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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에서 발견한 선조들의 지혜_ 借景 자경(自景)
15-07-08 08:56

창을 통해 일어나는 풍경작용의 대상은 크게 자연물과 집의 일부로 나눌 수 있다. 자연물은 대부분의 집에서 흔히 일어나는 풍경작용이다. 창밖에 수목 한 점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집의 일부는 좀 다르다. 방 안에 앉아서 내 집을 풍경으로 감상할 수 있는 것은 한옥만의 독특한 특징에 해당되는데 이것을 ‘자경’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다. 자경은 말 그대로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본다는 의미다. 집에 적용하면 내 집의 모습을 풍경요소로 활용하여 감상한다는 의미다. 집을 주체와 동격으로 가정한 상태에서 자기 스스로를 풍경요소로 활용하는 입장이다. 주체가 관찰자인 동시에 피감상 대상, 즉 객체가 되는 것이다. 자경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 풍경요소가 수목이나 꽃이 아닌 집의 일부분이어야 한다. 액자작용을 일으키는 주체로서의 집이 되는 풍경요소인 객체도 되는 현상이다. 액자와 풍경 모두가 집의 일부분이어야 한다. 다음으로 풍경작용이 집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 내 집을 집 밖에서 보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 평범하다. 내가 남을 보거나 남이 나를 보는 일방통행의 시각작용으로 새로울 것이 전혀 없다. 한옥의 특징이자 장점 가운데 하나는 집 안에 앉아서 내 집의 생김새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남을 봄과 동시에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나 스스로를 보게 되는 쌍방향 시각작용을 한 번에 행하는 것이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풍경작용으로 만든 것이 ‘자경’이다.
 

 

한옥에서 자경이 일어나는 이유는 ‘외파(explosion)’라는 한옥만의 구성 방식 때문이다. 씨앗이 발아하듯 방 하나의 기본 공간단위가 밖으로 증식하면서 분할하는 구성이다. 육면체 윤곽을 먼저 정하고 안으로 잘라 들어가며 구성하는 서양의 ‘내파(implosion)’ 구성과 반대되는 한옥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한옥의 평면을 보면 꺾임, 증식분할, 나눔 등이 유난히 많다. 개별 채에서부터 이미 한 번 꺾인 ‘ㄱ’자형, 두 번 꺾인 ‘ㄷ’자형, 세 번 꺾여 에워싸는 ‘ㅁ’자형, 에워싼 다음 한 번 더 뻗어나간 ‘ㅂ’자형 등 구성방식이 다양하다. 한글 자음과 닮은꼴을 보이기도 하려니와 한자에까지도 유추할 수 있는 더 복잡한 구성들도 많다. 한옥 전체로 보면 이런 개별 채들이 다시 몇 개씩 어울리면서 한자에 유추할 수 있는 복잡한 구성으로 발전한다.


그 결과 집 안에 앉아서 내 집을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이 가능해진다. 이때 내 집을 창 안에 담아서 볼 수 있다면 ‘자경’이 된다. 집과 집이 마주보기도 하고 직각으로 어긋나 비스듬히 맞서기도 한다. 창만 열면 집의 다른 부분이 보이니 자경작용을 만들어낼 수 있는 요인이 넘쳐난다는 뜻이다. 공간 켜가 복층이 되면서 문을 열면 밖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공간 켜와 집의 다른 일부가 보인다. 채와 채 사이를 담이 가르고 문이 나면서 자경작용의 가능성은 증폭된다. 마당과 대청도 자경작용을 유발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집과 집 사이에 적당한 간격을 만들어 거리를 조절하면서 자경작용을 돕는다. 집 안에 앉아서 내 집을 본다는 것은 내 스스로 내 몸을 본다는 것과 같은 말이며 확장하면 내가 나를 본다는 말이다. 내가 나를 본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데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나르시시즘, 즉 자기애의 심리작용이다. 외관의 모습은 나르시시즘을 성립시키는 핵심 요소이나 이것은 반드시 시각작용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프로이드는 나르시시즘을 오토에로티즘(自體愛)보다 한 단계 성숙한 상태로 정의했다. 오토에로티즘은 자신의 신체를 감각적이고 단편적인 성충동의 대상으로만 보는 데 반해 나르시시즘은 총체적이고 통일된 사랑의 대상으로 대할 수 있게 되는 단계다. 물론 나르시시즘만으로도 아직 불완전한 단계이지만 적어도 자신의 신체를 스스로 종합적 인격체로 정의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는 일정한 인격미를 획득한 상태로 볼 수 있다. 이것을 한옥의 자경에 적용하면 자기 집을 보면서 느끼는 자기만족 상태이거나 혹은 자기 집을 풍경요소로 즐길 수 있는 자기애의 여유가 된다.


