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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심으로 세운 계획도시, 수원화성(華城)
15-07-08 13:43

효심으로 세운 계획도시, 화성(華城)

1997년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은 조선의 제22대 왕인 정조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계획도시이다. 때문에 화성의 축성 목적과 계획 원리에는 정조의 가치관이 녹아 있다. 정조가 화성 축성을 계획한 첫 번째 이유는 사도세자묘의 이장이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읍으로 이장하기로 마음먹었고 구 수원읍의 중심지가 낙점되었다. 구 읍성은 사도세자묘의 관리와 정조의 행차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읍성 건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에 더해 정조가 현륭원(사도세자묘)을 참배할 때 머물 행궁 또한 건설하게 되면서 새로운 읍성, 화성의 규모는 더욱 불어났다.
일각에서는 정조가 천도(遷都)하기 위해 화성을 건설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실상은 정조가 은퇴 후 거취를 마련하는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배후도시로 화성을 건설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양란이후 조선 조정은 끊임없는 당쟁을 겪었고 그로 인해 신권이 강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왕권은 약화되었다. 그러나 숙종과 영조 대에 이르러 탕평책을 실시하면서 왕권이 많이 강해졌고, 정조 역시 신하들과의 적절한 협조와 견제를 바탕으로 왕권을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렇지만 정조는 보다 확실한 왕권강화를 위해 세자가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조기 양위를 한 후 경제력과 군사력을 집중시킨 신도시 화성으로 은퇴하여 한양의 임금과의 공조를 꾀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원 방화수류정 / 한정구 作


조선의 실학사상, 화성 축조로 피어나다

화성의 축성 계획단계부터 실제 축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바로 실학사상과 신문물이다.
양란을 겪은 이후 실학파는 지역방어 강화를 위해 읍성강화론을 주창했고 실제로 18세기에는 여러 읍성에서 방어기능 강화를 위한 증ㆍ개축이 일어나기도 했다. 화성의 계획과 축조 역시 조선후기의 대표적 실학자 중 한 명인 정약용의 주도 하에 진행되었다. 정약용은 정조의 지시를 바탕으로 기존 조선 성제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더 나아가 중국의 제도를 분석했으며, 청나라로부터 들여온 서양의 과학기술까지 과거와 현재의 모든 분야를 검토하고 종합한 후 『성설(城說)』을 편찬하여 정조에게 올렸다.
여기서 정약용은 성의 규모, 형태, 축성 재료, 시공 방법 등 모든 면에서 실학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방안을 제시했다. 특히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참고로 하여 적은 힘으로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릴 수 있는 거중기를 개발하는 등 실질적인 기술개발에도 힘썼고, 축조 시에도 이전까지 성곽 축조에서 잘 사용되지 않던 벽돌을 사용하여 다양한 방어시설을 만들어 실용적인 방어기능을 갖추는 등 다방면에서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려 노력하였다.
정약용은 화성을 축성하는 과정을 세세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벽돌을 만드는 법, 그것을 쌓는 법, 성의 구체적인 구조, 축성에 들어간 재료의 종류와 양. 그 모든 것을 누구나 쉽게 읽고 파악할 수 있도록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이다.
 
수원 화성 / 서춘호 作


실질적인 방어기능을 갖춘 신도시

화성의 성곽은 전체적으로는 버들잎 모양으로, 도심부 전체를 감싸면서 길게 이어지고 있는데 팔달산의 지형 때문에 정형을 이루지 않고 불규칙한 형태를 띤다. 특이한 점으로는 상대적으로 방어시설이 취약했던 한양과는 다르게 거의 100m마다 방어시설이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모두 48개소의 방어시설은 벽돌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것이 많은데 노대1), 포루2), 치성3), 옹성4)등이 대표적이다.
화성의 주요 관청 건물로는 행궁, 객사, 동헌 등이 있었는데 이 중에서 행궁은 정조가 능행 시에 이용하던 공간으로 은퇴 후에 정조의 생활공간으로 지어진 것이기도 했다. 화성의 관청 배치는 바로 이 행궁을 중심으로 행궁 왼편에 객사, 오른편에 동헌과 내아가 위치하였다. 행궁의 규모 역시 여타 행궁들과는 달리 컸으며 관아의 규모 역시 상대적으로 큰 편으로 행궁과 관아를 모두 합쳐 약 620여 칸에 이르렀다고 한다. 행궁의 경우 최근 발굴을 통한 복원이 진행되었다.
화성의 성 내 도로망 또한 이전의 조선시대 읍성들과는 다른 구조를 가진다. 수도 한양의 경우 丁자 형태의 대로가 있었고 대로에 연결되는 작은 골목길들이 주를 이뤘기에 격자 형태의 체계적인 대형 도로망이 조성되어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화성의 도로망은 축성 당시에 수리사업과 함께 조성되었는데 주요 가로는 십자가로와 신작로이다. 먼저 십자가로는 주례의 원칙(도로망은 격자형 또는 十자형태로)을 따른 것으로 성 한복판에 놓인 네거리 교차로이며, 남북으로는 팔달문과 장안문, 서쪽은 행궁, 동쪽으로는 매향교를 건너 동문으로 연결된다. 이처럼 십자가로는 화성 내부 도로의 중심이자 거주구역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다. 신작로의 경우 십자가로 동쪽에서 장안문을 지나 영화정까지, 십자가로 동쪽에서 오교를 건너, 동장대 북쪽을 연결하는 길이다. 도로 폭의 경우 넓은 곳이 7~8m, 좁은 곳은 간선도로라도 3m정도로 도로 폭이 일정하지는 않으나 신작로의 경우 넓은 폭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편이다.
                                                              - 출처: 한국문화재재단  글. 기획조정실 홍보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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