요리를 하는 남자
<세종실록>에 따르면 출퇴근을 하는 수라간 사람들에게 출입증을 발급한 기록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남자는 376명 여자는 겨우 12명이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 역시 수라간 남녀의 비율은 14대 1로 명시하고 있다.
 
17세기의 소문사설 역시 남자들이 요리하는 모습을 기록, 여성들은 상을 차리거나 수라를 나르는 등 간단한 일만 맡고 있었다. 1903년. 왕의 수라에 관한 커다란 사건이 발생한다. 홍합을 먹은 고종의 이가 부러진 것이다.
 
요리의 책임자로 처벌받은 사람은 다음과 같았다. “숙수 김원근(金元根), 사환 김만춘(金萬春), 숙수패장 김완성(金完成), 각감 서윤택(徐潤宅)” 그들의 이름은 모두 남자였다. 이렇게 수라간의 주역은 남자였다.
 
그렇다면 그 많은 나인과 상궁들은 무엇을 했을까. 기미상궁이라 하여 임금의 수라를 먼저 맛보는 등 여성들도 분명히 임금의 수라에 등장하고 있다. 나인들은 기본적으로 수라간에서 대전 혹은 침전으로 음식을 나르는 역할만 맡았으며, 식재료 운반, 설거지 등 요리사들을 지원하는 업무를 맡았다.
 
상궁들은 이런 나인들을 지휘하고 감독했고, 수라상궁이 수라간의 일을 주재했지만 직접 요리하지는 않았다. 조선의 궁중 수라간, 여자는 있었으되 그들은 요리하지 않았다. 요리는 임금의 음식은 남자가 만들었던 것이다.
 
 
최초 공개 창덕궁 수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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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대 박물관 소장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다섯폭 가운데 두번째 그림인 잔칫집의 야외 부엌 장면
조선의 수라간은 은밀한 공간이었으며 철저하게 통제된 공간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오랫동안 조선의 정궁이었던 창덕궁, 왕비가 거처하는 대조전 바로 곁에 작은 수라간이 있었다. 대조전 수라간은 지금도 남아있는데, 아쉽게 온전한 조선시대의 모습은 아니다.
 
창덕궁 수라간은 1920년대 현대식 부엌으로 개축된 이곳에는 당시 사용했던 일제 오븐과 당시 쓰던 찬장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개축 전 조선의 수라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경국대전에 따르면 수라간은 대전과 왕비전 등 궁궐 곳곳에 위치했다.
 
이곳에 종사하는 인원은 400여 명. 밥을 짓는 반공, 생선을 굽는 적색, 술을 빚는 주색 등 한 사람이 평생 한 가지 일에만 종사했다. 왕의 요리사는 철저하게 분업화 되어있었고, 전문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임금의 수라를 맡은 기구는 이조 산하의 사옹원이었다.
 
사옹원에서 대전, 왕비전, 세자전의 모든 수라를 책임졌고, 특히 임금의 수라는 사옹원이 중심이 돼서 내시부와 내명부도 함께 참여했다. 수라를 맡은 최고 책임자는 종2춤의 상선내시였다.
 
그 아래 술과 차를 맡았던 상온과 상다가 있었고, 사옹원 총책임자인 제거가 그 밑에 있었다. 또, 조리사는 종9품, 그들 아래 별사옹을 비롯한 각색장들이 실제 요리를 맡았으며, 이들 모두가 남자들이었다.
 
 
왜 왕실 요리사는 남자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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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마지막 궁중요리사 안순환
조선의 수라간은 매우 세분화, 전문화돼 있었다. 한 사람이 모든 요리를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종9품의 조리사와 그들을 도왔던 별사옹과 각색장, 이들이 실제 요리를 맡았다. 각색장들의 명칭 또한 다양하다.
 
탕수색은 물을 끓이는 사람, 적색은 고기를 굽는 사람이었고, 별사옹은 고기를 다루는 사람이었다. 물 끓이고 고기 굽는 단순한 과정에도 전문가들이 배치돼 있었던 것이다.
 
반공은 밥을 짓는 이였고, 포장은 두부를 만드는 사람, 요리뿐만 아니라 술을 담당하는 주색도 있었다.
 
수라간은 왜 이렇게 분업화됐을까. 궁중음식은 일반 요리에 비해 섬세하고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고, 여라 단계를 거쳐야만 완성되는 요리가 많았다. 조선 궁궐 안에는 이런 요리사들이 약 400여명 배치돼 있었고, 이들이 하루에 2교대로 궁중음식을 담당했다.
 
특히, 대령숙수는 항상 밤에도 대기하며 음식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고, 요리사들도 대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각색장(숙수)이 고역이므로 누구나 모두 싫어하여 피하였다” <중종실록>. 실록에는 숙수가 되는 것을 꺼리는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이들은 왜 궁중 요리사가 되는 것을 기피했을까?
 
