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얕은 지식이 만들어 낸 '화려한 문명'에 중독되어 버린 정신적인 불구상태가 자신의 육체를 병들게 하고 스스로의 인생을 파멸의 구덩이로 이끌고 있다. 인간은 결코 왜소하거나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을만큼 무력하고 무능한 존재로 만들어진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과학이라는 환상과 문명이라는 사탕발림에 중독되어 스스로를 나약한 존재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찬란한 문화를 창조해 낸 자신들이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위대한 존재로 착각하고 자만한다.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고 스스로의 지식을 활용하여 신이 이룩하지 못한 것을 이룩하겠다는 오만과 방자함으로 스스로를 신의 자리에 올려 놓는 참람을 떨고 있다.
인간들이 자신도 모르게 쌓아 온 교만과 자만에 대하여 진지하게 반성하고 자연의 섭리에 부합되어 살아가는 모든 생명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식할 때, 그리하여 수용과 화합, 사랑, 이타심과 같은 긍정적인 사고를 싹 틔워 나갈 때 우리는 자신들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에게는 모두 '자연치유력'이라는 완벽한 의사가 태어나면서 이미 갖추어져 있고, 그것을 '본래의 자기와 동떨어진 가짜 자신'이 억압하기 때문에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기복구능력은 새롭게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있는 능력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무지의 지'라는 옛말의 의미와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분명히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뇌에는 쾌감과 즐거움, 행복감 등의 플러스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는 보수계와 혐오감이나 슬픔, 고통스러움 등의 마이너스적인 감정을 만들어내는 벌계라는 영역이 있음이 밝혀져 있다. 이를 쾌감중핵, 혐오중핵이라고 구별하기도 한다.
어떤 정보가 입력되면 보수계나 벌계를 자극하고 뇌의 신경세포와 신경세포의 사이 즉 시냅스에서 정보전달물질이 방출하게 된다. 보수계에 자극이 닿으면 도파민, β엔도르핀, 아드레날린, 멜라토닌, 세로토닌, 아세틸콜린 등이 방출되어 쾌감을 느끼게 하며, 벌계에 자극이 닿으면 노르아드레날린 등이 방출되어 안절부절 못하는 등의 불쾌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뇌를 각성시켜서 공격적이 되거나 혈압이 상승하여 머리에 피가 몰리는 상태가 된다.
비교적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보수계와 좁은 영역에 한정되어 있는 벌계가 뇌에 존재하고는 있지만 독자적으로는 사고, 기억, 명령과 같은 기능을 하지 못한다. 즉 자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보수계가 자극을 받으면 쾌감을 느끼는 물질을 방출하고 벌계가 자극을 받으면 불쾌감이나 동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어떤 정보를 어느 쪽으로 분류할 것인지 컨트롤하는 곳은 대뇌이다. 다시 말하면 보수계와 벌계의 기억과 작용은 대뇌에서 제어, 지배된다는 것이다.
벌계 영역에 있던 스트레스 정보가 편도체라는 정보처리 장치를 지나 대뇌 피질로 보내지고, 그 곳에서 벌계 정보의 네트워크가 완성되면 대뇌 속에 그 벌계의 자극이 기억된다. 대뇌가 그 중핵이며 감각과 감정의 수용 기관인 벌계 영역과 보수계 영역에는 대뇌와 같은 사고력과 분석력은 없다. 즉 이것은 벌계 영역과 보수계 영역 자체에는 벌계를 보수계로 전환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환력이 있는 것은 대뇌뿐이다.
