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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도전장포새우젓 1.jpg
 
 
한양풍경 도성문(都城門)의 내사산(백악산,타락산,인황산,목멱산)
15-05-28 22:13

한양풍경과 도성문(都城門)
서울의 내사산(백악,타락산,인황산,목멱산)은 아름다운 형승(形勝)을 만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적으로는 서울을 지키는 훌륭한 방어산 구실을 하였다. 그 네 산의 능선을 따라 방둘러 석상을 쌓은 것이 도성이고, 이 도성 안이 한양, 즉 서울이다.
서울을 가르키는 말로는 경성(京城), 도성(都城), 한성(漢城), 황성(皇城)등이 있다. 이런 이름들에 성(城)자가 붙은 까닭은 서울이 성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도성이란 말은 서울을 가르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을 가르키는 말로 성곽의 길이는 약 17키로미터, 높이는 7.57m,너비는 5.45~7.57m가 된다.
 
성 안과 밖을 연결시켜주는 문으로는 동서남북에 네 대문을 내고, 그 사이사이에 소문을 내어 모두 여덟 개의 문이 있었다. 사대문의 이름은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인 오상(五常 : 仁義禮智信)를 각각 도성문에 한 글자씩 붙여 지었다.
동대문이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 돈의문(敦義門), 남대문 숭례문(崇禮門)이 인데 오상에 따르면 북대문은 '지(智)'자가 들어가야 하나 정(靖)'자를 넣어 숙정문(肅靖門이라 했다. 꾀 '정(靖)'자와가 슬기 '지'자와 뜻이 통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소문의 이름은 동소문이 혜화문(惠,化門) 서소문이 소의문(昭義門), 남소문이 광희문(光熙門) 그리고 서북문의 소문이 창의문(彰義門) 또는 별칭으로 자하문(紫霞門)이라 했다.
도성과 문들은 조선 초기 개경에서 한양으로 전도한 지 2년 후인 1396년(태조 5)에 처음 개축하였다.그때 험한 지역은 돌로, 평탄한 지역은 흙으로 쌓았다. 세종 4년에 도성을 수축하면서 변이 30~40센티미터 되는 자연석으로 쌓았으며, 숙종 30년 어간에 다시 수축을 하면서 한 변이 두자, 곧 60센티미터 정도되는 네모 반 듯한 돌을 틈새 없이 짱을 맞추어 쌓았다. 1898년 전차가 놓이면서 흥인문(興仁門 : 동대문)과 돈의문(敦義門 : 서대문) 주위의 성곽이일부 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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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순종이 일제에 의해 황제가 될 무렵 7월 30일 '성벽위원회'가 설치되었고, 10월 16일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천왕이 서울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때 비루한 문을 통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숭례문의 좌우 성벽을 헐고 옆으로 비켜 갔다. 이때부터 성벽은 본격적으로 허물어져 나가기 시자했다.>
 
홍인문(동대문), 숭례문(남대문)은 다행히 몸체는 보존되었으나 성벽이 떨어져 나갔고 광화문(남동문), 창의문(서북문)은 길한 옆으로 비켜 앉아 문이 아니라, 그저 기념물 처럼 되어 버렸다. 혜화문(동북문)은 근년에 복원이 되었으나 길 한옆 축대 꼭대기에 있어 전혀 문이라는 생각이 들지않고 숙정문(북대문)역시 1970년 복원되었으나 일반인들이 접근 할 수 없는 통제구역에 있어서 존재조차 낮설게 되었다. 돈의문(서대문), 소의문(서소문)은 그나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서대문구,서소문동이라는 지명으로 간신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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