왕의 수라는 식재료 준비부터 숯불을 일구는 문제, 양념을 하는 문제까지 세심하고 섬세한 손길이 필요했다. 더욱이 왕은 하루에 다섯 번 수라를 들었다. 고된 노동 때문에 숙수를 기피하자, 때로는 노비의 신분을 면천해주거나 역을 감면해주기도 했다. <명종실록>에 보면 ‘각색장 김응선의 역을 2년 동안 면하게 하라’고 적혀 있다. 각색장들의 부역을 일정 기간 면제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요리사들을 붙들어 두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인조실록>에는 ‘각색장 가운데 이미 노비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역을 면하게 하라’는 파격적인 개선 방안이 나온다. 또한, 남녀 구분이 엄격한 사회에서 국가의 공식적인 일이었던 수라를 만드는데 여성이 참여할 수 없었다. 엄청난 노동의 강도와 국가의 공식적인 업무라는 점, 그리고 유교국가라는 조선의 특수성, 이로 인해 ‘숙수’라는 직업은 남성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수라간을 남자들로 구성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또 있다. 그것은 왕의 신변 보호였다. 상선내시와 수라간의 총책임자들은 누구였을까. 당연히 임금을 가장 잘 보필할 수 있는 정치적 측근이었을 것이다. 정적 세력에게 임금의 음식을 맡기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왕의 신변보호에는 일선 요리사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여성보다는 남성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자들이 요리를 맡았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먹는 것이 곧 약이라는 인식이었다. 임금의 음식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약이어야 했고, 이에 임금의 체질과 질병, 계절과 몸 상태에 따라 그에 효능 있는 음식을 바쳐야 했다. 이를 ‘식치(食治)’라고 했다. 식치를 위해서는 요리사들의 기초 의학 상식은 필수였으며, 이런 공부를 제대로 하고 구현하기에 여성보다는 남성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12첩 반상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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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원한 정조의 7첩 반상
임금이 먹는 음식을 ‘수라(水剌)’라고 불렀다. 수라는 고려 후기부터 등장하는 궁중용어로 원나라에서 들어온 말로 유추되고 있다. 고려 원종 이후 원나라로부터 몽골의 풍습과 문물이 쏟아져 들어올 때 함께 유입된 단어라는 것이다.
 
수라상의 반찬은 12가지로 정해져 있었는데, 동양에서는 ‘9’라는 숫자가 가장 높은 숫자, 따라서 임금의 기본 찬은 아홉 가지였다. 여기에 궁궐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항상 별식이 준비되었고, 세 가지 정도 별도의 반찬을 함께 올리면서 수라상은 12첩 반상이 된 것이다.
 
임금과 왕비는 같은 방에서 상을 받았으며, 임금은 해가 뜨는 동쪽에 앉고, 왕비는 그 맞은편에 앉아서 각자의 상을 받았다. 임금이 받은 상은 모두 세 개, 원반이라는 수라상과 곁상, 책상반이었다. 원반에는 쌀밥과 탕, 찌개· 찜·전골·김치와 편육·전·회·숙란·조림·나물 등의 반찬을 놓았고, 곁반에는 팥발, 전골과 별식 수란 등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책상반에는 찜, 곰탕, 구이, 고추장 등이 있었다.
 
12첩 반상의 수라상은 균현 잡힌 영양식단이었으며, 임금의 수라상 옆에는 늘 세 명의 상궁이 시중을 들었다. 1970년 12월 30일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된 조선 궁중의 12첩 수라상은 나중에 조선이 망하자 궁중음식은 나인들에 의해 민간으로 전해졌다. 수라상은 마지막 주방상궁이었던 한희순이 그의 제자 황혜성에게 전수했고, 황혜성의 맏딸인 한복려와 제자 정길자 등에게 이어졌다.
 
 
잘못 알려진 왕의 수라에 관한 진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등장하는 정조의 7첩 반상. 흔히 상상하는 12첩 반상이 아닌, 소박한 수라상이다. 1795년 2월 15일의 정조 수라상을 살펴보면 팥물밥과 배추국, 숭어잡장, 구이, 육회, 김치, 장이 올라 있다. 유교사회였던 조선에서 왕의 수라는 검소한 건강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렇다면 수라에 대한 수많은 오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 황제는 일제의 압력으로 순종에게 강제로 왕위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때 수많은 궁중요리사들이 해고됐다. 조선의 운명과 황제의 정치적 생명과 운명을 함께 했던 것이다. 당시 고종의 요리사였던 안순환은 이후 명월관이라는 조선 요리집을 열어 궁중요리를 보편화시킨다. 우리에게 익숙한 수라상은 조선이 패망한 이후 상궁들이 이어받은 것이었다.
 
(참고. ‘한국사를 바꿀 14가지 거짓과 진실’) NM
 
 
[출처 : 뉴스메이커 2012. 4. 2 조선시대 왕의 요리사는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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