대뇌에 의하여 벌계의 기억이 보수계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많은 것을 시사한다. 뇌의 상태가 좋을 때란 보수계 자극에 대해서 보수감각이 정확히 반응하는 상태이며, 이런 뇌의 상태일 때 자기 치유력이 활성화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사고와 학습을 통하여 변모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도시를 연결하는 철도 혹은 도로는 왕래하는 사람의 수나 열차의 주행량에 비례하여 점차 발전하게 될 것이며 왕래하는 사람의 수나 주행하는 열차의 수가 줄어들면 그 도로는 차츰 쓰이지 않게 될 것이고, 철도 또한 폐선될 것이다. 보수계의 길이나 벌계의 길도 이와 비슷하다. 벌계의 길을 사용하지 않는, 예를 들면 대뇌에 입력된 별계 기억을 거의 재생시키지 않으면 드디어 이 길은 통행금지가 되고, 네트워크가 차단되어 재생되지 않게 된다. 중요한 점은 벌계 네트워크든 보수계 네트워크든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확대되며, 반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을수록 감소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벌계의 학습을 그만두고 보수계의 학습을 하면 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기에 선망의 대상이었던 "하얀 쌀밥에 쇠고기 국", 또는 아이들이 즐겨 먹고 있는 '치킨과 햄버거'는 현재는 확고한 보수계의 기억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해도, 이러한 식품이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원흉임을 확실하게 인지하는 순간 그것들은 벌계의 기억 속으로 편입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학습에 의하여 평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잡곡밥과 푸성귀만으로도 얼마든지 만족한 식사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 진정한 자기
◈ 본연의 자기와 길들여진 가짜 자신
평소에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자신의 모습을 두고 "그게 바로 나야!"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이는 진정한 자기다 아니다.
현재 나의 모습은 태초의 원시생명체로부터 오늘날까지 오랜 진화의 과정에서 축적된 많은 지혜의 집적이다. 이렇게 생각하였을 때 자기는 다만 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지금 이 곳에 사는 자신이란 작은 존재가 아니라 몇만 년이나 된 지혜가 무의식중에 머물고 있는 기반이 확실하고 커다란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존재로 형성되게 한 근원적인 힘이 현대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진화'여도 상관없고, 종교적으로 이해하여 신의 절대적인 능력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든, 혹은 자연의 섭리라고 표현되는 '큰 질서'라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이렇게 크고 완벽하게 다듬어져 온 인간이란 존재는 손상을 입은 자기 자신을 복구할 수 있는 능력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치유력은 자신의 의식과는 관계없이 끊임없이 작동하며 항상 대기하고 있어서 어떤 손상이 발생하면 자동적으로 자가복구시스템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 이런 활동은 사람이 자연 환경 속에서 살아 있는 한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 신경 면역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연치유력은 자기 자신의 비뚤어진 의식과 심리, 사회적인 과도한 짐(스트레스) 때문에 혹은 부적절한 라이프 스타일을 취함으로써 거의 무력하게 생각될 정도로 그 힘이 억제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능력으로 본래 작동해야 할 치유력이 후천적으로 만들어져 온 의식할 수 있는 범위의 자신에 의해서 억제되어 균형을 깨뜨리고 있는 모습, 아파하는 모습이 우리의 삶, 즉 석가모니가 탄식한 '고통으로 가득찬 바다'이다.
이렇게 억제되어 있는 자기 복구능력을 끌어내기 위한 열쇠가 되는 사고방식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진실된 신뢰감을 회복하는데 있다. 본연의 자기와 지식으로 포장되어 있는 자기, 학습과 경험으로 규정되고 만들어진 자기의 편협함과 왜소함을 확고하게 이해하는 순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은 무한으로 확대된다. 본래의 자신이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이해하고, 그 요구에 부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관습으로 포장된 가짜 자신이 자연의 일부인 진정한 자기의 힘을 억제하는 것은 팔꿈치를 반대로 구부려서 팔을 부러뜨리는 것과 같다.
◈ 비워야만 채워질 수 있는 진솔한 나...
본래의 자기모습을 되찾기 위하여 우선 필요한 것은 자신의 나약함을 자각하는 일이다.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반드시 인식해야 하는 중요과제이다. 최초의 첫걸음은 힘을 빼고 마음을 비우는 것에서 시작한다. 최대한 힘을 내서 치유력을 발휘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리하고 불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기 위하여 '자신이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이 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우선은 혐오스런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또한 자신이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주변 사람들의 지지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자연히 알게 된다. 이러한 겸손한 마음이 본연의 자기로 되돌아가는 첫발을 내디딜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의 경우 과도한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다.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오만한 자신의 틀 속에 틀어박혀 있으면 사물에 대한 시각이 좁아지게 되어 솔직한 감정을 지니기 힘들어진다. 다시 말하면 '자신은 강하다'라고 인식하면 '**일 리 없다. **을 해야만 한다. **가 가능하다'와 같은 무의식의 속박에 규정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분수를 넘는 과욕을 부린다든가, 자신에게 기대하지 않더라도 해야만 한다고 분발하거나, 정말로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가 아닌데도 그 존재가 위협하지 않을 리 없다고 피해의식을 확대하는 등의 괴로운 선택을 계속하게 된다.