둘째, 자아성찰이다. 증자(曾子=曾參)는 『증자』에서 ‘하루 세 번 내 몸을 돌이켜 살핀다’고 했다. 증자는 실천을 위주로 한 수양을 주창했는데 날마다 세 가지로 자신을 반성하는 것을 요체로 보았다. 형식적 예(禮)보다는 실천적 자기수양을 중시했는데 내 몸을 돌이켜 살피는 일이 핵심을 이룬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잘못하는 것은 없는지, 몸가짐이 흐트러지지는 않았는지 등등 끊임없이 스스로를 살펴 돌아보라는 가르침이다.


셋째, 자아의식을 확고히 한다는 의미다. 자경작용은 관찰자와 대상이 모두 자아다. 모든 질서가 나를 중심으로 짜인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의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는 차원에서 자존감을 확보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이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보한다. 그 목적은 나와 대상, 즉 나와 주변 사이에 동일화 작용을 일으키는 쌍방향 교류에 있다. 세상을 나인 주체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타자와 나를 동일시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이상을 종합하면 자경이란 ‘내가 나 스스로를 종합적 인격체로 정의해서 사랑한 뒤 자아성찰과 자기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이를 바탕으로 남과 나를 분별 지어 대립시키지 않고 하나가 된다’는 동양적 가르침과 일치가 되는 건축작용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불이(不二타)’ 사상으로 가르쳤고 현대 윤리학에서는 ‘타자 동일화’라고 가르친다. 자경은 이런 가르침을 집 구조에 반영해서 즐긴다는 뜻이다. 관찰자와 풍경요소, 즉 집의 이쪽과 저쪽은 서로 보는 주체와 보이는 객체 사이를 오간다. 둘은 이분법으로 나뉘어 대립하지 않는다. 전도는 매우 부드러워서 둘 사이에는 서로를 구별하기 힘든 일체 상태가 나타난다. 문양, 건축형식, 분위기 등 조형적 통일성이 먼저 일어나고 풍경적 어울림으로 발전한다. ‘방향 전도’, 혹은 ‘위치 전도’라는 것도 있다. 문이나 창을 통해 보는 풍경작용이 이쪽과 저쪽, 혹은 안과 밖을 오가며 양방향으로 일어난다는 의미다. 문의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면 내가 있는 방이 풍경요소가 되면서 풍경작용이 일어난다. 나는 피사체가 된다. 거꾸로 문으로 들어가 뒤를 돌아보면 내가 관찰자가 되고 집의 다른 부분이 풍경요소, 즉 피사체가 된다. 방향과 위치를 매개로 한 나와 너, 주체와 객체, 관찰자와 피사체 사이의 전도다. 전도 작용은 불이 사상을 구체화하는 건축적 전략의 하나다.


이처럼 자경은 다분히 유교적 건축현상이다. 한옥이 유교시대 상류층의 주거였으니 당연하다 할 만하다. 한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느니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느니 하면서 유교의 현대적 존재 이유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현대에 조선시대 유교처럼 사는 사람은 없겠지만 내용에 따라 현대화해서 좋은 교훈으로 삼는 것은 필요하다. 자경작용도 그중 하나다. 자경작용의 의미를 현대 한국인의 주거와 비교하면 잘 알 수 있다. 요즘 자기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니, 이런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 수십 층 콘크리트 건물 속에 창 몇 개 난 것이 전부이려니와 모든 집이 이런 모습이 똑같기 때문이다. 집은 사는 사람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집이 같으니 정체성이 성립되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 정체성을 찾으려 든다. 과도한 학벌 경쟁과 출세 욕구를 유발한다. 끊임없이 나를 남과 분별하려 든다. 내가 남보다 잘난 구석을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라도 만들어내야 겨우 안심이 된다. 억지와 갈등은 커져만 간다. 가장 힘든 것은 이런 나 자신이다. 모두가 이렇게 힘든 나이니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는 병들어 신음한다. 자경은 현대 한국인의 이런 암울한 상태에 대한 좋은 교훈이다. 내 집에 앉아서 내 집을 성찰하고 감상하며 즐기는 여유와 수양이 소중한 이유다.

 

    출처: 한국문화재재단 글˚임석재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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