그렇지만 나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도움을 청해야 할 때 도움을 청할 수 있으며, 쓸데없는 기대에 부응하려하지 않게 되고, 위협이 아닌 것은 위협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으며, 불가능한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조금 힘을 빼는 것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에 여유와 탄력을 부여할 수 없게 된다. 사람은 고독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연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이므로 그 연관 속에서 진솔한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게 되고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 긍정적인 사고방식
◈ 무자각의 선택을 넘어 신념의 의식화로....
자신을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심신 양면에 쏟아지는 스트레스 요인을 나쁜 방향으로 향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무자각의 선택'이다. 이것은 스트레스라는 이름의 화살촉을 자신의 손에 들고, 무의식적으로 그것으로 자기의 마음을 찌르는 것과 같다. 곧바로 화살촉에서 손을 떼어야만 한다.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방식은 고요한 연못에 던져진 돌이 만들어내는 파문과 같이 주위의 모든 것으로 학대되기 쉬워서 동료, 상사, 애인, 부모 형제 자매에게로 파급이 되고 결국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든가, 자신은 행복해질 가치가 없는 사람이며, 자신은 사랑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를 자기 부정 감정, 혹은 자기 효력감의 결여라고 한다.
이와 같은 나쁜 신념을 버리고 좋은 신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신념의 의식화란 이런 의미이다. 또한 사람과 사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항상 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이 자신을 부정하고 있는 사이에 부정하고 있는 신념이 자신을 파괴하게 된다.
◈ 적극적인 발상의 전환
작은 성공의 체험을 쌓아가야 한다. 작으면서 좋은 것이 포인트이다. 작지만 성공함으로써 플러스 감각이 생기고, 자신 속의 보수계와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확대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반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이 만일 어떤 일로 고민하고 있다고 하자. 왜 자신은 고민해야 하고, 괴로워해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납득할 만한 답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발상의 전환을 시도하여야 한다. 즉 '자신에게 그 과제를 부여할 만큼 자신이 가치있는 사람이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발상을 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하면 지금까지 넘을 수 없었던 '왜'라는 의문의 문이 조금 열리는 듯한 안도감이 생길 것이다. 또한 우울하던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비출 것이다. 이것이 발상의 역전이다. 이것은 주체를 자신 쪽에 두지 않는 방법이다.
더욱이 자기가 놓여진 입장, 상황, 환경을 정확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좀더 해방감이 생기게 된다. 자기가 놓여져 있는 상황은 자기가 생각하였던 것만큼 나쁘지 않을 때가 많다. 또한 행복과 기쁨은 추구해서 얻는 것이라고 하는 생각도 있다. 즉 자기는 지금 불행하고 자기는 지금 기쁘지 않으므로 따라서 추구해 간다고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미 그것은 자기 주변의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현실을 안다는 것은 현실 검토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즉 기쁨이란 본래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 능력을 다르게 말하면 어떤 문제에 대하여 폭넓은 검토와 객관화를 할 수 있는가 하는 이야기가 된다.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상력도 넓어지고, 사물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손수건이 없어져서 '어딘가에 있겠지'라며 찾았던 적이 있을 것이다. 사실은 자기의 주머니에 있었는데... 이런 감각으로 기쁨을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이것이 서서히 느껴지는, 어깨의 힘을 빼는 듯한 감각일 때 해방감이 있고, 인생은 풍요로워지고 몸은 활기차게 변화되어 갈 것이다.
◈ 휴식과 기분전환의 효용
재채기를 하는 동안에는 눈 앞의 사물을 볼 수 없듯이, 사람은 동시에 2가지 일을 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머리 속에 불안, 불쾌, 불만 등이 들어차 있을 때는 당연히 그 일로 포화상태가 된다. 따라서 대뇌 속에서 불안과 불만 등을 느껴 괴로워하는 것은 이미 하나의 행동이므로 동시에 밝은 면을 생각하라고 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머리 속의 내용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을까? 실은 그 방향이 '한 가지'라는 특성에 힌트가 숨겨져 있다. 머리 속을 한 발 앞서 안심, 유쾌, 만족이란 내용으로 채우면 되는 것이다. 재빨리 즐겁게 행동하면 적어도 그때에는 괴로워한다는 행위는 불가능해진다.
능동적인 기분 전환은 이런 괴로운 행위를 없애는 데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 참된 삶을 사는 자
◈ 지식인이 아닌 지혜로운 사람으로....
사람이 안다는 것은 각자 자기의 입장에서 판단한 결과이지 결코 전체를 파악한 것은 아니다. 전체를 알지 못하고 일부분만 아는 것으로서는 결코 안 것이 아니다. 사람도 우주의 일부분이므로 우주 전체를 파악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생명도 우주적인 근원과 같은 것이므로 그 근원을 인간의 입장에서는 알 수가 없다.
지식은 너무나도 좁고 얕아서 전체를 보는 눈을 가리어 버린다. 지식은 전체를 수용할 수 있는 넓이도 없을 뿐 아니라, 인류라는 공동체를 담을 그릇도 못 되고, 더군다나 지구의 무게를 실을 수 있는 수레는 더욱 못 된다.
인간의 지식은 고통의 근원이다. 한번 아름다움을 알게 된 인간은 추한 것을 혐오하게 되어, 원하는 아름다움은 점점 더 희귀해지고 혐오하는 추한 것은 점점 더 늘어난다. 선을 추구하면 할수록 선은 점점 위축되어 가고 원치 않는 악은 자꾸 늘어 간다. 그것이 모든 불행의 화근이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만을 아름답게 여기면 그것이 곧 추한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이요, 선한 것만을 선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곧 악을 만들어내는 일이다."(도덕경 제 2장)
맛을 알기 때문에 맛이 없는 것을 괴로워한다. 사실 맛이 없는 것이 진정한 맛이다. 공기에 맛이 있는가? 물에 무슨 맛이 있다면 어쩌겠는가?
"맛 없는 것이 참다운 맛이다."(도덕경 제 63장)
좋은 맛을 알게 된 인간은 점점 더 편식하게 되고 계속 각종 요리를 연구해 내는 데 혈안이 되고 있지만 그것은 곧 과식의 원인이 될 뿐 아니라, 인간의 입맛을 상실하게 만들고 불건강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쾌적한 문화 주택을 알기 때문에 오막살이의 생활은 견딜 수 없는 불행이 되고 말았다. 맛을 내는 요리나 문화 주택이 없었던 옛날엔 이러한 고통이 인간을 괴롭힌 일이 없었다.
이제 문명의 중독자가 된 인간은 조금의 더위도 추위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약체가 되었다. 어린아기들은 맛을 구별하지 않고 무엇이든 입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무엇을 먹어도 맛있다. 분별심으로 사물을 구별하지 않고 아무 것이나 신기해하고 친근감을 가지고 만지려 한다. 그러나 자라면서 어른들이 그들을 문명화시킴으로써 그들 안에 있는 순수하고도 위대한 삶의 능력을 시들게 만들어 간다.
노자는 지식의 사용처는 진리(도, 생명, 신)를 행하는 데 있고, 비진리(이기심, 소유, 욕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데 있음을 타이르고 있다.
"내게 아는 것(지식)이 있다면 오직 큰길(생명, 자연, 신)을 걷는 것뿐이다(신과의 합일). 그리고 그 지식은 큰길에서 벗어나 사잇길로 빠질까 두려워하는 데 사용할 뿐이다.."(도덕경 제 53장)
◈ 환상을 벗어 던지고 자유의 나라로...
환상을 좇는 꿈에서 깨어난 사람은 어떠한 환경이나 처지에서든 풍요로움을 누리고 살 수 있다. 바다에 사는 고기라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우물 속에 사는 고기라도 조금도 아쉬움이 없는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고 소용이 닿지 않는 것이 없건만, 인간만이 자신의 지식에 의해 좋고 나쁨을 분별하고는, 수만 가지 중의 불과 몇 가지만을 좋다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가 나쁜 것으로 규정하고 산다. 이러한 독선이 편견을 낳고 투쟁과 대립을 불러오는 시원이 되며, 결국은 자신과 우리 모두를 황폐화 시켜나가는 독소가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또 얼마나 빈곤하고 가련한 삶인가?
이는 곧 대자연의 풍요로움을 모르기에 이미 '죽은 자'의 삶일 뿐이다.
◈ 마음의 최고 미덕은 겸손과 감사
우리의 운명과 건강을 좌우하는 근본은 마음에 있다. 마음은 육안으로 볼 수 없으나 부단한 자기 반성과 노력으로 맑게 승화시켜 나갈 수 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불경의 경구에서 타이르고 있듯이 모든 원인은 마음이 짓고 결과는 육체에 나타나니 우연은 없다. 모든 것은 필연이다.
한 순간에 상념을 일으키면 삼천대천 세계 어디라도 갈 수 있다. 이 생각들이 마음밭에 뿌리는 씨가 된다. 잡초 씨를 뿌리면 잡초가 돋아나고 연꽃 씨를 뿌리면 연꽃이 핀다. 뿌린 씨는 싹트게 마련이다. 뿌린 씨의 열매는 뿌린 자가 거두어야 한다. 인과의 법칙이 그것이다.
그래서 원인이 없는 질병은 없다. 중풍, 당뇨, 암, 류머티스 등의 병마도 그 원인을 찾아보면 마음에 있다. 중풍에 걸리기 쉬운 타입의 사람은 자기를 늘 우위에 놓는 특권의식이 강하다. 이 특권의식이 통하지 않을 때 마음의 동요가 일어난다. 즉 화를 낸다. 그 화는 밖으로 표출될 때도 있고 마음속에 머물러 그대로 입력될 경우도 많은데, 이는 둘 다 독이 된다.
우리 주변에는 평소에 호인으로 소문난 사람들이 중풍이나 암에 희생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러나 호인이라는 평가를 받을만큼 대인관계가 좋다고 해서 그 사람의 내면생활, 즉 상념의 세계가 원만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자식이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라고 하지만, 부모가 그것을 강요한다고 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것이 마음의 본질이요, 마음은 어디까지나 자유며, 그 누구의 간섭도 허락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자율에 맡겨진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부모에게 순종하고 안 하고는 어디까지나 그 자식이 선택할 자율적 자유의 문제다. 부모로서는 자식을 보호, 선도하는 좋은 이해자가 되어야 하는 도리가 있다. 부모가 자식의 불효를 상대로 버럭 화를 내고 마음에 파도를 일으키는 것과, 자식의 불효를 꾸짖어 깨우치게 하고, 효도로 인도하려는 사랑의 말과 행동과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화를 내는 것은 이기적인 자기 중심의 감정이요, 꾸짖는 것은 이타적인 사랑의 행동이다.
이렇듯 마음은 그 주인이 핸들을 꺾는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싹 틔우고 키워온 특권의식, 우월감, 자기과시의 마음들이 질병을 유발하는 위험인자로 작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이러한 이기적인 마음들이 충족되지 못하였을 때 마음의 행로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느냐에 달렸다. 우월감은 자기가 위에 있고 상대가 밑에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에 형평의 원리, 조화의 진리에서 크게 벗어난다. 그래서 특권의식, 우월감, 자기 과시욕 등은 인류의 스승들이 친절하게 일러주고 간 '중도'라는 안정과 평형의 상태로부터 이탈된 위험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인간은 원래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자연환경, 가정, 대인관계, 교통, 통신, 상호 의존과 조화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존명이 가능하다. 남보다 내가 우위에 있다는 생각에서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고 미련한 존재라는 것으로, 늘 신세지고 은혜를 입고 있다는 겸손과 감사의 의식구조로의 전환이 자신을 더욱 크고 넉넉한 존재로 성장시키는 자양이 될 것이다.
예수도 부처도 마음의 최고 미덕은 겸손과 감사라고 말했다. 마음이 겸손과 감사로 충만할 때 그의 영혼는 신의 빛으로 채워질 수 있고, 그 광채는 모든 질병의 그림자를 추방하는 기적의 힘을 발휘할 것이다. 출처: 겨레사랑생활건강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